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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183화 (182/218)

183화. 준비되지 않았던 일

로라를 그리 내보낸 후 그레고리는 잠시 침묵했다.

옆에서 오다는 그런 그레고리를 보지도 않고 수다를 떨기 바빴다.

“이야.. 요즘 애들 진짜 무섭다. 나 어제 나보고 거지같다고 한 꼬맹이가 얄미워서 걔 손에 있던 장난감을 들고 튀었는데... 그 녀석 나 죽여 달라고 누구한테 의뢰하는 거 아니야?”

“바보 아니냐 너....”

한심한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레고리가 그의 손에 쥔 로브를 오다에게 던졌다.

던져진 로브를 재빠르게 받은 오다가 놀란 눈으로 그레고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장...?”

“저 아이랑 연관되지 않도록 주의해.”

“네??”

“..... 장난감도 내일 안으로 돌려주고.”

“엑! 그건 싫은.... 아니, 대장! 어디가요!”

철컥

그레고리는 대꾸 없이 자신의 업무실로 들어가 굳게 문을 닫았다.

문 밖에서 들리는 작은 소음 모두를 일절 무시하며 긴 소파에 몸을 누인 그레고리는 긴 팔로 두 눈을 가리며 지친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재미없는 인연이었다.

연관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마주할 생각을 더더욱 없었다.

천천히 팔을 올린 그레고리는 푸른 눈을 스르륵 굴려 제 손목에 강하게 박힌 인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단단히 미쳐가고 있던 어린 꼬마가 다시 그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앤젤라 스페라도요.’

다른 누구도 아닌 하필 그 아이에게 원한이 있단 말인가.

그 아이를 죽여 달라고 할 정도면 몹시 깊은 한이 자리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레고리는 그 한이 무엇인지, 미쳐가는 소녀의 정신상태가 어떤지를 파악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 어이없는 상황으로 인해 불똥이 자신에게 튀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레고리는 조금 망설이는 눈으로 인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하얀 마력의 빛이 그의 손에 뭉쳐졌다.

*

앤젤라는 대신전에서 두 손을 모아 제 안에 담긴 마력을 움직이고 있었다.

가다듬을수록 선명해지고 강해지는 태초의 마력이 그녀의 안에 가득 찼다.

앤젤라는 모아진 마력들을 응축하고 응축하여 제 몸 구석에 우겨넣었다.

집중하는 그녀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

베르는 그런 앤젤라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며 웃었다.

갈수록 마력을 사용하는 것도, 많은 영혼들을 인도하는 것도 훌륭하게 해내는 그녀를 보니 가슴에 애정이라는 것이 물씬 풍겼다.

그 작고 어린 소녀가 이만큼 자랐다는 것에 놀랍기도 했다.

“오늘은 그쯤이면 될 것 같습니다.”

“후아.....!”

베르의 중재에 앤젤라가 두 눈을 번쩍 뜨며 두 팔을 높이 올렸다.

기지개를 쭉 피며 앓는 소리를 낸 앤젤라는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베르를 향해 물었다.

“이정도면 많이 모아놓은 걸까요?”

“그럼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네??”

“이리 잘해내실 줄은 몰랐거든요.”

“!!!”

베르의 칭찬에 앤젤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기뻐하는 표정이 솔직하게 들어나는 앤젤라가 참 순수하거 귀엽게 느껴졌다.

베르는 그런 앤젤라를 향해 다정히 말했다.

“부지런히 잘 따라와 주신 덕분이지요. 힘드셨을 텐데... 이리 훌륭히 자라신 것을 보니 괜히 제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하하하! 다 선생님 덕분이에요!”

“과찬은 넣어두세요. 차라도 마시고 가시겠습니까.”

“아니요, 오늘은 삼촌이랑 약속이 있어서요.”

“저런... 티타임은 다음으로 미뤄야겠군요.”

“죄송해요.”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저는 언제든 앤젤라님과 차를 마실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습니까. 얼른 가보세요.”

베르의 따스한 웃음과 배려에 앤젤라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햇살을 연상케 하는 미소였다.

“감사해요 선생님.”

“별말씀을요.”

“내일 뵐게요!”

“조심해서 가시기를....”

밝은 모습으로 뒤를 돌은 앤젤라는 대신전의 입구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통통 튀듯 밝기만 했던 걸음이 멈춰지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앤젤라는 대공저의 마차 옆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듯이 서 있는 한 인영에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

“기다렸어요.”

“.......”

자신을 기다렸다고 말하는 인영의 이름은 로라.

성녀라고 불리지만 성녀라고 불릴 수 없는 소녀.

앤젤라는 조금 망설이는 눈으로 하루 만에 야위어진 로라를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를 기다렸다고...?”

“네. 할 말이 있어서요. 시간을 좀 내주세요.”

“.......”

자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로라를 알기에 앤젤라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로라는 등 뒤로 감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숨기며 시선을 내리고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에요...”

“......”

불안한 시선처리를 똑같이 불안하게 바라보던 앤젤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

로라와 이동하는 앤젤라를 뒤에서 지켜보던 아리엘은 걱정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쟤를 왜 따라가고 그래...! 그리고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멈춰야지!!’

