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두 사람은 약속 장소 바로 앞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바이올렛이 계단으로 향하자 윈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5층이야. 못 걸어.”
“제 침실도 5층이에요.”
그 말에 윈터가 곧장 다섯 걸음 정도 뒤에 서 있는 하옐에게 말했다.
“집에 승강기 설치하라고 해.”
“예, 대표님.”
하옐이 곧바로 달려갔다. 바이올렛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제 몸을 끌고 다니는 게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러는 건지.
결국 승강기를 타고 5층에 들어서는 순간, 바이올렛이 멈춰 섰다. 바닷가 쪽 벽이 전부 유리로 이루어져 있어 바다와 하얀 모래사장, 파란 하늘과 머리에 주황색 선이 있는 라크라운드 기러기들이 보였다.
바이올렛은 창가 자리에 앉아서도 내내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렇게 근사한 장면은 처음이었다.
레스토랑의 음식들은 남동부식 해산물 요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크림과 버터를 적게 쓴 요리들에 바이올렛의 기분도 조금 산뜻해졌다.
식사를 하던 중 윈터가 다소 민망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당신 말이 맞더군.”
“네?”
“내 혈통. 주술사까진 아니지만 카닉 일족에 대해 알아보니 역사에 몇 번 남과 몸이 바뀌었다는 기록이 있었다더군. 이유나 방법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그랬군요.”
“그리고 당신이 처리한 계약서도 훌륭했어. 사례하지.”
아내에게 사례라니. 3년이나 부부였는데 어찌나 남 같은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훌륭했다는 말이 기뻐 한참 사례를 생각하던 바이올렛이 물었다.
“다음 달 아버님 생신에 같이 있어 줄래요?”
“내 시간은 그것보다 비싸. 물건으로 말해.”
“……그렇군요.”
그녀가 대답하고 입을 다물자 윈터가 짜증스레 말했다.
“난 당신의 그런 태도가 싫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더 해. 답답하게 굴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라면…….”
바이올렛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하나 있어요. 궁금한 거.”
“말해.”
“혹시 내가 죽었다면 당신은 내 장례식에 와 줬을까요?”
비슷한 추측도 할 수 없었던 것을 바이올렛이 묻자 윈터가 고개를 들고 바이올렛을 보았다.
그의 미간이 천천히 좁아졌다.
“무슨 의미지?”
“그 말 그대로예요.”
“‘죽었다면’이라며.”
그의 질문에 바이올렛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사느니 죽을까, 생각해 봤거든요.”
윈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조소했다.
“엄살 부리지 마.”
“왜 엄살이라고 생각해요?”
“당신 말이야. 살면서 몇 번이나 맞아 봤어? 남 밑에서 일해 본 적은 있어? 어디 갇히거나 묶여서 끌려 다닌 적은? 아니. 하다못해 돈이 없어서 굶어 본 적은 있고?”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입을 다물었다. 윈터가 비꼬듯 물었다.
“아니면 죽어 버릴 거라고 날 협박하기라도 하는 건가?”
“…….”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줄 알았는데, 정작 그와 대화를 시작하니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그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가, 모든 식사가 끝나 갈 즈음 바이올렛이 다시 물었다.
“그래도. 혹시 죽었다면요.”
“…….”
“그럼 그때는 나한테 하루를 내 줬을까요?”
아내의 장례식이라니. 웃기지 말라고 말하다가도, 저도 모르게 바이올렛의 장례식을 상상한 윈터가 대답하려다 말문이 막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내가 뭘 위해서 돈을 버는 건데.
당신 코를 납작하게 해 주려고. 그러려고 버는 건데 당신이 죽으면 내 인생은 뭐가 돼.
아내는 언제나 예의 바르고, 자신은 언제나 무례한데도 윈터는 늘 귀한 공주님께서 천한 이방인을 굽어살피고 계신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결혼식에서도 그랬다.
결혼 첫날이던 첫 만남. 윈터는 마차에서 내려서는 바이올렛 로렌스에게 완전히 압도되었다.
