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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8화 (8/176)

8화

윈터는 대답이 없었다. 입을 다물고 그녀를 주시할 뿐이었다.

한참 할 말을 생각하던 윈터가 입을 열었다.

“이혼을 원한다면 언제든지 해 주지.”

“정말요?”

“다만 내가 결혼을 위해서 지불한 돈은 당연히 돌려줘야겠지.”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윈터가 태연자약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3년이면 이자가 붙어. 적게 잡아서 2,700만 라크네 정도 돌려주면 되겠군.”

“…….”

“아, 당신이 내 아내로 계셔 주신 3년만큼 노동력을 쳐줘야 하니 이자는 빼 줘야겠네. 그리고 또 뭘 더 쳐줘야 하지……. 침대 위에서 뒹군 값을 쳐줄까?”

윈터가 다가가자 바이올렛은 점점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몸이 벽에 닿기 직전 윈터는 공주님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무심코 바이올렛의 머리와 벽 사이에 손을 넣어 뒤통수를 감쌌다.

그 덕에 두 사람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윈터가 몸을 숙이고 분노와 원망이 뒤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혼하자고? 당신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나에게.”

그는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비틀어 버리기 위해 폭언을 내뱉었다.

이혼 이야기를 꺼내면 돈 이야기를 꺼낼 것이라고, 바이올렛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자신도 그 이유 때문에 이 3년을 참아 왔던 거니까. 그러나 이렇게 기묘할 정도의 분노를 쏟아 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바이올렛이 숨을 가까스로 길게 내쉬고 눈을 내리깔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나와 결혼으로 크게 손해를 본 건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원하지도 않는 결혼을 이어 가는 건 손해가 더 커지기만 하는 일 아닌가요?”

“누구 맘대로…….”

“차라리 이혼하고, 나를 빚더미에 앉혀요. 내 힘으로 못 갚는 거 알아요. 일하다가 죽어도 좋아요. 그래도…… 그게 당신에게 이득이잖아요.”

“그렇게까지 해서 이혼을 하겠다고? 왜? 도대체 이유가 뭔데?”

바이올렛이 저도 모르게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어떻게 아직도 이유를 몰라요. 도대체 당신은…… 내가 왜 그렇게까지 싫어요?”

“……뭐?”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윈터는 조금도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아내가 왜, 제가 그녀를 그렇게까지 싫어하냐고 묻고 있는지.

윈터의 손이 덜덜 떨렸다. 몸속에서 태풍이라도 몰아치는 듯했다. 피가 온몸을 휘젓는 것처럼 온몸이 분노와 좌절감에 휩쓸렸다.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틀어쥐고 싶었다. 당장에 끌고 들어가 단단히 가둬 두지 않으면 이대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할 수 있는 거라곤, 힘겹게 대답을 내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 이혼할 생각도 없고. 어차피 내가 이혼을 원하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을 도와주지 않아. 그 정도는 알고 계시겠지.”

“……알아요.”

“그럼 다시는 그딴 말 꺼내지 마.”

윈터가 그녀에게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허공을 보며 숨을 가다듬은 후 돌아서서 침실로 들어갔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에 바이올렛이 움찔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나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

“거짓말쟁이.”

바이올렛이 서럽게 혼잣말하며 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

윈터와의 대화로 그녀는 확실히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돈이 얽힌 이상 그녀 혼자만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마음으로는 에쉬가 미웠지만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남편의 돈을 받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에쉬였다. 이제 빚을 완전히 갚고 국민들의 지지도 얻기 시작했으니 현재로는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힘을 가진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혼을 하고 싶으니 윈터에게 어떤 것이든 작위를 수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달라고 보냈다. 그에게는 추종자가 있으니 법을 잘 찾아보면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리라 바이올렛은 생각했던 것이다. 돈이 걸려 있지 않다면 두 사람의 이혼이 에쉬에게 피해를 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바이올렛은 수도를 떠나는 기차에 탔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윈터가 앉았다. 그는 이혼 얘기 따윈 듣지 못한 것처럼 굴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는 열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맥주 한 잔을 비웠다. 일곱 시간을 가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술을 마셨다.

