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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218화 (외전 완결) (217/218)
  • 외전 10화. 잘 살겠습니다.

    화창한 하늘 아래, 달콤한 아이의 웃음소리와 어눌한 말투가 울려 퍼졌다.

    “이고???”

    “그래, 그건 꽃이라고 한단다.”

    “이고? 꼬!?”

    “그래 맞아, 꽃이라고 하는 식물이란다.”

    고사리만큼 작고 오동통한 손가락이 아름답게 피어난 하얀 들꽃을 가리켰다.

    그 작은 손가락에 반응하는 사내는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무척이나 수려한 사내였고 보석마냥 빛나는 금빛 눈동자를 곱게 휘어 웃고 있었다.

    사내의 이름은 이엔 도베로만.

    제국의 두 번째 검이라 칭해지는 리사의 남편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내의 앞에 있는 이제 막 스스로 걷기 시작한 아기는 바로 베리트 도베로만이었다.

    이엔과 리사의 하나뿐인 딸 베리트는 이엔과 꼭 닮은 검은 머리카락과 이엔과 똑 닮은 금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목구비만큼은 리사를 닮아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이고!!”

    “이건 잔디라고 해. 우리 베리트가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게 해준단다.”

    “디!”

    “그래, 잔디.”

    얼마나 유창하게 말을 하려고 하는지 발 돋음을 하듯 낭창하는 언어가 정확하게 그지없었다.

    그 귀여운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이엔은 부드럽게 웃으며 베르트의 손을 꾹 잡아주었다.

    넘어질까 무섭고 바람에 날아갈까 무서운 하루하루지만 그 무서움보다도 사랑스러움이 먼저인지라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베리트, 예쁜 우리 딸.”

    “파!! 파!!”

    “그래, 아빠란다.”

    “마마!!”

    “엄마도 보고 싶구나. 우리 아가.”

    다정한 금색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너무도 사랑하는 이가 떠오른 탓이었다.

    “엄마는 오늘 늦는다고 하더구나. 조금만 더 기다리자.”

    “우마!! 무마!”

    “그래, 엄마.”

    “파파!!!”

    “그래그래, 아빠는 여기 있네.”

    자신을 부르는 옥구슬 같은 고운 목소리에 이엔의 눈이 저절로 휘어졌다.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서 빨리 리사가 돌아와 우리들의 작은 아기의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했다.

    벌써부터 너무도 그녀가 보고 싶었다.

    *

    리사는 거대한 언덕을 오르고 또 오르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가운데서 그녀의 굳은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입담은 여전히 거칠었고 말이다.

    “아 씨ㅂ... 부부부 아 말 예쁘게 하라고 했는데...”

    그녀는 재빨리 꺼낸 말을 끊어내며 제 입술을 거칠게 닦아냈다.

    “약속 좀 제대로 지키자 리사 도베로만. 에이씨 진짜!!”

    한참 투덜거린 그녀는 이내 제 머리에 조금씩 쌓여가는 눈을 털어낸 후 북쪽을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무도 대동하지 않은 채 걸어 나가는 그녀의 걸음은 언제나 그랬듯이 강인해보였다.

    저벅 저벅

    환한 해가 조금씩 저물어갈 채비를 할 무렵 리사의 걸음이 멈췄다.

    폐허가 되어버린 돌조각들과 성의 파편이 그녀의 발치에 굴러다녔다.

    “후....”

    참담한 잔해들의 정체는 바로 북쪽 중립구역에 존재하던 마법사들의 탑.

    바로 마탑이었다.

    리사는 그 잔혹한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잔해들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섰고 이내 공터를 가득 채울 만큼 수많은 묘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리사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X같은 놈들....”

    그러다 황급히 제 입술을 거칠게 쓸었다.

    “아 맞다! 예쁜 말!!!!”

    이엔과 나누었던 힘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던 리사는 수많은 묘비들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며 기도를 올렸고 이내 부드럽게 발을 옮겨 걸어 나갔다.

    길게 줄을 이은 묘비 가운데에 도착한 그녀는 두 묘비 앞에 떨썩 무릎을 꿇었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또 한 번 기도를 올렸다.

    리사의 푸른 눈이 은색의 속눈썹에 가려졌다가 이내 다시 제 빛을 잘하며 떠졌고 입술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작은 조약돌과 바위조각들로 만들어진 묘비는 누군가의 온 정성이 쏟아진 듯 섬세하게 그지없었다.

    리사의 눈이 그 묘비를 올곧게 담으며 이내 다정히 웃음을 피웠다.

    “처음 뵙지요. 리사 도베로만 이라고 합니다.”

    부드럽게 부는 차가운 바람이 리사의 환한 은발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이엔과 백년가약을 맺은 사람... 아니, 아내라고 해요.”

    리사는 그 말을 끝으로 묵묵히 묘비를 바라보며 침묵하다가 이내 제 손에 있던 가방 속에서 와인병을 꺼내었다.

    “제일 좋은 와인으로 달라고 하기는 했는데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네요. 드셔보세요.”

    빈 잔 두개를 이어 꺼낸 리사는 각 묘비 앞에 와인을 따라 건네준 후 이내 제 무릎 위에 두 손을 얹었다.

    그녀의 고운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이내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너무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더 늦게 오기 싫어서 지금이라도 이렇게 무작정 찾아왔어요.”

    차가운 겨울의 냄새와 함께 냉기가 그녀를 훑고 지나갔다.

    “녀석이랑 같이 찾아오려고 했지만... 역시 그 녀석은 못 데려왔어요.”

    “.......”

    “아직도 그 바보같이 착해빠진 녀석한테는 많이 아픈 공간이니까요.”

    그녀의 푸른 눈에 씁쓸한 감정이 담겼다.

