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첫 인연
로레인은 황성의 꼭대기에서 리사의 훌륭하다 못해 너무도 간결해 말이 다 잘린 업무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황성에서 기사 단장으로 일한 세월만 몇 년인데 기사단 업무에 관한 보고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어 로레인의 골칫거리가 되어 있었다.
“적어도 한 문장 당 3마디로 써 달라 그렇게 일렀는데...”
-매우 완벽 하다-
“장난하나....?”
보고서라고 칭하기도 민망한 종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로레인이 결국 짙은 한숨을 쉬었다.
일단 그녀를 찾아내서 이 보고서를 다시 쓰게 하던, 받아 적게 하던 해결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로레인은 망설이지 않고 제 2기사단의 훈련장으로 워프를 시행했다.
파밧!
밝은 푸른빛과 함께 나타난 로레인은 주변의 훈련장을 둘러보며 훈련에 열중인 기사단들을 관찰했다.
우락부락한 사내들 틈에서 유독 돋보이던 여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흠....”
“전하! 여기까지 무슨 일로...”
“아...”
2기사단의 부단장이 서둘러 로레인에게로 달려왔다.
로레인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도베로만 백작을 만나러 왔는데... 자리에 없나?”
“아... 단장님이라면 하루 휴가를 받아 오늘 백작저에 계실 것입니다.”
“휴가?”
“네... 갑자기 휴가를 하루만 달라 그러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군... 고맙네.”
그 말을 끝으로 로레인은 다시 워프를 외쳤다.
이번 목표는 도베로만 백작저였다.
이엔이 직접 설계하고 값을 내어 지은 백작저는 수도 내에서 대공작의 집 그 다음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웅장한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귀품에 로레인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귀품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 사는 고귀한 집이라니...
한명은 수줍음 많은 기사고 한 명은 말에 뜰채가 없는 과격한 기사.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어울리는 묘한 느낌을 받으며 로레인이 백작저에 들어섰다.
“죄송합니다. 백작님께서는 지금 백작부인님과 함께 외출을 하셨습니다.”
‘이엔과 나갔다고...?’
“.... 어디로 갔던가?”
“그것이... 오늘 수도에 축제가 있으시다 하셔서 함께 보러 가신다고...”
깨가 쏟아지는 시기의 부부란 것을 잘 알고 있다.
로레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음 날을 기악하려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오늘의 리사를 만나는 것이 더욱 어려운 듯 했다.
“그보다... 축제라고? 아직 건국제 그 시기는 아닌 것 같은데...”
“네, 지금 시기에 열리는 것은 성인들의 축제입니다.”
“성인들의?”
“네. 일정시간 후부터 성인 외에는 수도의 축제 공터에 출입이 안 된다고들 하더군요. 새벽까지 하는 축제이니만큼 아마 늦은 밤까지 수도가 환할 것입니다.”
“흠....”
‘축제라도 구경을 갈까?’ 리사도 찾을 겸, 오랜만에 축제도 구경할 겸, 황성의 있을 아이들 선물과 세린과 아이들의 선물을 살 겸.
그 생각을 하자마자 로레인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그 자리에서 워프했다.
이번의 목표지는 수도의 한 골목이었다.
*
파밧!!
주변의 시야가 바뀌자마자 소음부터가 달라졌다.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와 터지는 폭죽들의 소리는 조용한 분위기에서만 있던 로레인의 귀를 놀라게 만들기 충분했다.
“.....”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물씬 풍겼으나 골목으로 흘러나오는 신나는 음악소리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다시 돌아가 봤자 일도 손에 안 잡힐 것 같으니 시간이라도 때울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연스럽게 마력으로 짙은 초록색으로 머리카락 색을 바꾼 로레인은 자신이 있는 방향을 향해 무언가가 빠르게 돌진하는 것을 느꼈다.
살기도 없고 공격성도 없는 뜀박질이 느껴지자 그는 부드럽게 고개를 돌리며 그 존재를 육안으로 확인했다.
“으아!!!! 비켜요오!!!”
짙은 금발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한 인영은 곧 로레인과 부딪칠 듯이 달려왔다.
스스로도 그 속도에 기겁을 했는지 두 눈을 질끈 감는 것이 여간 웃긴 것이 아니었다.
로레인은 달려드는 사람을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좁힌 뒤 한 팔을 뻗어 망설임 없이 그 인영의 얼굴을 그대로 잡았다.
턱!
“우억!!”
큰 손이 제 안면을 그대로 잡아버리자 달리는 발은 멈췄으나 제 얼굴 근육도 멈춰졌다.
저절로 발버둥 친 그 사람은 짧은 두 팔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아!! 놔요!! 안 놔?! 야 임마! 너 몇 살이야!!”
“하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군...’ 별로 좋은 일들이 생기지 않는 듯한 느낌에 로레인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갈까...?’
“야!!! 놓으라고!!!”
“.....”
하라고 하면 더 하기 싫어지는 법이다.
로레인은 그저 가만히 발버둥 치는 인영을 바라보았고 인영은 결국 이를 악물더니 다급히 외쳤다.
“워프!!!”
“!!”
파밧!!
인영이 그렇게 외치는 순간, 로레인의 손에서부터 인영이 사라졌고 이내 그의 앞으로 2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인영이 다시 나타났다.
로레인은 그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거두고 인영을 다시 바라보았다.
금색의 머리카락은 어깨 밑으로 찰랑이고 있었고 고개를 든 눈동자 색은 보라색이었다.
