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계약서의 내용을 하나하나 따지기 시작한 윈터 덕에 로월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윈터가 이렇게 부드러우며 오만한 눈빛을 하는 건 처음 보았다.
평소처럼 윈터가 테이블을 뒤집으며 결렬되었어야 할 협상이 길어지자 로월이 슬슬 그를 자극할 방법을 찾았다.
“라크라운드의 시가가 유명하다고 들었소.”
로월의 말에 저도 모르게 숨 들이켜는 소리를 낸 하옐이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그의 말대로 라크라운드는 시가가 유명했지만 그걸 즐기는 건 귀족들뿐이었다.
처음엔 귀족들의 대화에 끼기 위해 시가를 배워 볼까, 생각하던 윈터는 곧 고리타분한 수십 가지 예법들에 질려 배우기를 그만두었다. 그 이후 시가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로월이 말했다.
“소개를 해 줬으면 하는데, 어떻소.”
“그러시죠.”
‘그러자고 대답하시면 어떡합니까, 대표님!’
하옐은 튀어나올 뻔한 말을 애써 삼켰다. 저러다 로월이 시가가 어쩌고저쩌고 비꼬기 시작하면 윈터는 분노할 거고, 결국 사업은 로월이 유리한 쪽으로 말려들고 말 것이다.
앞으로 회사의 모든 호텔에 공급할 어마어마한 양의 원두에 관한 계약이었다. 숫자 하나 바뀔 때마다 막대한 수익 차이가 났다.
그사이 윈터가 쪽지에 몇 가지를 적어 검지와 중지에 끼워 하옐에게 건넸다.
하옐은 의미도 모르는 데다 서체까지 낯설어 쪽지를 불필요할 정도로 정독했다. 하옐이 꼼짝을 않자 윈터가 물었다.
“내가 직접 사러 가야 하나?”
“아, 아뇨!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눈치로 이게 시가 이름이란 걸 안 하옐이 다급하게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근처의 전문점으로 가 윈터의 쪽지에 적힌 시가와 도구들을 사 와 앞에 내려놓았다.
윈터는 상자에서 벨리코소 시가를 꺼내 손으로 가볍게 눌렀다.
‘저, 저렇게 눌러 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비싼 건데?’
하옐 역시 시가에 대해 전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시가에 결절이 없는 것을 확인한 윈터가 로월에게 먼저 건넸다.
“왕실에 납품하던 시가입니다. 어떠실지 모르겠군요.”
로월이 얼떨결에 시가를 받아 들었다. 윈터는 제가 피울 시가를 꺼내 헤드를 잘라 내고 불을 붙였다. 신분적 우월감을 느끼며 깔보던 로월조차 그의 교과서적인 태도에 흠을 잡지 못했다.
그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모든 동작을 교육받은 사람 같았다.
로월은 결국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 시가를 내밀며 무리수를 던졌다.
“아랫사람이 불을 좀 붙여 줬으면 좋겠소.”
그 말은 들은 하옐이 재빨리 테이블 근처에서 물러났다. 이번엔 분명히 저 테이블이 뒤집히겠구나,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 윈터는 오히려 이해를 못 했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몸 안에 있는 것은 바이올렛 로렌스였다. 아무리 왕실이 사라지고 지난 3년간 있는 대로 무시당했어도 공주님이란 말에 스트레스받을지언정 ‘아랫사람’이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바이올렛이 대답했다.
“나이는 확실히 제가 어릴 것 같군요.”
“아니, 나이 얘기가 아니라…….”
“그나저나 불붙이기도 어려워하실 정도로 시가에 익숙하지 않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드릴 걸 그랬습니다.”
놀리는 게 아니었다. 바이올렛은 정말로 ‘아랫사람’이란 말을 신분이 아닌 나이 이야기로 알아들었고, 나이 운운해서 불을 붙여 달라고 할 정도로 로월이 시가가 낯설다고 생각해 미안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놀림으로 받아들인 로월의 얼굴은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바이올렛은 그의 얼굴이 벌게진 이유를 착각했지만 아무튼 모르는 척해 주며 말을 이었다.
“여러 가지를 소개해 드리며 회의를 하려면 오래 걸리겠군요.”
그러자 겨우 웃음을 되찾은 하옐이 함박웃음을 지은 채 쪽지에 적어 주며 사 오라고 한 여러 종류의 시가를 로월에게 들어 보였다.
“그렇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이번엔 로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걸 다 피우면 둘 중 하나는 니코틴 과다로 죽을 것이고, 패자는 제가 될 것이란 걸 로월은 본능으로 느꼈다.