보다 못한 바이올렛이 입을 열었다.

“너무 많이 마시는 것 아닌가요?”

“전혀.”

윈터가 빈정거렸다.

“왜. 공주님 눈에는 이렇게 술을 마시는 게 천박해서 견딜 수가 없나 보지?”

“아버지도 술을 많이 드셨어요. 걱정돼서 그래요. 오래 못 살까 봐. 그리고…….”

“그리고 뭐.”

“사람을 보고 천박하다고 말하는 거 아니에요.”

바이올렛이 혼내듯이 한마디 하고 입을 다물었다. 윈터가 짜증이라도 낼 줄 알았는데 그는 약간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바이올렛을 보더니 휙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손으로 턱을 괬다.

“……잘나셨어, 그래.”

바이올렛은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며 역방향으로 앉아 있는 윈터를 보았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세찬 바람이 그의 새카만 머리칼을 헝클어 윤기가 흐르는 구릿빛 피부에 달라붙게 했다가 떨어뜨렸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마음은 정리했지만 이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는 자꾸만, 이상한 그리움이 들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바이올렛은 숨통이 누군가의 손에 비틀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잠깐의 휴가와 의사가 처방해 준 약으로 바이올렛은 확실히 기운을 차렸다. 특히 약을 바꾸니 두통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바이올렛이 체감하기엔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일곱 시간 뒤 역에 도착해서 먼저 내린 윈터가 뒤따라 내려온 바이올렛에게 물었다.

“정말 대단하군. 어떻게 내내 똑같은 자세로 여기까지 올 수가 있지?”

그가 빈정거리자 모처럼 바이올렛도 같이 핀잔했다.

“당신이야말로 어떻게 그렇게 수도 없이 자세를 바꾸는 거죠? 어린아이와 같이 오는 줄 알았어요.”

“의자가 불편한 걸 어떡해.”

윈터는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같이 투덜거리고, 빈정거렸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주머니에 손을 구겨 넣고 마차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하던 윈터는 따라오는 기척이 없어 뒤를 돌아보았다. 바이올렛은 꽃바구니를 든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이올렛이 천천히 윈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꽃을 사 줄래요? 계약서의 보답으로.”

그러자 윈터가 인상을 쓰며 대꾸했다.

“나중에 딴말하지 말고 제대로 된 걸 요구해.”

“저 꽃을 좋아해요.”

“그럼 나중에. 집에 있는 꽃들도 저것보단 좋은 꽃이잖아.”

“지금 말 나온 김에 사 주면 서로 편하잖아요. 집에 있는 꽃은 선물이 아니니까. 꽃 선물이 받고 싶어요. 꽃을 사 줘요.”

윈터는 그 두 꽃이 뭐가 다르다는 건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굳이 더 거절하지 않고 소년에게로 걸어갔다. 그는 소년이 든 바구니를 살펴 아직 다 피지 않은 한 송이를 사서 바이올렛에게 돌아왔다.

“자.”

“고마워요.”

바이올렛은 그가 무뚝뚝하게 건네준 장미를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선물 받은 사람 같지 않게 한참 씁쓸해하던 바이올렛이 윈터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예쁘네요.”

“이혼하자고 말해 놓고 웃음이 나오나 보네.”

“그러게요.”

바이올렛은 소중히 꽃을 손으로 보호하며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침실에 돌아온 바이올렛은 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화병 하나를 가져와 윈터가 준 꽃을 꽂았다.

*

윈터는 웬일로 일주일이나 머물고 수도로 돌아갔다. 여전히 일에 바빠 바이올렛과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이렇게 저택에 오래 있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바이올렛은 윈터가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이혼을 싫어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제가 모르는 사이에 이 결혼이 그에게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가를 생각해 보았지만 지금으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저택을 떠난 날로부터 보름 뒤인 오늘, 제임스 블루밍 공작의 생일 파티가 있었다.