    그녀의 앞에 있는 두 묘비는 예전, 황성과 마탑의 전쟁이 끝난 이후 겨우겨우 발견한 이엔의 부모의 흔적이 묻힌 묘비였다.

    처음 발견한 것은 찢겨진 옷자락 하나였고 두 번째로 발견한 것은 온전치 못한 신체의 일부였다.

    누가 누구의 것인지 워낙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시신이 많아서 발견한 조각들은 모두 불태웠다.

    이엔은 그 찢어진 옷자락을 들고 한참을 서 있다가 이내 그들의 묘비를 만들어 흙을 덮고 또 덮었다.

    그 흔들리는 어깨와 굳은 침묵이 얼마나 서글퍼보였는지... 리사는 그 상황을 절대로 말로 표현을 다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정말 최대한 빨리 함께 오겠습니다.”

    리사는 다정히 웃음을 짓다가 이내 더욱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 딸도 낳았습니다. 이엔을 많이 닮아서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검은 색의 머리카락에 그 금색 눈동자까지 아주 붕어빵입니다.”

    리사는 제 턱을 쓸며 흐뭇한 미소를 마구 발산했다.

    “요즘은 또 말을 시작해서...‘엄마’라던가 ‘아빠’라던가 저희들을 열심히 부르고 발음하더라고요. 이정도면 천재 아닐까요?”

    털털하게 웃음을 지은 리사가 이내 제 뒷머리를 마구 쓸어버리다가 이내 나직이 말했다.

    “잘 살고 있습니다.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

    “제가 그 녀석을 엄청 사랑하고 있거든요. 아 당연히 이엔도 절 그만큼 사랑하지만요.”

    “.....”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리사의 두 눈이 굳은 결심을 담았다.

    그녀의 생기가 넘치는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잘 살겠습니다.”

    “....”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그 말을 끝마치고도 리사는 후련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묵묵히 묘비를 바라보며 시려져가는 제 손과 발을 무시하고 무시했다.

    아무리 눈에 담고 생각해봐도 현실이 참으로 가슴 아팠다.

    리사는 천천히 제 손을 뻗어 묘비에 듬성듬성 자라난 잡초들을 뽑아 정돈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눈이 조금 쌓여져 있어서 잡초를 뽑는 손이 조금씩 시려왔다.

    “......”

    스르륵

    묘비를 덮은 눈을 치우자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아주 작은 들꽃이었다.

    차가운 계절의 영향에도 꿋꿋이 꽃을 피워낸 들꽃을 발견하자 리사의 눈에 작게 눈물이 고였다.

    “하....”

    잡혀간 아들의 걱정으로 편하게 떠나지 못했을 제 시어머니와 시아버지가 가슴 아팠다.

    그런 그들의 찢겨진 옷자락 하나를 찾아 두 손에 그러쥐며 눈물도 흘리지 못했던 그때의 제 남편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이 묘비에 그들을 묻어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묘비를 만들었을까.

    네 손에 쥐여진 그 옷자락이 너에게 얼마나 깊은 생각을 안겨줬을까.

    리사는 천천히 제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내며 이내 환히 웃으며 말했다.

    “다음엔 함께 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

    “베리트도 이엔도 함께요.”

    “....”

    “이엔을 낳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님, 아버님.”

    차가운 겨울의 바람 속에서 작은 온기가 불어왔다.

    누군가 어루만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며 리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편과 하나뿐인 제 딸을 향해 돌아갈 시간이었다.

    *

    “마마!!”

    “엄마라면 곧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베리트의 앙증맞은 손을 잡아주며 이엔이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자 그의 앞으로 작은 마력이 응축되어 나타났다.

    로레인의 마력을 흩뿌리며 등장한 것은 바로 리사 도베로만.

    이엔의 하나뿐인 아내였다.

    이엔의 표정이 저절로 환하게 변했다.

    “여보!”

    이제는 익숙해진 호칭도 함께 외치면서 말이다.

    이엔의 부름에 만족스런 미소를 입가에 담은 리사가 두 팔을 벌려 말했다.

    “이리와!”

    “하하하! 일찍 왔네요.”

    자연스럽게 리사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온 이엔은 베리트를 안지 않은 반대 손으로 그녀의 허리에 제 팔을 휘어 감았다.

    그리곤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춘 후 말했다.

    “베리트가 당신을 많이 찾았어요. 보고 싶다고 얼마나 이야기하던지...”

    “그랬어 우리 딸?? 엄마 여기 있지!”

    “마마!”

    “그래 그래, 우쭈쭈!”

    반가운 엄마의 등장에 베리트가 환히 웃음을 지었다.

    리사는 잔뜩 붉어진 볼로 그런 베리트와 얼굴을 부비며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아 살맛난다! 이래서 퇴근은 행복이라고?”

    “저도 기뻐요. 밥은 드셨나요?”

    “아직. 너도 또 안 먹고 기다렸지?”

    “함께 먹고 싶어서요. 같이 먹어요.”

    “하여간....”

    탓하는 말투 치고는 쏘아대는 눈빛이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리사는 투덜투덜 잔소리를 흘려보내며 이엔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고 이엔은 사랑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런 리사의 손에 깍지를 꼈다.

    그 귀여운 행동을 피식 웃으며 바라본 리사가 이내 다정히 말했다.

    “잘 살자.”

    “네?”

    “지금처럼 사랑하면서 잘 살자고.”

    “....? 당연하죠.”

    리사의 뜬금없는 말에도 이엔의 대답은 착실했다.

    그 확고한 대답이 마음에 들어 리사는 그저 웃음을 지었다.

    사랑했다.

    서로를 여전히, 서로가 많이도.

    {외전 완결}

    By.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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