*
마흔일곱 시간을 반감금 상태로 있던 로월은 자포자기해 맘대로 하라고 호통을 친 후 침실로 돌아갔고, 바이올렛 역시 회의실에서 나왔다.
테이블 위에는 시가와 내내 들이켰던 술병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윈터의 몸을 막 쓴 것이 매우 미안했지만 아내에게 하루 시간도 내 줄 수 없을 만큼 돈을 좋아하는 그가 계약이 제대로 마무리된 것을 더 기뻐하리라 생각했다.
바이올렛이 로월의 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하옐에게 안겨 주었다. 전부 카닉사(社)에서 바라는 그대로였다.
하옐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미안하지만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마흔일곱 시간 넘게 몸을 혹사시킨 바이올렛은 이미 반쯤 잠든 상태였다. 그녀는 곧장 침실로 들어갔다.
하옐이 따라 들어왔지만 이제는 너무 피곤해서인지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가 커튼을 닫아 주어 방이 다소 어두워지는 순간, 바이올렛은 상당한 성취감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미치는 게 이런 거라면 미친 상태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
윈터 블루밍은 살면서 처음으로 아침에 눈 뜨는 게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제 몸이 아닌 걸 알았다.
“망할, 별 개 같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그는 제가 있는 침실과 목소리만으로 제가 아내의 몸 속에 들어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혀를 한 번 찬 후 상황에 적응했다.
윈터는 빌어먹을 난쟁이 마을에 들어갔다가 한 달 내내 거인 노예로 부려진 적도 있었고, 미친 마법사 여자에게 납치당해 실험 대상이 된 적도 있었다. 이런 건 이상한 일 축에도 못 꼈다. 제가 원한 산 사람이 하나둘이 아닌 마당에.
설렁줄이 망가졌는지 아무리 당겨 대도 하녀 한 명 오지 않았다. 성질 급한 윈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발에 텅 빈 샴페인병과 약병이 닿았다.
언제나 우아한 공주님이신 줄 알았더니 사는 꼴이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일단 사람을 찾아 방문을 열고 나가는데 몸이 달달 떨렸다.
“젠장, 뭐 이딴 몸이 다 있어.”
윈터가 욕설을 퍼부으며 방을 나가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통이 너무 심해서 한 걸음 걷기도 힘들었지만 커피에 대한 집착 하나만으로 기다시피 계단을 내려갔다.
뭐가 어찌 되었든 자신은 계약을 하다 말고 여기 와 있었다. 몸이 어떤 상태이든 당장 제 호텔로 돌아가 바이델린 산맥에서 온 그 망할 좀팽이와 계약을 마쳐야 했다. 아내와 몸이 바뀐 거라면 더러운 꼴이라곤 본 적 없을 공주님께서 무슨 짓을 저질러 놓을지 몰랐다.
어떻게든 몸을 끌고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아래에서 윈터가 이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블루밍 가문의 의사였던 릭먼이 올라왔다.
릭먼이 초기에 서자인 윈터를 하도 무시해 그 역시 사는 내내 릭먼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의사 자격이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게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릭먼! 마침 잘 왔군. 나를 진료해 주게.”
“예? 예…….”
평소 같지 않은 바이올렛의 환대에 릭먼은 당황하면서도 그 뒤를 따라 침실로 들어섰다.
윈터가 이불 위에 풀썩 누워 베개에 기댄 채 명령조로 말했다.
“두통이 심하군. 뭐가 문젠지 빨리 찾아내.”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큰 문제가 없으십니다.”
“뭐가 문제가 없어. 몸 상태가 쓰레기 같은데.”
“쓰, 쓰레기라뇨. 말씀이 너무 심하십니다.”
릭먼이 말하면서도 일단 바이올렛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젯밤 바이올렛이 파티 중간에 인사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이후, 블루밍 공작 부부도, 적자인 디에브도 이 무례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벼르고 있었다. 그러니 오늘은 확실히 몸이 아프다는 확답을 받아 내고 싶은 모양이라 여겼다.
릭먼이 건성으로 진료하는 시늉을 하며 투덜거렸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꾀병을 부리실 겁니까? 아무리 공주님이셔도 이렇게 억지를 부리시는 건…… 자, 작은 마님!”
릭먼의 말이 멈췄다. 윈터가 그의 멱살을 틀어쥐며 으름장을 놓았다.
“내가 지금 몸이 안 좋다고 하잖아. 누가 이런 돌팔이에게 의사 자격을 줘서 내가 이 아침부터 이런 개소리를 듣게 만들까?”
‘만들까?’ 하고 말을 끝낸 것은 바이올렛이라면 아마 그렇게 말했을 것 같다는 윈터의 짐작 때문이었다.
