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3화 (3/176)

3화

약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생각보다 고통이 없었다.

바이올렛이 다시 눈을 뜬 곳은 온몸이 녹아내리도록 푹신한 침대 위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흘러 들어와 커튼을 스치고 그녀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죽음 이후가 이렇게 평화로울 줄 알았다면 3년 전에 죽을걸. 태어나서 이렇게 상쾌함을 느껴 본 건 처음이었다. 내내 달고 살았던 두통이 태어나서 처음 완벽히 사라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언제나 몸을 누르던 피로도 사라졌다.

“행복해…….”

스르륵 감기던 바이올렛의 눈이 제 목소리에 다시 번쩍 뜨였다. 그녀가 상체를 일으켰다. 바이올렛이 제 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곧 다시 제 두 손을 눈으로 확인했다.

목도, 손도 제 것이 아니었다. 제가 결혼식 때 유일하게 한 번 잡아 보았던 남편의 커다란 손이었고, 그의 낮고 사나운 목소리였다. 바이올렛이 막노동과 스포츠로 다져진 건강한 몸을 더듬어 보다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바이올렛은 바닥에 내려서 보고는 단단한 다리 근육이 주는 느낌에 또 한 번 놀랐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녀가 멍한 얼굴로 침실에 있는 전신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거울 속 사내는 분명 윈터 블루밍이었다. 190cm가 넘는 키에 어깨가 딱 벌어진 위협적인 신체 조건과 야만적이지만 근사한 외모를 가진 사내. 약간의 곱슬기가 있는 새카만 머리칼과 회색 눈동자를 가진 윈터 블루밍.

“이제 진짜로 미쳐 버렸나 봐.”

바이올렛이 혼잣말을 하는 사이,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윈터의 비서인 하옐이 들어섰다.

“대표님! 로월 그놈은 벌써 다 준비하고 나왔답니다! 빨리 준비하세요!”

하옐의 한 손에는 커피, 다른 한 손에는 정장 한 벌이 들려 있었다. 이미 반듯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블루밍 가문에서 봤을 때와 달리 완전히 예의를 생략하고 있었다.

하옐이 하얀 셔츠와 정장 바지를 침대 위에 늘어놓았다.

“이거 입으시면 되고요. 제발 부탁이니 오늘은 넥타이 좀 해 주세요. 공적인 자리잖아요.”

“네…… 아, 아니. 알겠네.”

바이올렛의 공손한 대답에 하옐이 인상을 썼다. 그러나 금방 이유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늘 회의에서 쓸 예의 바른 말투 연습하신 거군요. 하긴, 어제 너무 욱하셨죠.”

그의 말에 바이올렛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왜 연습하지?”

“왜라뇨, 대표님은 예의범절에 있어선 꽝이시잖아요.”

“내가?”

“말이라고 하세요? 안 그래도 늦잠 주무셨는데 이러실 시간도 없어요! 빨리 옷 갈아입으세요!”

바이올렛이 놀라서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로 달려갔다.

잠시 후, 하녀 하나가 테이블에 아직도 부글부글 끓는 듯 뜨거운 커피를 놔 주었다. 하옐이 스푼으로 설탕을 듬뿍듬뿍 떠서 커피에 들이부으며 말했다.

“바이델린 산맥의 원두에 관한 건 말인데요, 로월 쪽에서 그램당 가격을 30라운드(10000라운드는 1라크네가 된다.) 씩 올려 달라고 하더라고요. 미친 새끼 아닙니까?”

“하옐. 옷 갈아입게 좀 나가 주겠나?”

그 말에 하옐이 눈이 둥그레져서 물었다.

“아침부터 진짜 왜 이러세요?”

물론 남들이 늘 옷을 갈아입혀 주긴 하지만 남자는 남자가, 여자는 여자가 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했다.

바이올렛은 하옐의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게 너무 불편해 그에게 부탁했다.

“오늘따라 좀 기분이 그래. 돌아서라도 있어 주면 고맙겠군.”

