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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198화 (197/218)

198화. 할 수 없이 해주는 거야.

로레인의 손이 분홍색의 지갑을 쥐었다.

하얀 손가락을 타고 푸른빛이 흩날렸고 그의 마력의 빛은 잔잔하게 주변을 훑으며 사라졌다.

로레인의 긴 속눈썹이 팔랑이며 이내 가늘게 떠졌다.

누구보다 아름다운 보라색의 눈동자가 지갑을 묵묵히 유시하다가 이내 벨을 향해 말했다.

“꽤 멀리 이동했나보군. 가보지.”

“찾은 거야?? 어디 있어?? 누군데??”

“.... 축제 중인 수도의 중앙에 있고 당연히 누군지 아직 알 수 없다.”

“그래!! 알겠어!! 빨리 가보자!!”

“......”

로레인은 신이 난 듯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제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며 한숨을 삼켰다.

벌써부터 후회가 밀려오는 기분이었으나 그 후회를 삼킨 로레인은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걸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초록빛 머리카락을 유심히 바라본 벨은 그런 로레인의 옆에 서며 물었다.

“머리카락을 바꾸는 마법은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 거야?”

“.... 기본적인 마법이다.”

“나는 워프밖에 할 줄 모르는데... 워프도 기본이야?”

“워프는 기본이라고 할 수 없지.”

로레인이 담담히 앞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워프는 신체를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것인데... 원하는 장소로 정확히 이동하기 위해서는 이동할 곳의 지리와 마력의 사용량의 정도를 잘 계산해야하지.”

“오.... 그럼 워프는 좀 어려운 거네?”

“상, 중, 하로 따졌을 때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자칫하다가는 모르는 땅으로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럼 나 재능은 있는 거잖아! 그치??”

“......”

마법사로서의 재능이야 마력만 사용할 줄 안다면 누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마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재능의 차이가 벌어진다.

로레인은 신나 보이는 벨을 힐끔 바라보다가 냉정히 말했다.

“큰 기술을 먼저 쓸 줄 안다고 천재는 아니지.”

“응??”

“천재도 모든 분야에서는 기본기가 완벽하지만 넌 기본이 없는 것이니까.”

“뭐야아?!”

“그게 현실이다. 그 정도의 재능으로는 대마법사라고 불리기도 어려울 것이다.”

“누가 대마법사가 되고 싶대?! 그러는 넌 얼마나 잘났는데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제국의 대마법사라 불리고 있는 로레인 레바스찬.

아니, 대마법사로서 새로운 성을 하사받은 로레인 레거스그게 자신의 이름이었다.

로레인은 버럭 버럭 제 화를 이기지 못하는 벨을 쳐다보지도 않고 앞을 보며 걸었다.

축제는 이제 막 시작이었고 하늘은 점점 어둠이 다가오고 있었다.

노을의 모습이 나타나는 주홍빛의 아름다운 하늘 아래에서 로레인은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마력을 통해 알아낸 지갑의 주인인 듯 보이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 듯 했다.

“왜?? 찾았어??”

“조용히 좀 했으면 하는군.”

“이제는 시끄럽다고 뭐라고 해! 이씨!”

벨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넘겨버린 로레인이 이윽고 지갑의 주인을 찾았다.

그리곤 난처한 눈으로 자신과는 같으면서도 조금 다른 빛을 가진 벨의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 난처한 표정의 등장에 벨이 당황했다.

“왜... 왜 그래...? 혹시 나 귀족의 지갑을 건든 거야?”

“......”

벨은 로레인의 침묵 속에서 긍정을 찾은 듯 했다.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버렸다.

로레인도 굳어버리긴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그래... 하필이면 훔쳐도 귀족의 것에 손을 댈 것이 뭐란 말인가...

그것도 저 귀족의 것을 말이다.

벨은 서글픈 눈을 올려 로레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누... 누구의 지갑이야...? 어떤 분이셔...?”

“제국의 두 번째 검.”

“....??”

“제국 최초의 여성 마스터이자 황제에게 성을 하사받은 백작.”

“.....”

“결혼을 하기 전에는 제국에서 유일한 대공녀였지.”

로레인은 말을 끝마치며 질린 기색을 담아 지갑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지갑의 주인은 바로 리사 도베로만 이었으니까.

그녀는 지금 제 옷을 열심히 뒤지며 지갑을 찾는 중이었다.

이엔은 그런 그녀의 옆에서 난처하게 웃을 뿐이었고 말이다.

“안 보여!!!”

“바지의 뒷주머니에도 없나요?”

“없어!! 말도 안 돼!!!”

“이런... 어디에다 떨어트리신 건 아닌가요?”

“떨어트릴 만한 위치에 넣지 않았어!! 내가 칠칠맞게 잃어버리지는 않는 단 말이야!”

“흠... 그렇다면 누가 훔친 걸까요...”

이엔의 걱정스런 말에 리사의 두 눈에 살기가 흘렀다.

누구라도 걸리면 죽일 것이라는 감정이 가득한 푸른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걸리기만 해봐!!! 온 몸을 조각내서 개밥으로 줄 거야!!!”

“리, 리사님 진정하세요.”

“여보라고 안 해??! 너도 죽을래?!”

“힉!! 여, 여보!!!”

“호칭 똑바로 안 하면 너부터 죽는다!!”

“네!!”

이엔을 향해서도 번뜩이는 눈동자에는 은근한 흑심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저 대화가 어찌 신혼부부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거 전하의 머리카락이랑 제일 닮은 색이라 아꼈던 거라고!! 열나네!”

“한 번 찾아와요 우리.”

“으아아! 잡히기만 해봐라!!!”

