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베르의 진심
데미언은 제 방에 있는 짐을 차곡차곡 정리하여 가방에 넣는 중이었다.
곧 아카데미의 방학은 끝이 날 예정이었고 데미언은 개학을 위해 미리 기숙사로 옮길 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빼곡히 가방에 가득한 옷들과 책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데미언은 느리게 손을 뻗어 가방의 문을 굳게 잠갔다.
철컥!
단단히 닫힌 그 소리를 듣고 한동안 멈춰있던 데미언은 아직 밝은 해가 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았으나 그의 가슴은 우중충했다.
너무도 애틋한 그 소녀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그녀와 제 마음이 마주 닿았다.
기뻤다.
너무도 기뻤고 너무도 행복한 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걱정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얼마 전, 대신전의 기도실에서 마주친 신관이 제게 했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데미언 신관님.”
“로크 신관님.”
“아카데미의 학업은 어렵지 않으십니까?”
“네,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신관의 눈이 곱게 휘었고 데미언의 눈도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신관은 데미언과 함께 베르의 기도실로 이동하며 물었다.
“졸업은 언제 하실 예정이신가요?”
“이번 시험의 결과에 따라 정해진다고 합니다. 좋은 점수를 받게 된다면 내년 초에는 졸업을 할 것 같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신관이 존경의 감정을 담아 데미언을 바라보았다.
“이리도 훌륭히 장성하시니 대신관님도 데미언 신관님을 믿고 자리를 물려주시려 하시나봅니다.”
“......!”
데미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으나 신관은 그를 모르게 다정히 말했다.
“졸업을 하시게 된다면 대신관님이라 불리실 수도 있겠네요.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 가...”
숨이 막힌 듯 목소리를 내뱉기 괴로워졌다.
데미언은 있는 힘을 쥐어짜내어 겨우겨우 한 마디를 내뱉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기억이 거기까지 미치자 데미언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대신관의 자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오르는 것이 과연 정답일까?
이 힘을 가지고?
데미언의 손에 제 손을 바라보았다.
신의 품에서 생명을 살리고 영혼들을 살펴야 하는 손은 생명을 죽이는 저주를 담고 있었다.
자신은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닐까.
태초의 마력도, 영혼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데미언의 손이 천천히 제 손을 말아 쥐었다.
‘긍정적인 생각.’
약속했잖아 그녀와.
먼저 다가가기로, 이 힘을 원망하지 않기로, 완벽하게 다루기로.
데미언은 굳은 결심이 선 얼굴로 창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제 신관복을 정돈한 후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앞으로 나섰다.
숨길 곳도, 숨을 곳도 이제는 없다.
제 아버지에게 저주받은 이 손에 대해 말씀드린다면 무언가 답을 내어주시지 않을까?
데미언의 긴 다리가 이윽고 베르의 문 앞에 닿았다.
그는 여신의 상이 담긴 익숙한 문에 다다르자 노크를 위해 들었던 손을 멈췄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어둠술사라는 것을 아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너무도 무서웠다.
자신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지실까.
제게서 위협을 느끼실까.
두려워하실까.
“....... 후.”
데미언이 고통스런 한숨을 내쉬자마자 문 안으로 베르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고 있지 말고 들어 오거라.”
“....!”
그 나직한 목소리에 데미언의 얼굴이 굳었으나 이내 입술을 꾹 다문 그는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환한 햇빛이 들어오는 기도실의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베르가 데미언을 향해 다정히 웃음 지었다.
“이리 와서 앉거라.”
“.... 네.”
데미언이 부드럽게 베르의 건너편에 자리했다.
베르는 작은 컵에 차를 따라 데미언의 앞에 내려놓은 후 물었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구나.”
“......”
“얼마든지 기다려줄 수 있단다. 천천히 이야기해주렴.”
“...... 아버지.”
“그래.”
데미언의 목소리가 차츰 떨려왔다.
“제가 대신관이 되시기를 바라시나요.”
찻잔을 잡으려던 베르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는 부드럽게 데미언을 바라보았고 이내 제 두 손을 마주잡으며 말했다.
“진로의 문제였구나. 대신관이 되기가 싫더냐.”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오르시기를 바라시나요.”
“흠....”
베르는 잠시 기도실의 여신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대신관으로서 말하자면 그러기를 바란다.”
“....!!!”
“너 말고는 이 신전을 이끌 수 있는 자들은 없다고 생각하니까.”
데미언의 낯빛이 창백해졌고 베르는 그런 그를 바라보지 않고 이어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말하자면 오르지 않기를 바란다.”
“.....!!!!”
베르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데미언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 자리가 너에게 고통이라면 하지 않아도 좋다. 네가 하고 싶은 걸 찾고, 해야 할 일을 찾기를 바라고 있단다.”
“아버지....”
“지금 네가 고민하는 이유도 알 것 같구나. 곧 졸업을 할 예정이라 들었다.”
“..... 그 이유 뿐만은 아닙니다.”
“흠?”
데미언은 놀란 눈을 한 베르를 향해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외쳤다.
“아버지...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데미언?”
