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오스카 가족
세린의 감기 사건이 끝난 후, 오스카는 황궁의 서재에서 깃펜을 부지런히 놀려 업무를 보고 있었다.
배워가는 것을 금방 이해하는 인지능력과 빠르게 습득하고 배워가는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 덕분에 많은 양은 아니지만 황성에서의 업무를 어린 나이에 맡게 되어 일을 할 수 있었다.
받쳐주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성격 탓도 있었다.
오스카는 서둘러 놀리던 깃펜을 멈추고 이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노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
밝은 노을의 빛이 오스카의 푸른 머리카락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의 눈에 작은 고민과 작은 고통이 스친 듯 했으나 작은 노크소리에 그 감정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똑똑
“.....??”
서재의 문을 두드리는 정갈한 노크소리에 오스카의 붉은 눈이 문을 향해졌고 기나긴 한 사람의 다리를 위로 넓은 어깨를 지나 날카롭지만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발견했다.
오스카의 두 눈이 맑게 빛났다.
“아버지!”
노크를 두드린 사람은 바로 트레일이었다.
트레일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달려오는 오스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일은 어때? 어렵지는 않고?”
“네, 선생님들께서 잘 알려주셔서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어요.”
“바쁜 일은 다 끝냈거든. 시간도 늦었는데 같이 가자.”
“아직 일을 마무리하지 못해서요... 이것만 작성을 하고 갈게요.”
“기다릴 테니 너무 마음 급하게 하지 말고.”
“네.”
트레일은 자리를 잡고 일에 다시 열중하려는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맞은편에 자리한 트레일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헤일리를 닮은 푸른 머리카락도, 자신을 닮은 붉은 눈동자도, 두 사람을 닮은 이목구비도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사각 사각
깃펜과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조용한 서재를 울렸다.
오스카의 붉은 눈이 집중으로 인해 짙어졌다가 천천히 제 빛을 발하며 선명해졌다.
트레일은 그런 오스카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대단하네, 그런 것도 이제는 잘하고.”
멈칫!
오스카의 깃펜이 멈췄다.
트레일은 그런 오스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물었다.
“오스카? 왜 그러니?”
“.... 아버지.”
“응??”
오스카의 입술이 망설임을 담고 달싹여졌다.
묻고 싶은 것이 잔뜩 있는 듯한 그 모습에 트레일은 눈을 크게 떴다.
“오스카?”
“......”
오스카는 머뭇거리는 제 깃펜을 쥐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이내 난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일은 다 했는데 이제 어머니께 가요 우리.”
“.....?”
“어머니께서 시장하시겠어요. 어서요.”
“.... 그래.”
다급히 서류들을 챙긴 오스카의 뒤를 따라 일어선 트레일은 난처한 표정으로 제 머리를 긁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했지만 그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
“헤일리~!”
“둘 다 고생 많았어요.”
트레일와 오스카의 귀환에 헤일리의 남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고운 입가의 미소가 너무도 눈부시게 환해서 트레일은 호쾌하게 웃으며 그녀를 제 품에 꼭 껴안았다.
“진짜 보고 싶었다고요!! 오늘 뭐하고 있었어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매일 보는 얼굴이면서...”
“반응이 그러면 안 되죠! 빨리! 나 보고 싶었어요?”
“..... 네.”
헤일리의 수줍은 대답에 트레일은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담고 그녀의 옆에 자리했다.
오스카도 그런 부모님의 모습에 다정한 미소를 품으며 맞은편에 자리했고 말이다.
단란한 가족이 모여 더욱 단란한 대화가 오고갔다.
그 아름다운 장면은 노을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지속되었다.
*
그 날 저녁.
오스카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제 방의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늘 짓고 있던 미소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눈에 보이는 짙은 고독과 괴로워 보이는 눈동자는 달빛을 받아 더욱 처량하게 빛났다.
철컥
“!!!”
노크없이 열려지는 문으로 인해 오스카의 얼굴이 저절로 굳어졌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 오스카의 두 눈에 헤일리가 담겼다.
“어... 머니?”
“노크를 안 해서 미안해. 자는 모습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아....”
“아직도 안 자고 뭐하고 있었니? 옷도 그대로네.”
자연스럽게 헤일리가 오스카의 옆에 앉았다.
헤일리는 고운 손가락을 뻗어 오스카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며 물었다.
“고민이 있나보구나.”
“...... 아니에요.”
“그런 거짓말은 지금 네 나이에는 필요하지 않아.”
“.....”
단호하지만 부드러운 어조의 말에 오스카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헤일리는 그런 아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고 이내 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오스카. 네게 고민을 말해달라고 강요할 생각은 없어.”
“.....”
“하지만 네가 혼자서 그 고민으로 앓는 것은 엄마가 원하지 않아.”
헤일리의 남색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오스카는 그런 헤일리의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그녀가 잡아준 손을 꾹 쥐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작은 물기를 담아가고 있었다.
“어머니...”
“응 오스카.”
“전.... 아버지처럼 되고 싶었어요.”
순간적으로 헤일리는 자신의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다 이내 천천히 가슴을 가다듬으며 나직이 대답했다.
“응....”
“아버지처럼 크고 싶었고 아버지처럼... 강해지고 싶었어요.”
