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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191화 (190/218)
  • 191화. 기다림의 약속

    황제의 허락에 기사들의 축제가 된 결혼식 후의 분위기는 왁자지껄 그 자체였다.

    “야!! 더 부어!!”

    “저것도 저거!! 도수 장난 아니라고?!”

    “........”

    리사의 눈이 질린 기색을 띄었지만 내심 그 소란스러움과 우렁찬 목소리들이 참 정겨웠다.

    리사는 웃기지도 않다는 듯 비웃음을 띄며 물었다.

    “너네 신나 보인다?”

    “우하하!! 신나기는요!! 할 수 없이 만드는 거예요 할 수 없이!”

    “..... 웃기는 새끼들이네 이거?”

    그렇다.

    우습게도 지금 이 상황은 제 2기사단들의 축하 폭탄주 제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잘 취하지 않는 최강의 신체를 지니고 있는 리사만을 위한 폭탄주는 마시는 컵부터가 남달랐다.

    이엔의 상체만한 거대한 컵에 콸콸콸 담아 지는 술들의 행진을 말없이 바라보는 리사의 눈이 썩어갔다.

    작정 했네 아주...

    결혼식 후 편한 와이셔츠와 검은 바지 차림으로 나타난 리사와 이엔은 부부의 티를 팍팍 내는 같은 옷으로 한숨을 쉬었다.

    다부진 이엔의 체격에 맞는 하얀 와이셔츠가 이엔에게 몹시도 잘 어울렸고 리사마저 그 하얀 셔츠가 너무도 잘 어울렸다.

    이엔이 난처한 얼굴로 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리사님, 무리하지 마세요. 차라리 제가 마시겠습니다.”

    “우우우우!! 백작님! 그러지 마세요!”

    기사들의 야유가 이어지자 이엔이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폭탄주로 그녀를 죽일 생각이냐.”

    “백작님... 이걸로 단장님께서 죽으셨다면 진즉에 가셨을 겁니다.”

    “.......”

    부단장의 장난스런 말에 이엔이 차마 반박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예전, 그녀가 식권을 따겠다고 축제 때 들이킨 술의 양만해도 어마어마했으니까.

    이엔의 걱정에 리사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 술 먹고도 멀쩡하면 두고 보자 이것들아.”

    눈은 살벌했지만 말이다.

    “너네도 오늘 이 폭탄주 마시고 뻗을 테니까 각오해.”

    “헉!!!”

    이번 리사의 지옥행은 2시가단의 기사들일지도 몰랐다.

    리사는 그 말을 끝으로 망설임 없이 한 손으로 잔을 잡았고 이내 벌컥벌컥 폭탄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술이 들어간다! 쭉쭉쭉쭉!!!”

    “와아아악!!!”

    “원샷!! 원샷!!”

    기사들의 힘찬 응원과 동시에 그녀의 잔이 거대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올려졌다.

    쾅!!!

    “크아!!!”

    잔에는 단 한 방울의 술도 남아있지 않았다.

    “와아아!! 단장님 원 샷 했어!!”

    “이야!! 단장님 멋지십니다!!”

    “대박!!!”

    ‘좋아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기사들의 축제를 지켜보던 테오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리사를 바라보았다.

    이엔도 슬금슬금 그녀에게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그녀의 눈이 화로마냥 불타오르고 있었다.

    “자, 이제 누구냐.”

    기사들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리사는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살벌하게 웃었다.

    “내 술잔을 받을 영광을 껴안게 될 자식들은?”

    “끼아악!!!”

    테오와 이엔은 와인을 홀짝이며 눈을 피했고 리사는 그대로 기사단들의 사이로 뛰쳐 들었다.

    “상사의 술에 거절은 없다!!!”

    “사, 살려주세요!!”

    끔찍한 사회관계였다.

    *

    “속은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없고요?”

    “응! 없어.”

    테오가 잡아준 황성의 방으로 이동하는 신혼부부의 뒷모습은 무언가 부부답지는 않았다.