“저는... 아버지처럼 태초의 마력이 존재하지도 않고, 영혼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어요...!”
“...... 데미언.”
“그리고....”
데미언의 손이 떨려왔다.
그는 제 손을 꾹 말아 쥐면서 말했다.
“제 손에는 저주가 있습니다.... 아버지...”
“.......”
“사람을... 생명을 죽일 수 있는 저주요....”
데미언의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지는 고통에 베르가 침묵했고 데미언은 잔뜩 떨리는 제 손목을 붙잡으며 억누른 숨을 토해냈다.
꺼내기 무서웠던 말들을 쏟아내면서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다는 것을 늦게 알아차린 탓이었다.
데미언은 곧 제 귀를 강타할 두려운 말들을 들을 준비를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자신을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아주 느긋하게 흐르는 침묵을 넘기고 베르가 데미언을 불렀다.
“데미언.”
“.... 네, 아버지.”
“그 고민을 떠안고 오래도 버텼구나.”
“.....!”
예상치도 못한 문장에 데미언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제 눈동자와 마주친 베르의 얼굴에는 너무도 가슴이 아픈 미소가 담겨 있었다.
“어릴 적부터 자기 아픔이나 고민은 내비치지 않으려 하더니... 다 커서야 진심을 말해주고 말이지....”
“아버지....?”
놀란 데미언의 얼굴을 씁쓸하게 바라본 베르는 이윽고 제 아들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한 손으로 잡아지지 않을 만큼 커진 아들의 손이 무척이나 애틋하고 동시에 씁쓸했다.
“네 아버지라 불리는 게 난데... 내가 설마 그 사실도 모르고 있을 것 같더냐.”
“...!!!!”
“바보 같구나, 데미언....”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벌리고 있는 데미언을 향해 낮게 혀를 찬 베르는 이내 그의 손을 애틋하게 쓸어주며 다정히 말했다.
“미련하기는....”
“아버지... 어, 언제부터....”
“오래도 되었지. 네가 어릴 적부터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산책을 하다 네가 잡은 꽃들이 모두 시들어 죽는 것을 직접 본 후부터 말이다.”
“.......”
데미언이 멍하니 베르를 바라보며 몸을 굳혔다.
베르는 그런 아들의 손을 부드럽게 쓸어주기를 반복하며 쓰게 웃었다.
“그리도 내가 미덥지 못했느냐.”
“!!”
“그 어린 것이 나한테서 저주받은 손을 들킬까 무서워 전전긍긍한 것을 보면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을 것 같더냐.”
“아버지....”
“안아주고 싶었다. 네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내가 그 한 몸 안아주며 인정해주고 싶었다.”
베르의 눈가에 작게 눈물이 고였다.
“그런데 넌 오히려 다가오는 내가 위험에 빠질까 멀어지더구나.”
“......”
“미련한 녀석.”
“아버지.”
“그래도 지금은 기쁘구나.”
베르의 손이 데미언의 손을 꾹 잡았다.
굳센 힘과 함께 따스한 온기가 데미언의 손바닥에서부터 느껴졌다.
“이제라도 날 믿고 말해준 것이니 말이다.”
“.....”
“대신관을 했으면 했냐고 물었었지. 자격이 없는 네가 그 자리에 올라도 되는지 말이다.”
“......”
“당연히 된다고 말해주마.”
“!!!!”
데미언이 경악스런 눈으로 베르를 바라보다 베르는 털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 말고는 이 신전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 자는 없으니까 말이다.”
“아버지....”
“진심은 언제든지 닿을 수 있다고 들었다.”
베르의 시선이 데미언의 물기에 젖은 청록색 눈동자를 담았다.
사랑하는 제 아들이 저 고통을 껴안고 버틴 세월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그렇기에 보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진심이 숨이 벅차도록 애틋했다.
그의 행복을 빌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만 행복하다면 모두 좋았다.
그가 뱉은 진심을 자신이 받아들인 만큼 그도 제 진심을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
“대신관이 하고 싶다고 한다면 언제든 환영한단다. 만약 하기 싫다고 한다면 네가 좋아하는 걸 찾거라.”
“아버지....”
“나는 네 모든 선택을 존중하고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단다.”
단, 그의 선택 아래에 고통과 상처는 없어야 할 것이었다.
베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올곧게 데미언을 바라보았다.
데미언은 제 아버지의 다정한 시선 속에서 몰아치는 제 감정을 추스르며 고개를 숙였다.
제 손을 잡아준 베르의 손이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하고 싶어요....”
“데미언.”
“대신관이... 되고 싶었어요...”
그를 존경한 만큼 그의 자리도 존경했었다.
그렇게 자리 잡힌 꿈이 저주받은 그 손으로 인해 망가졌다고 생각했었고 말이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제 꿈은 제게서 단 한발자국도 멀어지지 않았다.
멀어져갔던 것은 제 자신이었다.
데미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준 베르는 다정히 말했다.
“그거면 되었다.”
“......”
“그거면 된 거야.”
베르의 진심과 데미언의 진심이 닿은 순간의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그들의 가슴에도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