인적이 드문 숲의 산책길로 들어온 로라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걸어 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음을 바로 파악한 로라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 앤젤라를 눈에 담았다.

황족을 상징한다던 밝은 분홍색의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윤기를 내며 찰랑였다.

그 머리카락에서부터 느껴지는 신분의 격차에 로라의 눈이 흔들렸다.

부러워 미칠 것 같았다.

앤젤라는 그런 로라를 향해 물었다.

“할 말이 뭐야?”

“.......”

“할 말이 있다고 한 건 너였어.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해줘.”

“....... 제가 웃기죠?”

“..... 뭐?”

앤젤라의 눈이 커지자마자 로라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한정된 마력을 가지고 성녀라 떵떵 거리던 제가 우습잖아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도 내가 우스운데 앤젤라님이라고 다를까요?”

“너...”

로라의 눈이 타오르듯 분노에 물들여져 있었고 그녀의 손에는 태초의 마력이 올라오고 있었다.

앤젤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지금 무슨...”

“세상은 불공평해요....”

“뭐??”

“앤젤라님은 어떻게 그렇게 다 가졌죠? 난 만져보지도 쳐다보지도 못했던 걸 왜 다 누리고 있어요...?”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앤젤라의 질문에도 로라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모두한테 사랑받고 신분도 귀하고 마력도 줄지를 않아... 난 사랑받지도 못하고 천한 평민에 마력도 제한되어 있는데...”

“......”

“웃기죠? 웃기잖아.”

“.....”

앤젤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로라는 그런 앤젤라를 쳐다보지도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제국 유일한 성녀가 되어야 했어. 그래야 귀족의 세계에 발을 뻗을 수 있었단 말이야. 그래야만 내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었단 말이야.”

“......”

“그러려고 했는데 네가 방해가 되고 있어....”

“....!!”

“네가 사라져야만.... 내가 유일한 성녀가 되겠지?”

“로라!”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이 적어도... 내가 유일한 제국의 성녀라면 어떤 귀족이든 날 받아줄 거야. 그치?”

로라의 눈이 앤젤라를 날카롭게 담았다.

앤젤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이내 뒷걸음질을 쳤고 로라는 두 손에 가득 쥔 태초의 마력에 힘을 실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죽어줘.”

“그, 그만둬!”

“네가 죽어야 내가 행복해지잖아!”

“로라!!!!”

“죽어!!!”

“꺄악!!!”

마력이 입혀진 로라의 손이 앤젤라를 향해 뻗어졌다.

놀라 굳어버린 앤젤라가 눈을 질끈 감았고 동시에 누군가가 앤젤라를 품에 안았다.

파앗!!!!

하늘에 발이 뜬 아찔한 감각과 동시에 천천히 다시 눈을 뜬 앤젤라는 자신이 안정적으로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음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올린 시선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분홍색의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로레인이었다.

“삼... 촌?”

“앤젤라, 무사해서 다행이야.”

“삼촌...!!”

앤젤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든든한 아군의 등장에 그녀의 가슴에 안도가 차올랐다.

로레인은 앤젤라를 품에 안아주며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눈부신 빛을 품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앤젤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치겠군...’

서재에서 책을 읽던 로레인에게로 그레고리가 연락한 덕분에 지금 늦지 않게 앤젤라의 곁으로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자유분방하게 움직일 수 있는 태초의 마력은 자신의 마력과는 성질부터가 달라서 맞물릴 수 없었다.

자신이 보호막을 쳐도 태초의 마력에는 영향이 없다는 뜻이었다.

‘일단 앤젤라부터 황성으로 옮겨야겠...’

쿠구구궁!!!

“!!!!”

로레인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땅에서부터 갑작스럽게 올라온 태초의 마력이 그와 앤젤라에게 달려든 탓이었다.

“큭!!!”

서둘러 워프를 하려 마력을 움직이려 했으나 로라의 마력이 빠르게 앤젤라에게로 다가섰다.

‘이러다간...!’

늦을지도 모른다는 압박에 로레인이 다급히 앤젤라를 꽉 안았고 동시에 어떠한 형체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앤젤라는 로레인의 품에서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떴다.

환한 빛이 눈부시게 터지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느껴졌다.

하얀 빛들의 결정체를 등진 한 사람의 등이 푸른 하늘을 닮아 아름답게 흩날렸고 익숙하게 느껴진 뒷모습이 로라의 마력에게서 굳건히 자신을 감췄다.

앤젤라의 얼굴이 단번에 창백하게 질렸다.

눈부신 하얀 빛이 제 눈앞에서 흩어지자마자 앤젤라는 로레인의 품에서 뛰쳐나왔다.

자신을 보호하던 아름다운 등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안 돼...!!’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안 돼!!!’

후두둑 바닥을 적시는 눈물방울이 달려가는 앤젤라의 등을 더욱 서글프게 만들었다.

‘아직 아니란 말이야...!!’

시선에 보이는 푸른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천천히 앤젤라를 향해 몸을 돌려졌다.

무척이나 사랑스런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시야에 담기자마자 앤젤라는 눈물을 터트리며 외쳤다.

“언니!!!!!”

‘앤젤라....’ 아리엘의 몸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하얀 빛이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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