“.....”
제국의 검이라 칭송받는 제 아버지처럼 강해지고 싶었다.
검을 들고, 맹세를 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는 그런 기사가 되고 싶었다.
묵묵하게 제 이야기를 내뱉던 오스카의 두 눈이 ‘체념’과 ‘포기’를 담았다.
그의 입가에 지어진 작은 미소가 너무도 쓸쓸해보였다.
“알아요...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오스카...”
“전 절대 아버지처럼 될 수 없으니까요.”
절대로.
“전 마력이 없잖아요.”
바랄 수조차 없는 높은 곳이었다.
처음부터 그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길 따위는 제게 존재하지 않았다.
노력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은 마력도, 재능이 없었으니까.
검술에 재능이 넘치는 테리 레바스찬, 레기 스페라도.
출중한 마력으로 마법사의 길을 걷는 에드 스페라도.
성녀의 마력을 갖춘 앤젤라 스페라도.
특별한 이들의 가운데에 놓인 평범한 아이는 바로 자신이었다.
아무런 재능도, 아무런 힘도 없는 제 자신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오스카의 나직한 고백과 짙은 상처가 담긴 고민에 헤일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들의 상처를 어디서부터 치료해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헤일리는 이내 마주잡은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스카.., 예전에... 그러니까 엄마가 네가 엄마 뱃속에 있는 줄 몰랐었을 때...”
“......”
“그때... 나쁜 사람 때문에 독을 마셨었어.”
“!!!”
오스카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헤일리는 그런 아들의 손을 잡으며 묵묵히 입을 열었다.
“그때 넌 뱃속에서부터 마력이 가득 있었어... 그런데 그 독 때문에 마력이 없어진 거지.”
“어머니....”
“넌 재능이 있었어... 네 꿈을 이루지 못하게 한 건 나 때문이란다.”
“어머니!”
“내가 그때 더 조심했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헤일리의 눈가에 고인 눈물에 오스카의 가슴이 쿵 떨어졌다.
그녀가 상처를 받기를 바라며 뱉은 고민이 아니었다.
“어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아니. 명백한 엄마의 잘못이야.”
“어머니!”
오스카의 눈에 눈물이 떨어지며 다급히 제 어머니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 애절한 손길에 헤일리도 눈물을 떨어트렸다.
“미안해 엄마가...”
“어머니 탓이 아니에요.”
“미안해...”
“죄송해요...”
눈물바다가 된 방에서 헤일리와 오스카는 펑펑 울며 서로 사과를 하기 바빴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트레일이 눈에 띄게 당황할 정도로 말이다.
“두, 둘 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허어어어엉!!”
“으으윽!!”
“어떤 새끼가 우리 애들을 울렸어!!”
소란스런 밤이었다.
*
오스카의 고민을 들은 트레일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두 손을 뻗어 헤일리와 오스카를 끌어안고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빠한테 그런 고민도 말하지 않고 그랬단 말이지...? 오스카!”
“.... 죄송해요.”
“흠... 사과할 일은 아니지. 너도 고민하던 일이었으니까.”
트레일은 사과를 하는 제 아들과 서글퍼하는 아내를 한 팔로 꼭 안아주며 나직이 말했다.
“기사가 되고 싶다면 되어도 좋아.”
“....!!”
“마력이 있어야만 기사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아버지...!”
오스카가 당황을 담은 얼굴로 트레일을 바라보자 트레일은 개구진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오스카, 우린 너에게 네 꿈을 강요하지 않았단 것을 기억해봐.”
“....!”
“너는 네 자신을 스스로 파악하고 기사가 되기보다 황실의 보좌관으로 길을 돌렸어. 맞지?”
“.... 네.”
“그럼 보좌관의 일은 어때? 네 본래 꿈이 아니라서 어려웠니?”
“....”
그나마 존재하는 제 재능을 갈고 닦아 하게 된 황실의 업무는 몹시도 어려웠지만 동시에 재미있었다.
정리되어가는 서류와 완벽해지는 업무 마무리가 스스로도 대견할 정도였으니까.
오스카는 작은 고민 끝에 나직이 대답했다.
“즐거워요...”
“그래?”
“... 네.”
“정말로?”
“... 네!!”
“진짜? 진짜?”
“네!!!”
“으이그 욘석아!!”
점점 확고해지는 대답에 트레일이 결국 시원하게 웃으며 오스카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그리곤 보다 단호한 말투로 오스카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기사에게 마력은 중요하지. 하지만 네가 하는 일은 마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어.”
“!!”
“그거 정말 대단한 거야.”
“....!!”
“지금 네가 하는 일들도, 네 존재도 아빠랑 엄마한테는 자랑이야.”
“아버지...”
“그런 고민을 혼자 떠안고 뭐했대? 다음부터는 그러지마!”
트레일의 짓궂은 말에 오스카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담겼다.
“네....!”
“하하하! 오늘은 기분도 좋은데 같이 이러고 잠이나 잘까?!”
“정말요?”
“당연하지! 헤일리도 오스카도 나한테서 못 벗어나!”
“하하하!!”
트레일의 든든한 품에서 오스카의 가슴에 온기가 불었다.
단란한 가족의 지탱에 의해 오스카의 거친 파도는 잠잠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