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굳건한 약속
테오와 트레일, 로레인이 정해준 그들의 결혼식장은 황성에서 제일 크고 화려한 연회의 홀이었다.
리사와 이엔을 위해 더욱 아름답게 꾸며진 홀에 맛있는 음식들과 수많은 의자들이 들어와 장식되고 있었다.
그들을 축복해줄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그 장소는 사람들의 손길에 더욱 화려해져갔다.
리사와 이엔 또한 꾸며지는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리사는 제 얼굴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붓의 감촉을 느끼며 입술을 달싹였다.
얼굴이 두꺼워지는 기분이라 굉장히 불편했다.
그런 그녀의 기분이 표정에 그대로 보여 지고 있어 화장을 해주던 세린과 메리가 키득키득 웃었다.
메리가 부드럽게 리사의 볼에서 붓을 떼며 말했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으렴. 오늘은 중요한 날이지 않니.”
“얼굴이 두꺼워진 것 같은데요...”
“철판 깔고 할 말 다 하는 애가 내뱉을 말은 아니네.”
“그거랑 이거랑 같나요!”
“소리 지르지 마, 화장 무너져!”
“무너지면 좀 어때요.”
“이엔에게 못생겨 보이고 싶은 것이라면 더 관여 안 하마.”
“.......”
리사의 입을 꾹 다물게 만드는 한 줄의 말이었다.
리사는 입술을 꾹 다물고 게슴츠레 뜬 눈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맑은 하늘 아래에 황성으로 들어오는 수많은 마차들이 시선을 강탈했다.
“.... 많긴 많네요.”
“고마운 일이지. 다 너와 이엔을 위해 온 것이잖니.”
트레일의 의견에 의해 이번 두 사람의 결혼식에는 기사들만이 입궐하였다.
이엔과 리사 둘 다 기사이니만큼 정을 아끼지 않고 나누었던 기사단들과 동료들이 초대된 것이었다.
리사는 그런 그들의 배려에 참 마음에 감사함을 담았다.
이엔이나 자신이나 다른 귀족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했으니 말이다.
문뜩 이엔에게까지 생각이 닿자 리사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 바보랑 이제 서야 결혼이라니...’
참 오래도 걸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를 위해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을 때 청혼하려던 자신의 계획은 이엔마저 같은 생각을 한 그 순간부터 틀어져있었다.
그 틀어진 계획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말이다.
세린은 나직이 웃음 짓는 리사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리사.”
“네.”
“난 리사가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엔도 마찬가지고.”
잔잔한 고백이었다.
“두 사람 모두 나한테는 정말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리사가 멀리 떠나는 것도 아닌데 우습게도 눈물이 고일 것 같은 기분에 세린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리사는 그런 세린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웨딩드레스를 펄럭이며 세린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전하도 제게 소중한 사람입니다.”
“... 하하하! 알아 리사.”
“제가 자기 행복을 못 찾은 녀석 같습니까.”
“응? 절대 아니!”
그녀의 말에 세린이 당황하자 리사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행복할 자신이 있습니다.”
“리사...”
“이엔도 같은 마음일 것이 확실하고요.”
“저희들을 축복해주는 첫 번째 사람이 전하라서 기쁩니다.”
리사가 맑게 웃으며 말하는 기쁘다는 한 마디에 세린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리사 행복해야 해.”
“네 전하. 아니...”
리사의 눈이 곱게 휘었다.
“언니.”
*
“제국을 위해 헌신하며 피와 땀을 흘려 노력하던 리사 도베로만, 이엔 프레제의 결혼식을 시작하겠다.”
하늘에 꽃가루가 날렸고 기사들의 우렁찬 박수가 홀을 울렸다.
“먼저 신랑이 입장하겠다.”
화사한 붉은 카펫 위로 쌓여가는 꽃 잎이 아름다웠다.
이엔은 주례를 위해 붉은 카펫 끝에서 그를 기다리는 테오를 향해 걸어갔다.
기사의 단호한 발걸음이 부드럽게 카펫을 밟아 나갔다.
검은색의 턱시도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모습에 저절로 눈이 부셨다.
어느 덧 테오의 앞으로 도착한 이엔을 향해 테오가 말했다.
“이엔 프레제.”
“네.”
“그대가 여태 우리들을 위해 노력한 모든 것들을 잊지 않았다.”
“...!!”
“우린 네 행복도 중요하다는 소리다. 행복할 자신이 있나.”
이엔의 금빛 눈동자가 테오를 향했다.
테오의 붉은 눈동자에서 띄어진 진심에 이엔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밝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신 있습니다.”
“좋다.”
테오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담겼다.
“신부를 부르겠다. 신부입장.”
웅장한 문이 활짝 열렸다.
세상의 모든 빛이 그곳으로 쏟아져 모인 듯 했다.
하얀색의 웨딩드레스는 아름답게 펄럭였고 환한 은발은 곱게 위로 틀어 올려서 가녀린 목의 선이 시야에 띄었다.
아인의 팔에 손을 올리고 빠르게 성큼 성큼 걸어오는 것만 아니라면 시선을 돌리지 못했을 것이었다.
저 정도 속도라면 분명 구두를 안 신고 왔을 가능성이 컸다.
이엔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제게로 올곧게 다가오는 리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아인은 성큼 걸어 나가는 제 딸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급한 것이냐.”
“급하죠, 쟤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허어....”
병이다 병.
어이가 없다는 듯 리사를 바라본 아인이 결국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제 팔을 붙잡은 딸의 손에 제 손을 겹치며 말했다.
