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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208화 (207/218)

208화.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촤락!

하얀 종이가 탁상에 펼쳐졌다.

한 남자의 굵은 손가락이 펜을 쥐었고 곧이어 종이 위로 펜이 부드럽게 선율을 그리듯 움직였다.

사각 사각

조용한 방에 펜과 종이의 소음만이 잔잔히 울렸다.

부드러운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이 하나의 음악처럼 아름답게 움직여졌다.

편지를 쓰는 남자의 눈이 애틋하게 휘어져있었다.

[잘 지내시오. 그곳의 하늘은 어떻소.

이곳처럼 맑은 지, 아니면 흐린지 궁금하오.]

편지를 쓰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잔잔히 펴졌다.

사랑하는 이의 모습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내가 이리 편지를 쓰니 놀랐을 것이라 생각이 드는군... 실은 나도 조금 우습기도 하오.

세린 이 외에는 한 번 도 써본 적이 없던 편지라서 조금 어색한 감정이 먼저 고개를 들었소.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지만 꼭 써주고 싶어 이리 펜을 들었고 말이오.]

편지를 써내려가는 굵은 손가락에 망설임이 없었다.

“하하하! 레기 오빠!”

“에드는 또 마법으로 도망쳤지? 하여간...”

“비겁하다 그치?”

“앤젤라 웃으면서 그런 말 하면 하나도 와 닿지 않단다.”

“아하하! 하지만 재미있는 걸?”

흩날리는 머리카락의 뒤, 창문 밖에서 소년과 소녀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정한 울림과 사랑스런 목소리들이 귓가에 잔잔히 들어오자 입가에는 반사적으로 웃음부터 담겼다.

“오스카~테리 오빠! 여기야!”

“뛰지 마 앤젤라. 넘어지면 어쩌려고...!”

“하하하 괜찮아, 괜찮아! 그보다 플로리아는 어디 있지?”

“저기 오는군.”

“언니이이이!! 오빠들!!!!”

왁자지껄한 소음이 개구지게 다가왔다.

어떤 음악보다도 더 아름다운 소리였다.

편지를 써내려가던 펜을 쥔 손에 힘이 더해졌다.

[내가... 아니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게 잘 지내는 지 알려주려 이리 펜을 들었다고 한다면 당신은 뭐라고 하려나...]

화를 낼까?

짜증을 낼까?

아니면 함께 행복하게 웃을까?

[내 생각에는 당신도 함께 행복해할 것 같군. 그렇지 않소?]

대답은 듣지 않아도 확신이 찼다.

똑똑!

편지에 집중하던 그의 방문 앞으로 손님이 찾아왔다.

“아버지, 저 트레일이에요!”

“아빠! 저도 왔어요! 세린이요!”

어떤 초콜릿보다도 달콤한 부름에 편지를 쓰던 펜을 멈추고 그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방문 밖의 제 아이들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

“다 같이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함께 가요!”

“리사도 이엔도 왔어요, 오랜만에 황성이 가득 찬 거 있죠?”

“로레인 형님도 애인 데리고 왔더라고요. 보기 좋아 하여간!”

“어서 가요 아빠!”

그의 입가에 잔잔했던 미소가 깊어졌다.

막내들의 재롱은 언제나 그의 입가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이것만 마무리하고 가마. 먼저 가 있거라.”

“어! 일하고 계세요?”

“바쁜 일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거라, 금방 가마.”

“알겠어요, 밑에서 기다릴 테니 얼른 오셔야 해요??”

“그래.”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그가 다시 펜을 들었다.

허전하다 느껴질 자신의 공간이 이제는 눈에 띄게 행복으로 가득 찼다.

[첫 번째 행복은 우리 아이들이 너무 잘 커줬다는 것이오.

테오는 아주 훌륭한 황제로서... 그리고 훌륭한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너무 잘 지내고 있소.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제국을 지키고 이끌어나가는데 나보다 더 대단한 결과를 이끌고 오니 저절로 흐뭇해지더군.]

자신을 누구보다 쏙 빼닮은 그 강인한 아이는 이젠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훌륭한 황제가 되었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제국의 국민들의 아버지가 된 그가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그녀도 그리 생각할 것이었다.

[로레인은 늦은 연애를 시작했소.

참한 아가씨는 아니었지만 웃는 모습이 참 귀엽더군.

그리고 누구보다 우리 레인을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아가씨였다오.

눈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녀도 그 아이도 진정 사랑을 하고 있었소.]

항상 죄책감과 무거운 짐을 등에 이고 살았던 그의 행복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가 정말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안도했던지.

그를 바로잡아주고 그를 이끌어줄 여인에게 얼마나 감사했던지.

[트레일은 여전하오.

강하고 호쾌하고 시원하지.

아내를 어찌나 아끼던지 내가 저절로 당신을 생각하게 될 정도이니까 말 다했지...]

아주 어릴 적, 웃음을 잃었던 때가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밝은 제 막내아들은 지금 그 누구보다 밝았고 그 누구보다 쾌활했다.

웃는 것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자기 자식이 아니더라도 참 웃는 얼굴이 근사한 아이였다.

[세린은 당신과 너무도 닮았소.

강한 엄마가 되었고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 있더군.

그 아이가 밝고 아름답게 커나가기를 바랬으니 어쩌면 당신과 내 꿈을 이룬 셈이 되겠소.

난 이 제국에서 당신과 그 아이만큼 밝고 아름다운 아이를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오.]

누구보다 작고 여렸던 막내딸의 모습은 아직도 제 가슴에 선명했다.

