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테리의 가족
테리는 제국의 황태자로서 수업을 듣고 검술을 연마하며 황태자로서의 업무를 해결하는 등의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조금씩 더운 바람이 부는 계절의 하늘에 천천히 제 와이셔츠 소매를 올린 테리는 테오가 있을 태양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오늘 했던 일의 업무 결과를 알려드리기 위함이었다.
두꺼운 책을 한 손에 이고 걸어간 테리의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형님!”
“.... 오스카.”
오스카였다.
오스카는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붉은 눈동자를 곱게 휘며 웃었다.
“폐하께 가시는 길이세요?”
“그래. 너는 어디를 가느냐.”
“얼마 전에 귀족들의 사이에 있던 불법 노예건에 대해서 결과가 나온 것 같아서요.”
“그럼 너도 아버지께 가는 길이겠구나. 같이 가지.”
“네.”
테리는 살포시 웃는 오스카를 바라본 후 바로 걸음을 옮겼다.
자칫 냉정해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오스카의 걸음에 맞춰 보폭을 줄이는 부분에서 그의 다정함이 엿보였다.
오스카는 테리와 황제 테오를 도와 제국의 정무를 돕고 보좌하는 곳에서 수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자신과 잘 맞는 진로를 찾아 노력하는 오스카의 모습을 테오와 트레일이 무척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고 말이다.
테리도 말은 하지 않으나 그런 오스카를 향해 순순히 감탄하고 있었다.
13살의 나이에 저런 업무를 처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수업이나 정무일은 어렵지 않더냐.”
“좀 어려워요. 하지만 배우는 재미도 있더라고요.”
“다행이구나.”
“형님은 검술까지 배우시니 더 힘드시겠죠.”
걱정스런 오스카의 목소리에 테리의 붉은 눈이 다정히 빛났다.
“어렵지 않다. 늘 해왔던 일이니까.”
“늘 해오던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라고 했어요. 힘들 때는 잠깐이라도 쉬는 것이 좋다고도 했고요.”
“작은 아버지의 말씀이시구나.”
“하하하 네, 맞아요.”
“멋지신 분이시지. 좋은 말 고맙다.”
오고 가는 다정한 대화 속에서 두 사람은 어느 덧 태양궁의 입구에 들어섰고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정말 낯설게도... 태양궁의 입구에 서성이던 시종이 자신들을 당황하며 바라보는 것이 그 이유였다.
테리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왜 나와 있는 거지?”
“저, 전하....!”
“.... 아버지를 뵈러 왔다. 집무실에 계시느냐.”
“황제폐하께서 지금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
테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아버지는 함부로 제 할 일을 내버려두고 나가실 분이 아니셨다.
무슨 위험한 상황이 생기거나, 더욱 급한 볼일이 생긴 탓일 것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실은.... 대공부인께서 아프시다는 서신이 도착해 급히 스페라도 대공저로 향하셨습니다.”
“.... 뭐라?”
“어, 어디가 아프신 거죠?!”
시종의 말에 창백해진 것은 테리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서있던 오스카마저 창백한 낯으로 시종에게 묻자 시종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정확한 병명은 적혀있지 않아 알 수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스페라도 대공저의 서신이 또 전달되거든 나에게 보고하도록.”
“네 전하.”
“아버지가 오셔도 전달을 해야 할 것이다.”
“네. 전하.”
시종이 깊게 고개를 숙이자 테리는 그대로 태양궁에서 멀어졌다.
오스카도 그를 따라 뒤를 돌아가자 테리가 나직이 말했다.
“고모께서 아프신 적이 잘 없으신데 걱정이구나.”
“그러게요... 대공저로 가보실 생각이신가요?”
“아버지께서도 황성에 없으신데 그럴 순 없지.”
“전 어머니께 가서 말씀을 드려봐야겠어요.”
오스카의 말에 테리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오스카가 다급히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본 테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프시다고...?’
제 고모가 아프다는 소식이 너무도 걱정스러웠다.
약이라도 보내드려야 하는 건 아닐까?
어머니는 이 소식을 들으셨을까?
자신만큼이나 그녀를 생각하는 제 어머니도 분명 걱정을 하셨을 것이다.
테리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하자 바로 발걸음을 황후의 달궁으로 옮겼다.
쾅!!!
“이 인간이 진짜아아!!!”
황후의 집무실에서의 거대한 소음은 다행스럽게도 방음이 훌륭한 구조 덕분에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클로비스는 분에 이기지 못한 표정으로 이를 악 물었다.
세린이 아프다는 이야기도 전하지도 않고 저 혼자 홀라당 그녀의 간호를 하러 간 제 남편의 탓이었다.
‘오기만 해봐라....!’
클로비스의 초록빛 눈동자가 분노에 불타올랐을 때, 정갈한 노크소리가 방을 울렸다.
똑똑
“황후마마,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테리가? 들어오라 하렴.”
아주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들리는 시종의 말에 클로비스가 약간 놀란 눈으로 대답했다.
그 아이가 왜? 지금은 올 시간이 아닌데?
클로비스가 의문을 표할 때, 테리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분홍빛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그의 붉은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누구의 아들인지 참 잘났다 싶었다.
“어머니.”
“테리. 어서 오렴.”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인사를 한 테리가 숙인 고개를 올렸고 클로비스도 다정히 미소를 지었다.
