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괴물의 귀환
트레일은 1기사단들의 훈련을 살펴보려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푸른 하늘을 둘러보지도 않고 익숙해진 풍경들 사이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걷는 속도가 남달리 빨라서 뛰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던 그의 눈에 더욱 익숙한 사람을 발견하자 바로 걸음을 멈췄다.
“아버지?”
에드윅이었다.
에드윅은 황성의 복도에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자신을 부르는 트레일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트레일.”
“아버지, 여기서 뭐하세요?”
“산책을 나가려 했다. 넌 어디를 가느냐.”
“기사단들 훈련 좀 살펴보려고요. 아직 시간 있는데 같이 산책이나 갈까요??”
트레일의 눈이 반짝였다.
기사단 훈련보다 에드윅과의 산책이 더욱 가고 싶은 눈빛이었다.
에드윅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급한 일이 아니었느냐.”
“급했으면 달렸죠! 전혀 안 급해요. 같이 산책가요!”
“그렇다면 정원만 한 바퀴 돌고 가자.”
“네, 네.”
트레일이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즐거워하자 에드윅의 입가에 미소도 짙어졌다.
자신과 산책을 가는 것이 그리도 좋을까 싶었다.
“아버지, 오늘은 일 많이 없어요?”
“황제도 아닌데 내가 일이 많아봤자 얼마나 많다고.”
“그래도 항상 제가 찾아가면 일이 많았잖아요.”
“네가 일하는 그 시간만 찾아와서 그렇지 않느냐. 그 시간대는 업무를 보는 시간이다.”
“아! 그럼 한 시간 뒤로 찾아가야겠네요. 난 또.... 엄청 바쁘셔서 얼굴도 못 뵈고 사는 줄 알았어요!”
“엉뚱하기는...”
에드윅의 미소에 트레일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활짝 웃는 얼굴로 물었다.
“아버지,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흠?”
“뭔가 평소랑 다르셔서요.”
기분이 좋은 듯 보이면서도 좋지 않은 듯 보이는 에드윅의 모습에 트레일이 눈을 굴렸다.
에드윅은 그런 트레일의 말에 입술을 꾹 다물다가 이내 잔잔히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
“좋은 일이 있었지.”
제 남아있는 여생을 뒤흔들 만큼 좋은 일이자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일.
“우와, 뭔데요?? 무슨 일인데요?”
“말 안 해줄 것이다.”
“엑! 너무해요!”
궁금해 죽겠다는 트레일의 모습에 에드윅은 코웃음을 치며 앞으로 걸었다.
말해줄 수 없거니와 해줄 마음도 없다.
그 이야기가 그에게 상처가 되고 가슴 아픈 일이 될 것이라는 건 뻔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이야기는 제 가슴 속에만 담아두고 싶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자연스럽게 에드윅의 머릿속에 두 명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로레인, 앤젤라.
그 아이들은 아리엘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했다.
지금쯤 얼마나 쓰린 가슴을 껴안고 있을까.
에드윅의 발걸음이 천천히 멈췄다.
“.......”
“아버지? 왜 그러세요?”
누구보다 궁금할, 누구보다 슬퍼할 그 아이들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에드윅은 고개를 돌려 트레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 바퀴 끝났구나. 이제 기사단에 가 보거라.”
“엑!!! 벌써!!”
“나도 업무를 하루 가야하니 투정은 그쯤 해 두거라.”
“칫... 그럼 내일은 더 오래 해요 우리.”
“다 늙은 아비랑 산책 가는 것이 뭐 그리 좋다고...”
“늙기는 개뿔!... 이 아니라, 아버지가 좋으니까 그렇죠!”
“.......”
‘네 성격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아리엘이었나 보구나.’ 에드윅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늙기는 개뿔... 당신 하나도 안 늙었어요.’
그녀도 제게 그리 말했지 아마...
에드윅은 잔잔히 웃으며 이내 트레일을 향해 말했다.
“저녁시간에 보자꾸나. 오늘 내가 좀 바빠서 말이지.”
“알겠어요... 다음에도 산책 혼자 나가지 마시고 저랑 해요!”
“알겠다.”
“진짜에요?! 알았죠?”
“알았다니까.”
자신과의 산책을 신신당부하며 떠나가는 트레일을 물끄러미 바라본 에드윅이 이내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못말리는 막내아들이었다.
에드윅은 그런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로레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를 위로해줄 때였다.
*
트레일은 멀어지는 에드윅의 커다란 등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였다.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
하루아침에 분위기가 저리도 달라지니 이제는 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망설임 없는 제 아버지의 발걸음이 예전에 보였던 고독이 보이지 않아 그 걱정도 금방 사라졌다.
“저녁에 보자고 하셨으니... 빨리 일부터 끝내야겠다.”
저녁에 여유로워지려면 지금 기사단의 훈련을 빨리 점검하고 테오를 만나 지난번의 회의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트레일은 에드윅이 향했던 방향의 반대로 몸을 돌려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가 걸어 나가는 한 걸음마다 검은 색의 제복에 달린 금색의 배지들이 휘날렸다.
“에헤이 이렇게 바쁜 건 내 체질에 안 맞는데...”
약간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은근히 즐거움을 담았다.
경쾌한 걸음으로 기사단이 있는 훈련장으로 향하던 트레일은 이내 멀리서 느껴지는 한 마력에 그대로 멈췄다.
“..... 뭐야?”