    일단 이엔의 어깨에 한 팔을 올리며 부축을 받은 리사는 얼큰하게 취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고 그런 리사를 부축하는 이엔은 얼굴에 당황스러움과 걱정이 가득했으니까.

    누가 보아도 취한 상사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아랫사람의 모습이었다.

    “리사님, 방에 도착했습니다. 일단 씻고 주무세요.”

    “씻어?? 아니지! 그릇은 씻어야지!!”

    “네, 그릇은 씻어야지요. 리사님은 지금 몸을 씻어야 하고요.”

    “내 몸?? 맞아 봄! 봄에는 꽃이 피지!”

    “......”

    새삼 그녀와 제가 같은 세계의 언어를 사용하여 대화하는 게 맞는지 궁금해졌다.

    ‘일단 가만히 있자.’

    ‘얼른 씻기고 얼른 재우자.’

    그런 생각을 하며 이엔이 서둘러 방문을 열었고 그대로 리사를 침대에 눕히려 몸을 움직였다.

    팍!!!

    “윽!!”

    리사가 그대로 이엔의 몸을 돌려 벽치기를 시전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순식간에 리사의 두 팔에 가둬진 이엔은 등에 닿은 벽에 의지하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달빛을 받은 리사의 눈동자가 가늘어져 있었다.

    “야...”

    “리사님?”

    “야, 너.”

    “아, 네...”

    이엔이 고분고분 대답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술 냄새가 풍겼지만 그 냄새마저 달콤하게 느껴졌다.

    이엔은 마른 침을 삼키며 눈을 돌렸다.

    리사는 이엔이 시선을 돌리자마자 그의 턱을 쥐고 확 고개를 제 쪽으로 당겼다.

    “눈 어디다 돌려?”

    “우...!”

    “건방지게 말이야... 날 똑바로 봐!”

    “우우...”

    리사의 손아귀에 의해 볼이 꾹 눌린 이엔의 입술이 저절로 삐져나왔다.

    리사는 그 광경을 풀린 눈으로 보다가 집어 삼키듯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마주 대었고 멈추기 어려운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깊어지는 입맞춤에 이엔이 눈을 질끈 감았고 리사는 그를 엎어치기하듯 침대로 눕혔다.

    털썩!

    하얀 침대 위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의 위로 리사의 은발이 섞였다.

    이엔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리사를 바라보았다.

    인내심과 참을성의 한계가 다가왔다.

    “리사님. 일단 진정을...”

    “야.”

    “.......?”

    리사의 푸른 눈이 정직하게 이엔 만을 바라보았다.

    “너 누가 이렇게 잘 생기래?”

    “....!!!”

    이엔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너 누가 이렇게 다정하래!”

    “리, 리사님...”

    “누가 응? 이렇게 잘 웃고 엉?? 예쁘고 앙?!”

    “.......”

    이엔은 이 민망한 기억을 부디 그녀가 아침에 기억하기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리사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인 사랑할 수 없잖아 이러면...”

    “!!!!”

    “결혼했지 우리?”

    “.... 네... 했습니다.”

    “너 임마! 그러면 이제 못 벗어나는 거야!”

    “......”

    그 말에 이엔이 맑게 웃었다.

    “그건 다행이네요. 벗어나고 싶지 않거든요.”

    “..... 이씨...”

    처음 보는 취한 그녀의 모습은 참 귀엽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엔이 부드럽게 웃자 리사가 꿍얼거리며 말했다.

    “부부는 임마, 그거야 그거!”

    “네??”

    “뭘 해도 용서가 되는 거라고.”

    “무슨....”

    투둑!

    리사가 천천히 제 와이셔츠 단추를 풀었다.

    이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리사는 묘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결혼했으니 넌 내 거잖아?”

    “리, 리사님?”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어주지.”

    훌렁!

    리사가 상의를 벗어던졌다.

    아름다운 여인의 곡선 속에는 단단한 근육도 잡혀 있었다.

    “리, 리사님?!!”