사박사박 걸어와 제 눈을 보며 입 맞추라는 듯 손등을 내미는 그녀와 마주쳤을 때, 윈터는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일단 입을 맞추면서도 그녀가 제 행동을 한심하게 여기리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며칠을 노력해 얻은 제 귀족적인 걸음걸이도, 웬일로 참을성 있게 버텼던 답답한 옷매무새도 바이올렛에게는 일상이었고 숨 쉬듯이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걸 못하는 사람, 그런 예법들을 배우지 못할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 고귀한 여자를 충족시킬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자신에게는 없었고, 심지어는 수중에 남은 돈도 없었다.
그러니 우선 돈. 그가 유일하게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그것이었다.
윈터가 더 이상 대답이 없자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
식사가 끝난 뒤 윈터가 그대로 떠나 버리고도 바이올렛은 레스토랑 로비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때 챙이 넓고 근사한 하늘색 모자를 쓴 여자가 그녀를 불렀다.
“바이올렛!”
바이올렛이 고개를 돌려 보니 그녀의 사촌이며 라크라운드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인 아리엘라 로렌스가 서 있었다. 바이올렛이 모처럼의 만남에 반가워하며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아리엘라. 요즘 바쁘지?”
“바쁘지. 넌 한가하지 않아? 수도 좀 자주 놀러 와.”
“앞으로 그럴까 봐.”
바이올렛이 대답했다. 아리엘라가 한숨을 쉬었다.
“부럽다. 나도 너처럼 일찍 결혼해서 꽃꽂이나 하면서 지내고 싶어. 우아하게.”
“그렇구나.”
“맞다. 나 카이슬 경기장에서 자주 윈터 경을 만나는데. 아무래도 나도 어렸을 때부터 돈을 벌었어야 해서 말이 잘 통하더라. 넌…… 그런 야만적인 스포츠는 싫어하지?”
“야만적이라 싫어하는 건 아니야. 낯설어서 즐기지 않는 거지.”
그리고 너는 돈을 벌었어야 했던 게 아니라 자유로운 게 좋다면서 네 발로 뛰쳐나간 거잖아.
바이올렛이 덧붙이고 싶은 말을 그대로 짓눌렀다. 그러자 아리엘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넌 항상 그런 식으로 네가 좋은 사람처럼 보이게 말하려고 애쓰더라. 윈터 경이 답답해할 만해.”
“내가 답답하대?”
“응.”
아리엘라의 대꾸에 바이올렛이 쓸쓸히 웃었다.
남편은 제가 정말로 답답한 모양이었다.
3년 전에는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삼키는 정도는 아니었다. 최소한 너와 남편이 말이 잘 통한다는 얘기를 내가 왜 들어야 하냐고 아리엘라에게 따질 정도는 됐다.
그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과 끝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느라. 그래서 자꾸만 하고 싶은 말을 삼키게 되었던 것뿐.
아리엘라가 섬 한가운데 있는 시계탑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 말했다.
“어머, 예약한 시간 늦겠다. 나 갈게.”
“응. 잘 가.”
바이올렛이 인사하고 도망치듯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마차 앞에 도착한 바이올렛이 룰루에게 물었다.
“룰루, 혹시 아리엘라가 카닉 호텔에 자주 묵나?”
“예?”
룰루가 뒤늦게 무언가를 깨닫고 얼굴을 있는 힘껏 구겼다.
바이올렛의 말대로였다. 아리엘라 로렌스는 윈터가 운영하는 카닉 호텔을 아주 좋아했다. 어느 지역의 공연을 가든 카닉 호텔에 묵었고, 그건 수도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아침, 룰루가 끌고 들어온 드레스를 본 바이올렛은 이렇게 많은 옷은 처음 본다는 듯이 놀랐었다. 그럼 여태 하옐이 사 온 그 많은 드레스는 누구에게 갔단 말인가.
“자주 묵으시긴 하죠…….”
룰루의 시무룩한 대답에 바이올렛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3년, 윈터는 늘 밖으로 나돌았지만 바이올렛은 구멍 뚫린 2,400만 라크네를 갚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했다. 저를 두고 바람을 피우진 않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이다.