이제 20대 중반쯤 되었을 것 같은 앳된 외모를 한 인영은 여인이었고 그 여인은 급하게 한 워프로 인해 바닥에 널브러져 앉아 있었다.
널브러진 자세로 로레인에게 손가락을 휘두르며 소리치고 말이다.
“헉... 헉! 야!! 너 내가 놓아달란 말 안 들렸어?!”
“.... 마법사였나.”
“그게 문제야?! 남의 얼굴을 그렇게 붙잡고 있는 자식이 어디 있어?!”
“여기 있군.”
“아.... 그렇네?”
쉽게 수긍한 여인의 표정이 어벙해보였다.
로레인은 조금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여인은 이내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나 제 원피스를 털었다.
“아무튼...!! 앞으론 그렇게 사람 잡아주면 안 돼! 그거 폭력이야!”
턱!
“응?”
원피스를 터는 손길에서부터 뭉툭한 무언가가 그녀의 손에 닿은 소리가 났다.
로레인도 함께 그녀의 원피스로 시선을 돌렸고 여인은 제 주머니에서부터 느껴지는 뭉툭함에 서둘러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주머니에서부터 나타난 것은 분홍색의 한 지갑이었다.
여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 또....”
“....?”
“또 훔쳐버렸어!!! 으아!!! 완전 바보잖아!!”
“......”
여인은 제가 쥔 지갑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주... 주인을 찾아줘야 해... 누구니.... 난 도대체 누구 것을 훔친 거야아!”
“......”
도벽증이었나...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라 조금 신기한 마음에 그녀를 바라보던 로레인은 이내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
할 말 있냐는 식으로 눈썹을 들어 올리자 여인이 황급히 그에게로 달려오며 물었다.
“네 거야?”
“.... 아니다.”
“.... 역시 그렇지....?”
“후....”
역시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아 로레인은 다시 황성으로 향하기 위해 마력을 모았다.
여인이 급하게 제 팔을 붙잡지 않았다면 바로 워프를 할 수 있었을 것이었고 말이다.
턱!
“... 뭐지?”
“저기... 너도 마법사지? 방금 워프한거 나 봤다고?”
“... 그래서?”
“나 부탁이 있어.”
“싫어.”
“아직 말도 안 했거든?!”
“같이 주인을 찾아 달라는 것이라면 거절한다.”
“아니 도대체 왜!!! 나 돈 많아! 돈 줄게...!!”
여인의 외침에 로레인이 검지를 올리며 단호히 말했다.
“일단 첫 번째는 난 네가 누군지도 모른 다는 것이고.”
그의 중지까지 곧게 올려졌다.
“두 번째는 너보다 내가 더 돈이 많아.”
“......”
“그리고 너도 마법사라면 그 정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텐데?”
“난 워프밖에 할 줄 몰라...”
“.....”
다방면에서 대단한 여인이었다.
로레인은 그런 여인을 모르는 척 하며 냉정히 뒤를 돌았다.
더 저 여인과 상종을 했다가는 무슨 일을 겪을지 잘 몰랐다.
그런 로레인의 뒤에서 여인이 외쳤다.
“그럼 이거 돌려줄게!!”
“.....?”
로레인의 발걸음이 멈추고 고개가 돌아갔다.
여인의 의기양양한 미소 옆으로 그녀의 손에 담겨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제 손수건이었다.
어릴 적 세린이 손수 짜서 준 제비꽃 그림이 담긴 손수건이 덜렁 매달린 것을 보자 로레인의 눈이 커졌다.
“..... 무슨.”
“이것도 실은 실수이기는 한데... 미안하지만 이용 좀 해야겠어.”
“......”
“나 정말 도둑으로 몰려서 감옥에서 살기 싫다고.... 제발 부탁이야....!”
“하아...”
로레인은 제 눈가를 쓸며 깊이 한숨을 내쉬다가 이내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으니 이리 줘.”
“저, 정말?”
“그래.”
“정말이지??!! 우와 고마워!!”
“.......”
알겠다는 그 한 마디에 협박하던 물건을 다시 제 손에 준 여인의 행태에 로레인이 침묵했다.
이 여인을 나쁘다고 해야 할지, 바보같이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냥 손수건을 들고 돌아가 버릴까 생각을 하는 그의 눈이 이내 홍조가 붉게 올라온 여인의 기쁜 미소가 눈에 담겼다.
“.....”
어차피 마력 하나면 지갑 주인도 찾기 쉬우니 그냥 동행을 해볼까 싶은 생각이 슬쩍 올라왔다.
특출나게 그녀가 예뻐서 그런 마음이 든 것도 아니었다.
바보처럼 순수해 보이는 미소에 반해서 그런 것도 절대 아니었다.
그저 갑자기 궁금해져서였다.
저 백지 같은 여인이 이 지갑의 주인에게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지갑을 돌려줄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제 주머니에 있는 물건을 저리 간단히 훔칠 수 있는지 몹시 궁금해진 탓이었다.
그러던 그때, 여인의 손이 불쑥 로레인의 앞에 나타났다.
그리곤 자신을 벨 이라고 소개했다.
“벨이라고 해! 반가워!”
환히 미소를 지은 입술이 보조개를 피워내며 고운 곡선으로 휘었다.
새하얀 볼에 작게 담긴 작은 주근깨와 보라색의 동그란 눈동자가 여인을 더욱 어려보이고 순수해보이게 만들었다.
로레인은 그녀의 뻗은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레인이다.”
조금 미묘한 두 사람의 첫 인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