오늘 저녁이면 아버지의 생일 축하 파티를 위해 윈터가 돌아올 것이다. 바이올렛은 그가 돌아오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었다.

여느 때처럼 점심부터 이어지는 티타임에 가기 위해 바이올렛은 검은색에 가까운 보라색 드레스를 입었다. 준비를 마친 그녀가 방을 나서려는데 허락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고 에쉬 로렌스가 걸어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캐서린 블루밍이 서 있었다.

바이올렛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굳은 두 사람의 표정에 불안감을 느꼈다. 에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혼? 어떻게 그딴 소리가 나와. 왜? 이유가 뭔데?”

그의 분노한 목소리에 바이올렛이 멈칫했다. 그러자 에쉬가 불렀는지 그와 함께 온 캐서린이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바이올렛. 난 정말…… 최선을 다했다. 네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아프다는 거짓말을 할 때도 넘어갔어.”

캐서린이 이제는 정말 못 견디겠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윈터의 신분이 부족하게 느껴졌던 건 알아. 하지만 너도 그런 줄 알고 결혼을 승낙했던 거 아니니? 바이올렛, 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야. 아무리 공주님이라고 해도 이렇게 네 멋대로 굴어서는 안 돼. 내가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정말 속상하구나.”

바이올렛은 심장 속에서 덜컹덜컹 고장 난 소리가 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몇 시간이고 자신을 가운데 두고 모욕하던 캐서린과 그녀의 친구들이 떠올랐다.

한 마디도 못 하고 그것을 듣고 있던 날들을 생각하니 정신 어딘가가 끊어져 버리는 기분이었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었다.

그녀가 내뱉듯이 말했다.

“남편의 신분 같은 건 상관없어요. 그래서 이혼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전 이제 티타임에 모욕을 들으며 서 있고 싶지 않아요.”

“바, 바이올렛…….”

캐서린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바이올렛이 에쉬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왜 사람들에게 사기꾼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정말로 거짓말을 한 건 오빠잖아. 그런데 왜 내가…….”

에쉬가 기가 찬다는 듯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왕실을 해산하는 건 국민들이 원하는 일이었다는 걸 너도 알잖아. 매일같이 왕성 앞에서 시위하는 걸 들었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야?”

사실 에쉬에게는 이 이혼을 무조건 막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블루밍 부부와 에쉬 로렌스는 공모하여 윈터가 바이올렛의 재산으로 나눠 둔 돈을 빼돌리고 있었다. 다행히 윈터는 바이올렛의 재산에 조금도 참견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에쉬가 왕족이었던 탓에 은행에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바이올렛의 재산을 가져갈 수 있게 돕는다는 것을 몰랐다.

바이올렛의 이혼은 곧 그들 모두의 돈줄이 끊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드시 바이올렛의 자존감을 꺾어 이대로 결혼을 유지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캐서린도, 에쉬도 제 손으로 누군가를 때리는 것을 매우 천박하게 여겼다. 귀족들은 자식이 잘못을 해도 결코 때리지 않았다. 대신 벽장에 가두는 것을 선택했다.

에쉬가 캐서린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캐서린 부인. 제가 허락할 테니 저 아이를 어떤 방법으로든 바로잡아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캐서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바이올렛. 이건 너를 생각해서 주는 벌이야. 너도 이해하지?”

“그게 무슨…….”

바이올렛이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을 때 캐서린이 데려온 하녀 둘이 그녀를 붙잡아 벽장으로 밀어 넣었다. 문고리에 사슬이 감기고 자물쇠가 채워졌다. 캐서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딸과 다름없는 네가 이럴 때마다 내 마음은 얼마나 아픈지 아니? 저녁 식사 때까지 여기서 반성하렴.”

잠시 후, 두 사람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이 조용했다.

바이올렛은 멍하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동안 벽에 이마를 기대고 꼼짝을 않던 그녀의 머릿속에 죽음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그러자 제가 죽고자 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분명, 수면제를 전부 털어 넣은 이후 몸이 바뀌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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