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2화 (2/176)
  • 2화

    바이올렛은 남편과의 대화를 위하여 그의 드레스 룸 앞에 서 있었다.

    “작은 마님, 침실로 돌아가셔요!”

    하녀들이 그녀를 붙잡고 말렸지만 바이올렛은 단단히 마음먹었는지 문 앞에 버티고 서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먼저 비서인 하옐이 보였다. 그 뒤로 머리를 포마드로 매만진 윈터 블루밍이 보였다.

    그는 옅은 푸른색이 감도는 셔츠에 제 눈동자 색과 같은 회색 베스트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바이올렛은 그에 비해 차림새가 수수했으나 격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맨발이었고, 눈동자 속에는 광증 같아 보이는 푸른 불꽃이 일렁거렸다.

    윈터가 그녀를 바라보자 바이올렛이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가지 말아요. 이번 출장만…… 취소할 수 없다면 하루만 늦게 가요.”

    “이번엔 일주일이면 돌아와.”

    “하루 정도는 미뤄도 되잖아요. 오늘 저녁에 어머님이 여시는 파티만 같이 가 줘요.”

    “그냥 아프다고 하고 쉬어.”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으면 당신에게 말하러 오지도 않았어요.”

    “바이올렛.”

    윈터가 지금 얼마나 제 성격을 누르고 있는지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있는 열 명의 고용인들 모두 알았다. 다들 제 아내나 남편이 바이올렛처럼 미쳐 버린다면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윈터가 짜증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여기서 고집부리며 내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돈이 움직였는지 알아? 당신이 날 때부터 가진 그 신분을 사겠다고 2,400만 라크네를 지불했어. 그런데 내가 산 그 신분이 사라졌잖아.”

    “그건 알지만…….”

    “알면 하나를 골라야지. 돈을 갚든지, 공주님께서 내가 사려고 했던 작위를 하사하시든지. 둘 다 아닐 거면 얌전히나 있든지.”

    “…….”

    윈터는 아내가 대답을 못 하고 있으니 이쯤 하면 될 줄 알고 바이올렛의 손을 잡아뗐다. 그러나 그녀가 고집스레 다시 윈터의 양 손목을 잡아 쥐었다. 그녀는 그만큼 절실했다.

    “하루 늦는다고 크게 변하는 것도 없잖아요. 이번 한 번만…….”

    그녀가 물러나지 않자 이제는 하녀들이 나서려 했다. 그러나 윈터가 특별히 지시하는 것이 없어 곧 다시 뒤로 물러섰다.

    윈터를 올려다보며 애원하던 바이올렛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길거리에서 행패 부리는 취객을 본 듯한 눈빛이었다.

    바이올렛은 그의 눈빛으로 남편이 제 뜻을 들어주지 않을 것을 깨닫고 서서히 손을 뗐다.

    윈터는 혀를 한 번 차고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 뒤를 따라 그에게 딸린 사용인들도 그곳을 나섰다.

    바이올렛은 허무한 얼굴로 자리에 서 있다가 제 방으로 돌아갔다.

    창문 밖으로 윈터가 탄 마차가 출발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바쁜 남자가 제 장례식이라고 와 줄까, 하고 그녀는 한동안 생각했다.

    *

    바이올렛의 부름에 마지못해 나타난 의사 릭먼은 그녀의 진료를 마친 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 이상도 없으십니다, 작은 마님. 병이 있다면 아마 마음의 병이겠죠.”

    “실제로도 몸이 아프다고 하지 않나. 두통이 너무…….”

    바이올렛이 변명하듯 말하는데 릭먼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무래도 공주님으로 자라셨으니 조금만 아프셔도 걱정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작은 마님께서는 조금도 아프지 않으십니다. 자꾸 이렇게 꾀병을 부리시면 저도 마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꾀병이 아니야. 정말로 두통이 너무 심해 일어나지도 못하겠다는데도.”

    “어휴, 정말. 거짓말 그만하시고 일어나십시오, 작은 마님. 그것도 다 습관이 되는 겁니다.”