마르고 앙상했던 그 몸과 잔뜩 상처받은 눈과 거친 머리카락까지...

하지만 이제 그런 모습 따위 보이지 않으니까 된 것이었다.

그 아이가 행복한 모습으로 제 가족들과 웃고 있으니 된 것이었다.

[우리들의 손자들도 훌륭히 장성했소.

테리는 황태자로서의 업무를 훌륭히 해내고 있소.

제 아비를 빼닮아 얼마나 꼼꼼하고 확고한지... 직접 본다면 아마 놀랄 것이오.

오스카는 제 엄마를 닮아 야무지고 섬세하오.

어려운 황실의 정무를 빠르게 처리하는 모습에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레기는 대공작의 대를 이을 대공자로서, 제국의 기사로서 황실에 입궐해서 일을 돕고 있소.

그 아이는 세린이 아닌 대공작을 빼닮았더군.

다정한 면모는 우리 세린을 닮았고 말이오.]

편지를 써내려가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하하하하!”

멀리서 들리는 제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애틋했다.

[에드는 황성의 마법사로서 입궐했다오.

로레인도 인정할 정도로 훌륭히 마력을 다룬다고 하더군.]

편지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에 기쁨이 담겼다.

[당신이 그리도 걱정한 앤젤라는 지금 제국 유일한 성녀로서 그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소.

영혼을 치료하고 이 땅의 생명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아이로 말이오.

우리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따뜻하고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오.]

‘에드윅.’ 기억 속에서 울리는 잔잔한 부름에 가슴이 울렸다.

자신을 부르는 그 애틋한 목소리를 잊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퍼부었는지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었다.

[플로리아는 제 고모를 닮았는지 무척이나 굳건하오.

기사의 자질을 타고 났다고 하니 기대가 크고 있소.

이엔이라는 아이도 리사를 만나 딸 하나 낳고 행복하게 지내는 듯하오.

늘 신혼인 듯 보여서 보는 내가 질투가 나더군.]

당신이 이 소식들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기쁠까.

아니, 어쩌면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위에서 내려다보면 안 보려고 해야 안 볼 수 없을 것이었다.

못 봤다고 한다면 내가 달려가 직접 이야기를 해주면 될 일이었다.

[당신은 어떻소.

우리는 이리 행복하오,

그 곳에서 당신은 우리를 지켜보고 있소, 아니면 날 기다리고 있소.]

천천히 오라고 했으니 느긋하게 가겠지만 동시에 빨리 달려가고 싶었다.

너무도 그리워서 너무도 사랑해서.

언제쯤 당신에게 다시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남아있는 이 인생을 당신을 더 기억하고 사랑하며 살 예정이었다.

[난 여전히 당신이 보고 싶소.

아직도 사랑하고 앞으로도 이리 사랑할 생각이오.]

하루도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 웃음도, 화를 내는 그 표정도, 장난기 많은 모습도.

어느 것 하나 사랑스럽지 않는 구석이 없는 그 여인을 여전히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는 제 가슴에 가득 차있었다.

[내 행복이 당신의 행복이라고 했던가...]

글씨를 써내려가는 펜의 속도가 느려졌다.

망설임 없던 펜이 멈춰갔고 그의 붉은 눈에 아주 조금의 물기가 차올랐다.

[같은 마음이오.]

나도 당신의 행복이 내 행복이었으니까.

[당신은 그 날 행복하게 떠났으니 나도 그러하오.

행복하오.]

펜이 다시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전하지 못할... 아니 곧 전해줄 수 있을지도 모를 그 말을 편지에 담고 또 담았다.

[사랑하고 있소. 내가 여전히 당신을 이리도 깊이 사랑을 하고 있소.]

작은 바람 또한 편지 안으로 스며들었다.

[우리에게 다음 생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당신에게 다시 한 번 고백하리다.

먼저 그대에게 달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우리 아이들과 더 추억을 쌓고 나서 그리로 갈 테니...

“아빠~! 얼른 오세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일이 많으신 건가요?”

펜은 이미 제 할 일을 마무리하고 제자리에 올려졌다.

“그래, 가마.”

부드럽게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책상에 적힌 편지를 부드럽게 접어 봉투에 담았다.

보내지 못할 편지는 굳게 봉해진 뒤 그의 서랍에 안착했다.

당신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당신에게 당도하지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직접 전해주고 싶은 그 말들을 암기하기 위해 쓰는 것이었다.

그의 걸음이 망설임 없이 집무실 밖으로 나섰다.

그런 그를 반갑게 바라보는 아름다운 남매들의 모습이 바로 눈앞에 선명히 아른거렸다.

“아빠!”

사랑하는 제 아이들이 사랑스런 미소를 짓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음에 새삼스럽게 감사한 마음이 생겼다.

“일은 다 하셨어요?”

“그래. 다 했단다.”

“그럼 얼른가요! 오늘은 아빠가 좋아하시는 것으로 해달라고 주방장에게 부탁했어요.”

“내가 많이 먹어야겠구나. 고맙다.”

작은 딸의 손이 부드럽게 제 팔을 잡았다.

건장한 아들들은 그의 등 뒤와 바로 옆에 서며 그의 걸음에 맞춰 걸었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안착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자식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소.

이정도면 정말 훌륭한 인생이 아니겠소.]

조심스럽게 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온기를 품은 손의 체온과 다정한 미소에 가슴에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행복하오.

나도, 그리고 아이들도.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가 더 행복을 누리고 난 후 당신에게 가리다.]

[사랑하오. 아리엘.]

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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