평소 성격 같으면 이대로 바닥에 처박았을 텐데 지금 힘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런 비리비리한 상대도 못 이기는 몸에 치미는 열을 억누른 윈터가 말했다.
“네 급여가 내가 벌어 오는 돈에서 나가는 건 알지?”
“자, 작은 마님이 아니고 작은 주인님께서 주시는 겁니다!”
“아무튼 우리가 부부니까 누가 벌든, 주든 똑같은 거 아냐.”
“그야…….”
“그러니까 잘리고 싶지 않으면 이제부터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 알았어?”
여자에게 멱살을 잡혀 씩씩거리던 릭먼이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자 헝클어진 셔츠 칼라를 바로잡았다.
그사이, 윈터가 따라오라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더니 바이올렛의 침실을 나와 제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침실로 들어가자 평소 윈터가 가장 아끼던 하인인 플립이 바닥을 쓸다가 정중히 인사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작은 마님?”
“어, 너. 내가 지금 당장 수도에…….”
말하던 윈터가 또다시 극악한 두통에 휘청거리자 놀란 플립이 팔을 부축하려고 손을 뻗었다가 쩔쩔매며 다시 손을 치웠다. 윈터가 침대를 붙잡고 서며 말했다.
“커피나 가져와. 아주 뜨거운 걸로.”
“예, 작은 마님…….”
“그리고 안마 좀 해.”
“예, 예?”
플립은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시키는 일이니 커피부터 가지러 침실을 나갔다. 그사이 윈터가 금고를 열자 멀찍이 서 있던 릭먼이 움찔했다.
그는 바이올렛 부부의 저택에 머무는 캐서린 블루밍의 눈과 귀였다. 부부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는 것만 보았던 릭먼의 눈에 바이올렛이 금고를 여는 모습은 경악스러움 그 자체의 일이었다.
윈터에게 돈은 제 목숨과 같았다. 돈이라면 사람을 죽이고도 뿌듯해할 인간이었다. 그런 남자가 제 금고 번호를 아내에게 알려 줬다는 것은 목숨을 맡긴 것과 다름없었다.
바이올렛의 태도가 바뀐 데다가 금고 번호까지 안다는 것은 분명 고려해야 할 문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윈터는 지폐 한 뭉치를 아무렇게나 구겨 릭먼의 주머니에 쑤셔 넣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러더니 눈이 휘둥그레진 릭먼에게 가르친 걸 복습시키듯이 물었다.
“자, 릭먼. 아까 내가 뭐라고 했지?”
“작은 마님께서 원하시는 대답을 하라고 하셨지요!”
“지금 내가 최대한 빨리 수도에 가야 되니까 무슨 짓이든 해. 가는 중에 기절하기라도 하면 내가…… 아니, 내 남편이 네놈 모가지를 끊어 버릴 테니까.”
어차피 제 몸을 되찾자마자 자를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까짓 성질 좀 부렸다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다행히 플립이 커피와 설탕을 가져왔다. 윈터는 커피 잔에 설탕을 쉼 없이 퍼부은 후 단숨에 들이켰다. 그 뒤, 릭먼이 진료를 마친 후 약을 조제하러 떠났다.
잠시 후, 플립이 미온수가 담긴 물그릇을 들고 왔다.
윈터가 침대에 걸터앉아 발을 턱짓하자 조금 당황하던 플립이 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작은 마님의 작고 하얀 발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물속에 담근 후 그 안에서 천천히 마사지를 시작했다.
플립이 거의 손에 힘을 싣지 못하자 윈터가 짜증을 냈다.
“갑자기 여든 노인이라도 된 건가?”
“예? 아…… 더, 더 세게 하면 아프실 겁니다.”
“무슨 개소…….”
리를 하냐며 물그릇을 걷어차려던 윈터의 시선이 천천히 플립의 손으로 향했다.
장면이 매우 이상했다. 플립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고, 힘을 주면 다칠까 싶어 발을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 쩔쩔매고 있었다. 물론 지금 몸속에 있는 건 자신이었지만, 플립은 그렇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윈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 다신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
“가, 감사합니다!”
플립은 지금껏 윈터가 본 적 없는 큰 소리를 내 대답하며 곧장 물그릇을 들고 침실에서 도망쳐 버렸다.
혀를 차며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헝클던 윈터가 잠시 손을 멈췄다. 그리고 거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이올렛의 머리칼이 어깨 높이까지 짧아진 것을 확인했다. 한동안 거울을 바라보던 윈터가 중얼거렸다.
“……늦게도 잘랐네.”
그는 작년 겨울, 바이올렛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