“잘 살거라.”
“새삼스럽게 왜 그런데요.”
“이제는 내 딸로 불리는 게 아니라 이엔의 아내로 불릴 테니까 말이다. 네가 아내로 불리기 전, 너의 아버지로서 하는 말이다.”
“.....”
“잘 살거라.”
아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본 리사가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그거면 된 거지.”
아름답게 웃고 있는 이엔을 향해 아인이 잡고 있던 리사의 손을 건네었다.
“행복하게 해 주거라.”
“네. 장인어른.”
“물어뜯기지 않게 조심하고.”
“큽...”
아인의 농담 아닌 진담에 이엔의 눈에 웃음꽃이 피었고 리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이엔의 손이 리사의 고운 손을 붙잡았다.
굳은살이 박혔으나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손이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애쓰던 그녀의 손을 한 번 쓸어본 이엔이 자신을 향해 근사하게 웃는 리사를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참 행복하다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만을 바라보며 살 것을 맹세하는가.”
“네.”
“네.”
“두 사람은 서로의 행복을 위해 노력할 것임을 맹세하는가.”
당연한 말이었다.
“네.”
테오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담겼고 이내 다정히 말했다.
“그럼 이후로부터 두 사람이 부부임을 짐이 인정하겠다. 맹세의 키스를.”
이엔과 리사의 얼굴이 마주쳤다.
리사는 살포시 웃는 이엔을 키득키득 웃으며 바라본 후 나직이 속삭였다.
“이엔.”
“네.”
“나 기사부츠 신었다?”
“풉!!!”
참 엉뚱한 말이었으나 여파는 컸다.
이엔은 참으려던 웃음을 결국 맑게 터트렸고 이내 부드럽게 리사의 얼굴에 제 손을 올리며 물었다.
눈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
“키스해도 됩니까.”
“응.”
늘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대답이지만 오늘따라 유독 애틋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마주 닿았고 우렁찬 축복의 함성이 홀을 가득 울렸다.
“와아아아아아!!!!”
“단장님 행복하세요!!”
“프레제 백작님 화이팅(?)!!!”
그래, 너무도 행복한 시작이었다.
가까이서 두 사람의 결혼식을 바라보던 세린이 환히 웃으며 박수를 쳤고 제이는 그저 그런 세린이 사랑스럽다는 듯 웃고 있었다.
“제이!! 너무 감동적이에요!!”
“그렇군요.”
“리사 너무 예쁘죠?? 이엔도 턱시도가 정말 잘 어울려요!”
“동감합니다.”
어울리기는 참 잘 어울린다 싶었다.
제이는 행복해하는 이엔과 리사를 바라보다가 이내 제 앞에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순서대로 레기, 에드, 플로리아가 앉아 있었고 바로 뒤로 앤젤라와 데미언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세린의 초대로 온 데미언과 베르였지만 베르는 개인 일이 바빠 참석하지 못해 데미언만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점이 제이에게 크나큰 위기감을 주었고 말이다.
데미언을 바라보는 앤젤라의 눈빛이 수상하다.
저 아름다운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뭐지....’
설마 저 아이를?
제이의 눈이 가늘어지며 저절로 데미언을 바라보았다.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지만 환한 백금발이 참 아름답다 싶었다.
그러나 제 딸의 분홍빛 머리카락은 더 아름다웠고 더 눈부셨다.
‘설마?’
애써 부정하며 제이가 세린의 손을 잡고 물었다.
“세린.”
“네?”
“앤젤라 옆에 있는 대신관의 아들은 어떤 아이인가요?”
“어....”
세린이 눈을 데굴데굴 굴려 데미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이내 맑게 웃으며 말했다.
“예의도 바르고 다정한 친구 같아요. 얼마 전에는 앤젤라가 걱정된다고 기도도 다 못하고 찾아온 적도 있는걸요.”
“.......”
“머리가 다 흐트러질 정도로 달려온 것 같더라고요.”
제이의 머릿속에 위험신호가 울렸다.
그저 걱정이 된다고 찾아왔다고?
아니 달려왔다고?
우리 딸을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사랑받아 마땅한 예쁜 딸아이지만 벌써부터 생기면 곤란했다.
제이의 눈이 점점 싸늘하게 데미언을 바라볼 무렵 앤젤라는 자신의 옆에 앉은 데미언을 바라보다가 이내 리사와 이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고모는 너무도 행복하게 웃고 있었고 이엔 또한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가슴이 따뜻해질 만큼 아름다운 모습들이었다.
‘예쁘다...’
두 사람이 어떤 기분일지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았다.
얼굴에서부터 느껴지는 저 행복이 남들에게도 보일 정도이니 말이다.
“예쁘십니다.”
“네??”
데미언의 나직한 말에 당황한 앤젤라가 황급히 말했다.
“맞아요, 고모는 정말 예쁜 분이세요!”
“아뇨, 도베로만 백작님뿐이 아닌 두 분의 모습들이요.”
“...!!”
“참 예쁘십니다.”
데미언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담겼다.
그 미소에 앤젤라의 가슴이 요동쳤다.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데미언에게... 아름답게 웃는 데미언을 향해 갑작스럽게도 그동안 꾹 억눌렀던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앤젤라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열었다.
“좋아해요.”
“......”
데미언의 청록색 눈이 커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앤젤라를 바라보았고 앤젤라는 다시 한 번 고백했다.
“좋아해요 데미언 오빠.”
그를 향해 휘몰아친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여전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