그의 얼굴이 점점 딱딱해지고 이내 재빠르게 훈련장이 아닌 황성의 입구에 세워진 탑으로 달려갔다.
높은 계단을 성큼 성큼 오른 그는 탑의 꼭대기에서 창문을 활짝 열었고 이내 눈에 확고히 보인 장관에 경악했다.
“야이 미친...!!!”
저절로 험한 말이 튀어나온 트레일은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두 팔에 팔짱을 끼웠고 이내 졌다는 태도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진짜 말도 안 되는 녀셕이란 말이지...”
붉은 눈동자에 담긴 묘한 즐거움은 동지를 만난 듯 반짝였다.
그렇다.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거대한 마력의 주인공은 환한 은발을 휘날리고 있었고 푸른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입가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가득한 그녀는 바로 리사 도베로만.
황제의 두 번째 검이자 제국 최초의 여성마스터였다.
먼 산에서부터 기사단들을 이끌고 행군하는 그녀의 모습이 참 당당해보였다.
트레일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이내 탑에서 내려갔고 시종들을 향해 말했다.
“연회를 준비하라고 일러라! 폐하께도 제 2기사단의 행군이 곧 도착 한다 이르도록!”
“네, 전하!”
허겁지겁 사라지는 시종들을 바라보다가 트레일은 점점 짙게 다가오는 그녀의 마력에 투덜거렸다.
“괴물 같은 녀석...”
간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건만 모든 수행과 토벌을 끝마친 것에서부터 괴물이라고 칭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의 귀환은 순식간에 황성으로 퍼졌다.
*
같은 시각, 로레인의 궁.
로레인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에드윅의 모습에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찾아오시니 놀랐네요.”
“아비가 자식을 찾는 것에 이유가 필요하겠느냐.”
“전혀 필요치 않지요. 앉으세요. 마침 꽃차를 마시려는 중이었어요.”
“고맙구나.”
부드럽게 제 손에 쥐여진 찻잔에서 향긋한 꽃의 향기가 은은하게 풍겼다.
에드윅은 꽃향기가 나는 찻잔을 부드럽게 쥐며 나직이 말했다.
“아리엘에게서 들었다.”
“.....”
“다 알고 있었다고...”
로레인의 손이 굳었다.
찻잔을 들어 올리려던 손을 다시 천천히 제 무릎 위로 올린 로레인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있는 에드윅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에드윅은 자신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는 로레인을 향해 나직이 다시 말했다.
“많은 대화를 나눴다.”
“.....”
“많이 웃고 많이 울었어. 그 짧은 시간동안 말이지...”
“......”
로레인의 시선이 천천히 제 손으로 향했다.
에드윅은 점점 고개를 숙이는 제 아들을 향해 확고히 말했다.
“웃으면서 떠났다. 감히 행복하게 갔노라고 단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
그의 말에 로레인은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로레인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이내 나직이 말했다.
“행복하게 가셨다니 다행이십니다.”
“너도 앤젤라도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는 걸 들었다.”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괜찮아요.”
“로레인.”
에드윅이 로레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나직이 말했다.
“넌 어릴 적부터 늘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 버릇이 있더구나. 그 버릇을 아직도 못 고쳤고 말이다.”
“......”
“아리엘에게도 말했지만 네게도 말해줘야겠구나.”
에드윅의 눈이 잔잔히 휘었다.
“고생했다.”
“....!”
“네 엄마를 위해서, 앤젤라를 위해서... 가족들을 위해서 그동안 혼자 고생했어.”
에드윅의 그 잔잔한 한마디가 흘러 로레인의 깊은 가슴에 담겼다.
에드윅은 말없이 그런 로레인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고 이내 그가 쥐여 준 꽃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맛있구나.”
“..... 다행입니다.”
그래, 다행이었다.
그녀가 행복하게 떠날 수 있어서...
제 아버지도 견고해질 수 있어서...
로레인은 잔뜩 가라앉았던 가슴에 온기가 불어옴을 느끼며 천천히 제 차를 마셨다.
평온을 찾아가고 있었다.
제 품에서 놓아줄 수 없었던 어머니를 놓아줌으로서 말이다.
“폐하!! 폐하!!”
“.....?”
밖의 소란스러움에 에드윅과 로레인의 고개가 올라갔다.
“무슨 일이라도 난 것이냐.”
“잘 모르겠네요. 여봐라, 무슨 소란이야.”
로레인의 부름에 문 밖에서 시종의 난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전하. 다름이 아니라 방금 황성의 입구에서부터 소식이....”
“소식?”
“예! 지금 막 2기사단의 기사들과 도베로만 백작님께서 모든 토벌과 훈련을 끝마치고 복귀하는 중이시라고 합니다!”
“벌써?”
로레인의 눈이 커졌고 앞에서 듣고 있던 에드윅의 눈도 커졌다.
“트레일과 경쟁을 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 말 그대로구나.”
“동감합니다. 어디쯤 오고 있다고 전달을 받았더냐.”
“지금 수도로 들어서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
아니 뭔 벌써 수도야?
로레인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으나 이내 서둘러 에드윅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중을 일단 나가야겠지요.”
“그러자꾸나.”
“이리 빨리올 줄 알았다면 미리 연회라도 열 준비를 했을 텐데...”
“아마 트레일이 먼저 확인하고 소식을 전한 것 같네요. 겸사겸사 연회준비도 시켰을 테니 일단 마중부터 가죠.”
“그래.”
두 사람의 서두르는 발걸음 속에서 지난 걱정들과 불안감들이 모두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