“갑자기 말투는 또 왜 이렇게 우아하시고……. 커피는 왜 안 드세요?”

하옐이 의아함을 느끼며 몸을 돌리고 브리핑을 시작했다.

바이올렛은 우선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가 하마터면 그대로 뱉어 버릴 뻔했다. 지독히 진한 데다 설탕을 쏟아부어 혀가 아프게 달았다. 게다가 뜨겁기는 또 왜 이리 뜨거운지 마치 안에 불에 데운 돌이라도 넣어 둔 것 같았다.

그녀는 한 모금 이상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 커피 마시는 것을 포기한 바이올렛은 한참을 쩔쩔매 가며 하얀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차려입고, 회색 넥타이를 목에 둘렀다. 그리고 난처하게 하옐을 보았다.

“하옐, 미안한데…….”

“또 숙취예요? 회의 못 갈 것 같으세요?”

윈터가 사과할 때는 숙취일 때뿐인 모양이다. 바이올렛이 넥타이를 들어 보였다.

“좀 매 주게.”

“지금 저 벌주시는 거죠? 뭘 잘못한 건진 모르겠지만 차라리 평소처럼 욕을 하세요.”

하옐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걸어와 능숙하게 넥타이를 매 주었다. 외간 남자가 가까운 게 어색해 고개를 돌리고 있던 바이올렛은 하옐이 손을 떼자 갈색의 구두를 챙겨 신었다.

“그래서…… 바로 미팅?”

“예. 대표님, 이번엔 그 자식이 속 박박 긁어도 절대 화내고 테이블 뒤집으시면 안 돼요.”

평소엔 욕하고 테이블 뒤집는 모양이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흘릴 냉혈한으로만 생각했던 남편에 대한 이미지가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제가 미친 거라면 이것도 다 망상이겠지만.

“자자, 다 되셨으면 일단 가시죠!”

하옐이 바이올렛의 등을 떠밀었다. 바이올렛은 하옐이 떠미는 힘에 조금도 밀려나지 않는 윈터의 단단한 몸에 놀라워하며 걸음을 옮겼다.

*

적응할 틈도 없이 바이올렛은 윈터가 마무리 짓지 못한 계약서 앞에 앉았다.

서류로 뒤덮인 테이블 앞에 앉은 바이올렛은 윈터가 늘 뒤로 기대앉아 있는 이유가 건방 떨기 위한 게 아니란 것을 알았다. 그녀에게 맞춰진 높이의 테이블은 분명 윈터에게 터무니없이 낮았을 것이다.

‘어쩌지…….’

바이올렛은 거의 제가 정신에 이상이 생겨 망상 중이라는 가정을 확신했지만, 그렇다고 닥쳐 있는 계약을 허투루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미쳐서도 편할 수 없는 제 성격을 탓하며 서류를 확인했다.

바이올렛이 한참 서류를 보고 있으니 맞은편에 앉은 바이델린 산맥의 일족, 로월이 입을 열었다.

“어제는 그렇게 버럭버럭 소리치시더니, 오늘은 조용하십니다?”

“어제는 제가 무례했습니다. 사과드리죠.”

브리핑을 듣자 하니 로월은 어마어마한 선민사상에 휩싸여 있는 영주였고, 그만큼 예의범절을 중시 여기는 모양이었다.

바이올렛이 평소보다도 예의에 신경 쓰는 게 거슬렸는지 그가 다시 비난조로 말했다.

“무슨 수작이신지 모르겠군요. 어제는 난폭하셨으니 오늘은 부드럽게 나오시는 작전으로 가시는 겝니까?”

“그렇다기보다는…….”

“여기 이 숫자들 전부.”

로월이 계약서에 적혀 있는 숫자를 전부 30씩 올렸다.

“이 가격에 사 주시지 않으면 못 팝니다, 바이델린 원두.”

바이델린 커피는 최고급 커피로 유명했다. 바이올렛도 왕성에서 종종 마셔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여태 이 커피 원두가 이렇게까지 비싼지 모르고 있었다. 이런 협상 테이블 앞에 앉아 본 적 없던 바이올렛이 난처해하며 말했다.