뭔가 저 아이가 이 시간에 자신을 찾은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테리는 클로비스의 미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모께서 아프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역시나...’
“나도 방금 소식을 들었단다. 다행히 감기라고 하는구나.”
“.......”
클로비스의 대답에서 다행스런 결과를 들었는지 테리의 딱딱한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리고 그 모습이 참 귀엽다고 클로비스는 생각했다.
“아버지께서도 고모님을 뵈러 자리를 비우셨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
우드득
클로비스가 쥐고 있던 펜이 조각조각이 났다.
속에서 끓어오는 배신감에 신물이 났다.
‘나도 세린을 못 본지 한참인데...!!! 쌍둥이들을 못 본지 한참인데에!! 리아를 못 본지 한참인데에!!’
그 이유는 단순했고 말이다.
테리는 제 어머니의 분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작은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예상했던 반응 그대로라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클로비스는 테리의 미미한 웃음을 바라보며 가슴을 진정시켰고 이내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는 우리끼리만 가자.”
“네?”
“우리 둘만 대공저로 고모 보러 가자꾸나.”
“.....!”
테리의 볼이 아주 미세하게 붉어졌다.
나름 좋아하는 중이었다.
그런 아들이 귀여워 클로비스가 다정히 웃을 때 황후의 집무실에 또 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똑
철컥
망설임 없이 문을 여는 소리도 함께 말이다.
“....?”
클로비스의 눈이 가늘어졌고 테리의 눈도 동그랗게 변했다.
“클로비스.”
그 사람은 제국의 태양이라 불리는 황제.
즉 테오 레바스찬이었으니까.
그의 등장에 클로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한 손을 올리며 물었다.
“저한테 무슨 말을 들으려고 대공저에서 바로 이리로 왔나요?”
“잘 아픈 적 없던 아이라 걱정이 되었어.”
“결과는요.”
“세린에게 쫓겨났지.”
“꼴좋네요!”
클로비스의 코웃음에 테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담겼다.
“테리도 있었구나.”
“고모는 괜찮으신가요?”
“그래, 열은 아직 높은 것 같지만 금방 내릴 것 같더구나.”
“.... 다행이에요.”
테리의 마음에 안도가 불었고 클로비스는 날카롭게 말했다.
“나도 세린이 걱정됐는데요!!”
“열이 내렸다고 소식이 오거든 함께 가지.”
“테리랑 둘 만 갈 거예요!!”
“흠....”
테오의 입가에 미소가 담기자 테리는 살짝 뒤로 물러났다.
여기나 저기나 둘 다 위험한 분위기였다.
“당신은 기억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뭐, 뭐가요...?”
“내가 당신에게 약혼을 부탁했을 때의 그 집념을 다시 보여줘야겠군.”
“!!!!!”
클로비스의 눈이 커지며 이내 다급히 테리를 향해 달렸다.
그리곤 테리의 손을 어깨를 붙잡으며 외쳤다.
“테리랑 약속했다고요?! 둘.만. 다녀오기로!”
“흐음...”
테오의 입가에 미소가 진해졌다.
그는 두 팔을 올려 팔짱을 끼며 곱게 눈을 휘고 말했다.
“테리에게 선택을 해보라 해야겠군.”
“좋아요!! 테리! 어머니니 아버지니?!”
“......”
“테리이?!”
두 사람은 꼭 만날 때마다 나이가 어려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테리는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며 이 유치하고 미운정이 넘치는 상황이 빨리 해결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폐하!!”
그 상황은 빠르게 다가왔고 말이다.
시종들이 무지막지하게 들이닥치며 테오를 찾아 두 팔을 들어올렸다.
“폐하...!!! 한참 찾았습니다!!”
“......”
“밀린 업무가 아직 있으십니다!! 자리를 갑자기 이리 비우시면 저희로서는 처리할 서류들이....”
“후.... 가지.”
테오의 눈이 부드럽게 감겼다가 뜨며 이내 긴 다리를 걸어 앞으로 나아갔다.
클로비스는 그런 테오를 바라보다가 이내 아름다운 미소를 흩뿌리며 말했다.
“몸 건강 챙기면서 하세요 폐하.”
“......”
가히 가식적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 맑은 미소였다.
테오는 그런 클로비스를 바라보다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시종들을 향해 말했다.
“잠시 황후와 이야기를 하고 오지.”
“폐, 폐하?”
“잠시면 된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테리는 서둘러 문 밖으로 나갔다.
아까전과 같은 난처한 상황은 더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테오의 넓은 등 뒤로 황후 집무실의 문이 굳게 닫혔고 닫히기 전 클로비스의 얼굴에 잔뜩 당황이 서렸다.
철컥
“......”
그리고 잠시 뒤... 집무실의 부드럽게 문이 열렸고 환한 표정의 테오가 테리를 향해 말했다.
“보고를 올릴 것이 있을 것이다. 같이 가자꾸나.”
“네, 아버지.”
긴 다리를 좁게 뻗어 테리의 걸음 폭에 맞춘 테오는 만족스런 미소를 입가에 가득 담았다.
테리의 눈이 살짝 집무실 문 뒤편을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제 어머니의 뒷모습이었고 그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그녀의 잔뜩 달아오른 귀였다.
테리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담겼다.
사이가 좋은 부모님의 모습은 늘 보기 좋았다.
다만 두 분의 유치한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