‘지갑의 색이 자신답지 않은 이유는 그거냐...?’ 참 대단한 세린사랑이다 싶었다.

정작 본인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로레인은 그런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벨을 바라보았다.

사시나무 떨리듯 온 몸을 떠는 그녀가 참 안쓰러웠다.

“나.. 난 끝났어...!! 난 감옥에서 썩어야 해!!”

“......”

‘하긴... 그녀가 목청이 워낙 크니 다 들렸겠지...’ 로레인은 창백해진 벨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다가 작은 고민을 했다.

자신이 대신 전해준다면 저리 갈가리 찢기지 않을 수 있을 것이었으니 말이다.

로레인은 망설이는 손을 뻗어 지갑을 받으려는 그때 벨이 외쳤다.

“주고 올게!!!”

“..... 뭐?”

“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건네주면.... 이해 해주실 거야...!”

“.....”

진담일까?

로레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온 몸을 조각낸다던데?”

“아, 알고 있어!”

“그 조각을 개밥으로 준다고도 하던데?”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이미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는 주제에 돌려주려는 용기는 가상했다.

로레인은 새삼스럽게 그런 벨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는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마음을 먹은 듯이 심호흡을 한 벨은 로레인을 향해 말했다.

“지갑 주인 찾아줘서 고마워!”

“....?”

“나 죽으면 애도는 해 줄 거지?”

“기도라면 올려주지.”

“그거라도 어디겠어? 고마워!”

벨의 미소가 너무도 안쓰러웠다.

그녀는 몇 번의 심호흡 뒤에 얼굴을 굳히며 지갑을 꾹 쥐고 리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조금이라도 솔직하게 말한다면 용서를 해줄 지도 몰랐다.

노발대발하는 고위 귀족에게로 한 발 뻗자마자 그녀의 손목을 잡아챈 로레인만 아니었다면 분명 리사에게 당도했을 것 이었다.

턱!

“.....?”

벨의 짙은 보라색 눈동자와 로레인의 환한 제비꽃 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눈을 빛내며 로레인이 나직이 말했다.

“됐어. 지갑은 내가 전해줄게.”

벨의 눈이 커졌다.

“응?? 네가?.... 왜?”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아, 아는 사람??”

벨의 튀어나올 듯 커졌으나 로레인은 이어 말했다.

“그래. 아는 사람. 내가 대신 전해줄 테니까 지갑 줘.”

“하, 하지만...”

“저 귀족은 자기 사람이 아니라면 용서하지 않아.”

“윽....”

딱딱하게 굳어버린 벨의 손에서 로레인이 자연스럽게 지갑을 빼내었다.

“어어!!”

하며 다시 벨이 손을 뻗었으나 지갑은 이미 품을 떠난 뒤였다.

로레인은 지갑을 쥔 손에 마력을 불어넣어 워프를 시켰고 그 지갑은 자연스럽게 리사의 발치에 떨어졌다.

“어? 리사님 밑에...”

“엥?? 이게 왜 여기 있어??”

“그것도 그거지만 이 마력은 분명..”

이엔이 주변에 미미하게 남은 로레인의 마력에 눈을 크게 뜨자 찔린 듯한 얼굴의 리사가 다급히 이엔의 손을 붙잡았다.

“야 튀어!”

“네??”

“아씨 빨리!!”

“어어!! 리사님!”

빠르게 멀어지는 리사의 뒷모습을 로레인이 피식 웃으며 바라보았다.

‘튈 만 했지... 그 서류는 너무하잖아.’

지금 도망가 봤자 내일이면 다시 마주할 얼굴이었다.

기필코 장문으로 문서를 쓰게 만들고 말 것이라는 다짐을 하며 로레인이 벨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벨의 눈에는 눈물이 여전히 가득했지만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만은 명백히 바뀌어져 있었다.

‘감동.’

그래, 딱 그 단어였다.

*

어두운 밤의 하늘 위에는 수많은 별이 떴고 그 하늘 아래에는 수많은 등불이 불을 비췄다.

로레인은 높은 나무의 위에서 솜사탕을 먹으며 앉아 있었고 벨은 그의 옆에서 같은 색의 솜사탕을 맛보고 있었다.

묘한 침묵을 깨며 로레인이 물었다.

“도벽은 언제부터 생긴 거지?”

“음... 아빠가 죽은 후부터?”

“......”

“왜 그런 표정이래? 하하하!”

벨이 굳어버린 로레인을 바라보며 비웃다가 이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 아빠는 마법사면서도 도둑이었어. 아주 못된 사람이었지.”

“.....”

“그런 사람인 주제에 자기 딸한테 물건 훔치는 법이나 알려주고 말이지... 마법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니 잘 도망가라고 워프도 알려주더라.”

참 우습지 않느냐며 벨이 키득키득 웃었다.

“워프 말고 다른 걸 알려주기도 전에 마차에 부딪쳐서 돌아가셨거든.”

“......”

“그래서 몰라. 워프 말고 다른 마법 따위...”

벨의 눈에서 조금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조금씩 차오르는 다른 감정과 눈빛은 그 예전... 아리엘이 사라졌을 때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

로레인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마법 배우고 싶어?”

“.... 응?”

달빛을 받은 벨의 짙은 금발이 환하게 비춰졌고 로레인의 보라색 눈동자가 묵묵히 그녀를 담았다.

“배우고 싶다면 알려줄게.”

“...!!”

“네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가 딱히 할 게 없어서 그런 거야.”

“.......”

로레인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담겼다.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좋아.”

정말 할 수 없이 해주는 거야.

로레인의 새로운 첫 인연이 그의 새끼손가락에 굵게 얽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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