    릭먼이 타박하고 모자를 다시 쓴 후 그녀의 방을 나갔다. 꾀병이라는 말이 우스웠는지 옆에 서서 시중을 들던 하녀들이 웃음을 참는 것이 보였다.

    의사가 그렇다고 하니 바이올렛은 별수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하녀들이 티타임용 드레스로 갈아입혔다. 화장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기분 전환을 하고 싶으니 머리를 어깨까지 잘라 주렴.”

    “네, 작은 마님.”

    그제야 시큰둥하던 하녀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의 긴 머리칼을 관리해 주는 게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녀들이 어깨 높이까지 자른 단발을 빗질한 후 다이아몬드가 박힌 헤어밴드로 머리를 빙 두르고 꽃을 장식했다.

    단장을 마친 후에도 바이올렛은 마치 지옥으로 끌려가는 듯한 마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영지가 워낙 넓어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시부모가 지내는 저택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려 보니 파티 시작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사람들이 미리부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들은 워호슨이라고 불리는 라크라운드 남부 지역의 내로라하는 귀족들이었다. 그 중심에는 블루밍 가문이 있었다. 바이올렛을 발견한 시어머니 캐서린 블루밍이 그녀를 불렀다.

    “바이올렛, 이리로 오렴.”

    바이올렛이 다가가자 캐서린이 다정히 물었다.

    “몸이 안 좋아서 늦은 거니? 좀 나아졌고?”

    “네, 어머님.”

    바이올렛이 시선을 돌려 앉을 자리를 찾았지만 테이블은 꽉 차 있었다.

    일찍 왔어도 그녀의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저열한 괴롭힘이었다. 캐서린이 말을 이었다.

    “요 몇 달 계속 아프다고 하니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의사가 뭐라고 하니?”

    “아, 저…….”

    바이올렛이 대답을 망설이자 캐서린이 걱정스레 말했다.

    “윈터에게 좋은 약을 구해 달라고 하렴. 그 애는 온 대륙을 돌아다니니 무엇이든 구할 수 있잖아.”

    바이올렛이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저택 안에서 나온 릭먼이 지나가며 반갑다는 듯 말했다.

    “작은 마님! 나오셨군요! 거보세요, 제가 꾀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 정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다.

    그 비웃음에 바이올렛의 몸이 오한 든 것처럼 떨렸다. 이제는 이렇게 당하는 것이 낯설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매 순간 당하는 모욕은 여전한 고통이었다.

    함께 웃음이 터졌던 캐서린이 릭먼에게 말했다.

    “공주님이잖나, 릭먼. 작은 아픔도 크게 느끼시는 게 당연한 일이지.”

    그녀의 말에 테이블의 한 청년이 투덜거렸다.

    “왕실이 해체된 지가 3년입니다. 게다가 남편에게 그렇게 큰 피해를 입혀 놓고도 남이 공주님 대우를 해 주길 바라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자 옆에서 다른 부인이 맞장구쳤다.

    “맞아요. 블루밍 가문 입장에서는 완전히 사기당한 것 아닌가요? 캐서린 부인께서도 너무 무르세요.”

    3년째 이런 상황의 연속이었다.

    빚도 갚고 왕위도 내놓은 에쉬는 다시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피해를 보상하라던 국민들의 목소리도 대부분 사라졌다.

    가장 피해를 본 것은 누가 봐도 윈터였다. 그는 가진 것을 대부분 처분해 2,400만 라크네를 만들었고, 나머지 돈은 그가 블루밍 가문에 자리 잡는 데 이용했기 때문에 알거지나 다름없었다.

    윈터는 결혼한 바로 그날부터 다시 사업을 불리기 위해 수도에 숙소를 마련하고, 블루밍 가문에는 몇 달에 한 번 정도만 얼굴을 비쳤다.

    블루밍가에 남겨진 바이올렛은 독에 빠진 생명처럼 차근차근 녹아 사라져 갔다.

    처음에는 이런 행사에 끼어들어 보기도 하고, 웃으며 먼저 말을 걸어 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언제나 염치없는 사기꾼 취급이었다.

    저녁이 되어 파티가 시작되고 연회장은 화려하게 꾸민, 놀기 좋아하는 귀족들로 가득 찼다. 밤까지 이어지는 파티 내내 바이올렛은 벽에 기대서서 이 힘겨운 하루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또 저러고 있네…….”