“이미 계약서에 적혀 있기도 하고…… 30라운드씩 올리시면 저희 쪽 부담이 너무 많이 커집니다.”

그 조심스러움에 로월이 짜증스레 대꾸했다.

“엄살떨지 마시지요. 경께서 운영하시는 호텔 체인이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부담이 크다는 말만큼은 변명으로 들립니다만.”

남편은 결혼 이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알거지가 되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는 재산이 회복된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있는 거야. 미쳐서.’

바이올렛은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윈터에게 커다란 죄책감이 있었다. 그래서 윈터가 밖에서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냈어도 집으로 돌아올 땐 기쁘다는 듯이 그를 반겨 주곤 했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사이, 로월이 말을 이었다.

“이렇게 팔아서는 바이델린 아이들 앞으로 제대로 돈이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아이들이 일을 하나요?”

“물론이죠.”

세상에, 아이들이 일을 하다니!

아이들의 노동에 대한 값을 챙겨 줘야 한다고 생각한 바이올렛이 서류를 살피다가 도장을 찾아 들며 대답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그녀가 도장을 찍을 기미를 보이자 기겁한 하옐이 달려와 팔을 잡았다.

“어, 어휴. 어제 술을 너무 드셔서 아직 술이 덜 깨셨군요!”

하옐이 그리 말하며 그녀를 붙잡아 낑낑거리고 일으켰다.

바이올렛이 눈치껏 따라 잠시 미팅 장소를 나서자 하옐이 목소리를 낮춰 따졌다.

“정말 술 덜 깨셨어요? 왜 이러세요!”

“아, 아이들이 일을 한다기에…….”

“대표님께서 어릴 때 하인으로 부려진 걸 건드리려는 거잖아요, 딱 봐도. 그리고 대표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설령 아동의 노동력을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 아동에게 돌아가는 돈은 없고 결국 로월의 주머니로……. 아니, 이렇게 당연한 걸 왜 설명드려야 해요, 갑자기? 술을 얼마나 드신 거예요?”

하옐은 제 상사가 무르게 구는 이유는 아직 취한 상태이기 때문일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던 바이올렛이 되물었다.

“그럼 평소의 나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술이…… 덜 깨지 않은 나였다면.”

“이상한 술주정을 부리시네요……. 아무래도 30라운드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에 테이블을 뒤집으셨겠죠. 그리고 제가 말리고, 그 다음에 다시 미팅을 잡으셨겠죠?”

“…….”

평소의 윈터처럼 굴려면 테이블을 뒤집어엎어야 되는구나……. 그나저나 대리석으로 만든 것 같은데 저게 사람 힘으로 뒤집어지나?

바이올렛은 고민하다가 걸어가 테이블을 손으로 잡아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테이블이 들렸다.

바이올렛이 윈터의 팔 힘에 경악하며 동시에 로월을 보니 그는 겁을 먹고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던 바이올렛이 테이블이 기울어진 탓에 흩어져 바닥에 떨어진 서류들을 주워 모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펜으로 로월이 쓴 숫자들 위를 죽죽 그었다.

“다시 협상하시죠. 처음부터.”

바이올렛의 말에 로월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대화로 합시다. 협상이 끝날 때까지, 둘 다 만족할 때까지 앉아서 이야기해요.”

겁을 주고 테이블을 뒤집어엎는 것은 윈터 블루밍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여기 앉아 있는 것은 바이올렛 로렌스였고, 그녀가 가장 잘하는 것은 한자리에서 버티는 것이었다. 유령처럼 서서 날아오는 돌을 피하지 못하면서도 파티를 버티는 게 그녀의 일과였다.

바이올렛이 모은 서류를 테이블 위에 주르륵 펼쳤다.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다고 글자가 달라지는 건 아니오.”

“반복해서 읽을 겁니다. 답이 나오거나, 둘 중 하나가 지쳐서 멈출 때까지.”

꿈이든 정신병이든 상관없었다. 바이올렛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이 계약에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