    이엔의 얼굴이 잔뜩 붉어지며 다급히 제 두 팔로 얼굴을 가렸으나 리사는 그의 두 손을 꾹 붙잡으며 말했다.

    “잡아먹는다고 했지 내가?”

    “끄아!!!”

    리사가 이엔을 향해 달려들었다.

    허공에 옷가지들이 휘날렸고 질척이는 소리가 조용히 방을 울렸다.

    이엔은 첫날밤에 야수에게 덮쳐졌다.

    *

    리사의 결혼식 후에 대공저로 돌아가기 전, 앤젤라는 데미언과 짧은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제이의 눈이 화르륵 타올랐으나 세린의 만류 아닌 만류에 시간을 내어주게 되었고 말이다.

    데미언은 앤젤라의 옆을 천천히 걸어 나가며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앤젤라는 그의 옆에서 소리도 없이 절망했고 말이다.

    ‘바보였어...! 왜 갑자기 그런 고백을 내뱉은 거야?!’

    창피했고 동시에 서글펐다.

    마음을 숨길 생각도 없었지만 그가 건넬 거절의 말이 두려워 진심을 전할 생각도 가지지 못했었다.

    ‘이제 오빠 얼굴을 어떻게 봐야하지...?’

    슬펐다.

    이제 영영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앤젤라가 안절부절 못할 때 데미언이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앤젤라님.”

    “..... 네...”

    “앤젤라님의 그 말씀은...”

    데미언의 청록색 눈동자가 앤젤라를 온건히 담았다.

    “어떤 의미입니까.”

    “.....”

    “제가 아는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데미언이 자리에서 멈추고 물었다.

    “하나는 같은 사람으로서 느껴지는 정.”

    “......”

    “둘은 이성으로서 느껴지는 애정.”

    “......”

    “어떤 의미 입니까. 제가 어떻게 받아드려야 합니까.”

    앤젤라가 입술을 굳게 깨물었다.

    그냥 정이었다고 한다면 앞으로도 그와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는 제 마음에 대해 좋아한다고 표현하기 어려워질 것이었다.

    앤젤라는 고개를 숙여 땅만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좋아해요.”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데미언 오빠를 좋아해요. 이성으로...! 이성으로서 오빠를 좋아해요!”

    “...!!!”

    데미언의 눈이 커졌다.

    여린 소녀의 눈물진 고백은 그를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데미언은 훌쩍이며 눈물을 참으려는 앤젤라를 멍하니 바라보가가 아주 천천히 제 손을 뻗었다.

    그리곤 제 손바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앤젤라님을 잡아주지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 네?”

    “제 손에는 저주가 있습니다.”

    “...!!”

    데미언의 눈이 서글프게 빛났다.

    “생명을 죽이는... 그런 저주요.”

    앤젤라는 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미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서 앤젤라님께 다가가기 무서웠습니다. 장갑으로 보호하곤 있다고 해도 저주가 새어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 따위는 없으니까요.”

    “.... 데미언 오빠.”

    “하지만... 오늘 그 분의 결혼식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같은 어둠술사였으나 그는 제 행복을 찾았다.

    생명을 죽이는 저주를 두 손에 담고도 사랑하는 이의 손을 굳게 붙잡을 수 있던 그가 몹시도 아름다웠다.

    자신도...

    그래, 자신도 그처럼 이 저주를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렇다면 이 작은 소녀의 손을 굳게 붙잡아도 되는 것이었다.

    데미언은 앤젤라의 손을 붙잡지 못했으나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깃털이 내려앉은 것 같은 가벼운 입맞춤이었다.

    “!!!!”

    앤젤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고 데미언은 말했다.

    “제가 이 힘을 완벽히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때까지 기다려주세요.”

    “......”

    “그땐 제가 먼저 앤젤라님께 고백하겠습니다.”

    “!!!!”

    애틋한 기다림의 약속에 앤젤라의 눈이 커졌다.

    두 사람의 고백은 몇 년 후, 다시 이어질 것이었고 그때는 다른 결과가 나타날 것이었다.

    그때는 두 사람 모두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마주 잡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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