    “부인께서 신경 써서 데려와 줬는데 파티 분위기를 완전히 망치고 있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 내내 벽에 기대 있던 바이올렛이 걸음을 옮겼다.

    “왜 저렇게 돌아다니는 거람? 거슬리게.”

    바이올렛이 다시 걸음을 멈췄다.

    남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도 뭐 하나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망칠 곳이 없는 그녀는 모두의 의견을 수용하기 위해 제 자신을 조금씩 잘라 내고 있었다.

    그녀의 존재가 파티를 망친다고는 하지만, 한때는 행복에 겨웠을 공주님의 추락이 언제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언제나 파티의 흥을 돋웠다.

    잠시 열을 식히기 위해 연회장을 나온 바이올렛은 날아오는 타인의 말들이 작은 돌이라도 되는 것처럼 온몸이 아파 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언제 나타났는지 윈터의 남동생이며 블루밍 가문의 유일한 적자인 디에브가 그녀를 부축했다.

    “바이올렛!”

    그가 팔을 붙잡자마자 바이올렛이 곧바로 팔을 빼냈다. 디에브가 알았다는 듯 손을 떼어 보이더니 그녀의 짧아진 머리칼을 턱짓했다.

    “그것도 잘 어울리네요.”

    “가까이 오지 마시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모두의 눈치를 보던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단호했다. 그러나 디에브는 못 들은 척 제 할 말을 했다.

    “그렇게 드레스 차림만으로 돌아다닐 날씨가 아닙니다. 아직 춥잖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바이올렛이 창백한 얼굴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러나 곧 디에브에게 팔이 붙잡혔고, 이어 목에 그의 머플러가 감겼다.

    “똑똑하게 생각해요. 어차피 형은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잖아요.”

    “…….”

    “술 한 잔만 해요. 그럼 난 당신 편이 될 테니까.”

    누구나 신사라고 믿는 블루밍 가문의 후계자 디에브 블루밍이 알고 보면 형수에게 집적거리는 호색한이란 걸 도대체 누가 믿어 줄까.

    이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바이올렛은 정말로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방에 갇힐지도 모른다. 세상에 제 편은 없지만 디에브의 편은 많을 테니까.

    “그런 일은 영원히 없을 거예요.”

    바이올렛의 말에 디에브가 픽 웃으며 그녀를 놓았다.

    “후회할 겁니다.”

    그가 놓아주자마자 바이올렛은 정신없이 마차로 달려갔다. 마차에 올라탄 그녀는 숨을 가다듬었고, 뒤늦게 허겁지겁 머플러를 풀었다.

    그리고 넋이 나간 얼굴로 저택을 돌아보았다.

    “돌아가야 하는데…….”

    중간에 사라졌다가 블루밍 부부에게 호되게 혼났던 경험이 있는 바이올렛이 마차에서 내리려 문을 손으로 쥐었다. 그러나 내릴 수가 없었다. 다시 저곳으로 돌아가면 제 몸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았다.

    결국 바이올렛은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제 침실에 들어섰다.

    그녀는 머리에 쓰고 있던 화려한 다이아몬드 장식을 침대에 던져 놓고 비어 있는 보석함에서 제가 꾸준히 모아 둔 수면제를 꺼내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뒤 벽장 속 샴페인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여겨 한 움큼의 약을 더 삼키고 다시 샴페인을 들이켜 목구멍으로 쑤셔 넣었다.

    릭먼이 제조해 준 수면제는 약효가 아주 강했다. 고작 바이올렛이 먹는 것에 좋은 재료를 썼을 리 없었다. 원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 죽을지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파티에 돌아가는 것도 싫고, 중간에 사라졌다는 이유로 화풀이 대상이 되기도 싫었으니까. 차라리 이대로 제 삶을 끝내는 것이 나았다.

    약통도, 샴페인병도 비운 바이올렛이 침대에 풀썩 누웠다. 그리고 눈앞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안녕.”

    마지막 인사를 건넬 상대가 아무도 없는 게 조금 서러웠다.

    당신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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