바이올렛은 자신 때문에 파산 위기를 겪은 윈터에게 죄책감을 느꼈으므로 그가 제게 아픔을 줄 때에도 내심 남편의 편을 들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자신을 싫어하는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없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도 이상했다.
하기야, 바이올렛은 이제 남편이 누굴 만나든 상관없었다.
그저 이 외로움이 지긋지긋할 뿐이었다.
*
더 이상 수도 구경을 할 힘이 나지 않아 바이올렛은 바로 숙소로 돌아왔다.
객실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은 바이올렛이 물끄러미 밖을 바라보았다.
제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바이올렛은 답답했다.
3년은 그럭저럭 버텼지만 앞으로 똑같은 삶이 이어질 거라면 버틸 이유가 없었다.
해가 지도록 한참 멍하니 있던 바이올렛은 따듯한 커피 냄새에 조금 고개를 들었다. 룰루가 황홀하게 꾸며져 있는 커피를 들고 들어서고 있었다.
“식욕이 없으시면 디저트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
“사는 게 뭐 별건가. 배만 불러도 그럭저럭 살 만해요.”
그녀의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룰루가 따듯한 커피가 담긴 컵을 바이올렛의 손에 들려 주었다.
“안 내켜도 들고 계세요. 해가 지니 쌀쌀하네요.”
“따듯하다…….”
바이올렛이 젖은 눈으로 애써 웃더니 컵을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와, 커피 냄새 맡으니까 정말 기분이 좋아지네.”
“그렇죠?”
“응.”
지금은 일단, 즐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바이올렛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나름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을 실컷 먹어야겠어. 점심은 남동부식의 요리라 나에겐 너무 가벼웠거든.”
“좋은 생각이에요! 저 고집불통인 주방장이 이미 로브스터를 잡아 오게 낚시꾼을 보내서 메인 요리가 정해져 버렸어요. 그럼 쉬시고, 이따가 저녁 시간에 모시러 올게요.”
“고맙네.”
바이올렛이 다정히 인사했다.
그녀는 식욕이 전혀 없었으나 주방장이 그렇게 들떠있다니 저녁 식사를 거를 수가 없었다.
다행히 거르면 억울했을 정도로 저녁 식사는 매우 훌륭했다. 룰루가 기운 차리라며 함께 식탁에 올려 준 미트로프는 이 호텔에 계속 머무르고 싶은 마음을 더욱 부풀리는 맛이었다.
그녀가 너무도 맛있게 식사를 해 투린도, 룰루도 옆에서 제가 만든 요리에 대해 칭찬을 더 듣고 싶어 자꾸 바이올렛의 주변을 맴돌았다.
룰루의 말대로였다.
배만 불러도 그럭저럭 살 만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할 만큼의 힘이 생겼다. 더는 답답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
윈터는 섬에 있는 카닉 호텔 본사 건물에서 밤을 새울 생각이었지만 제 장례식에 대해 말하던 바이올렛이 신경 쓰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일거리를 들고 제 침실이 있는 호텔로 돌아왔다.
“이렇게 사느니 죽을까, 생각해 봤거든요.”
아내의 담담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엄살일 것이다. 엄살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제가 싫은 거야 나라 빚을 갚아야겠다는 고귀하신 의무감 때문에 팔려 오듯 결혼할 때부터였을 것 아닌가. 도대체 아내가 그런 마음을 먹을 이유가 뭐가 있나.
바이올렛은 그냥 던졌을 말에 저 혼자 이렇게 끙끙 앓고 있는 게 한심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윈터.”
바이올렛의 목소리였다. 윈터가 읽히지도 않던 서류를 내려놓고는 서둘러 문으로 걸어갔다. 그가 문을 열고 너무 가까이에 서자 바이올렛이 고개를 들었다. 키 차이가 워낙 많이 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윈터의 얼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이올렛은 그 상태로 한동안 윈터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바이올렛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이혼하고 싶어요. 당신과.”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