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준비해왔던 일.
로라는 앤젤라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입매를 들썩였다.
순식간에 변해버린 주변의 공기에 데미언이 다급히 앤젤라를 향해 말했다.
“앤젤라님, 우선 진정하세요.”
“.....”
“앤젤라님...?”
“......”
데미언은 묵묵히 로라를 바라보는 앤젤라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바로 앤젤라를 부드럽게 이끌며 말했다.
자신의 손이 그녀에게 닿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말이다.
“잠시 이리로...”
“.......”
“아버지,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로라님께서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걱정 말고 다녀 오거라.”
베르의 재촉에 데미언이 앤젤라와 함께 빠르게 멀어졌다.
로라는 그런 두 남녀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얼굴을 천천히 찌푸렸고 이내 아무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웃기고 있어.”
*
그가 손을 부드럽게 잡아줬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앤젤라는 입술을 꾹 깨물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진정이 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만약.... 만약 아무 생각 없이 서 있었다가는 언니가....’
로라의 손길이 아리엘을 잡았었다면 분명 아리엘은 신의 품으로 인도되었을 것이었다.
아무 작별 없이,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그 생각까지 미치자 앤젤라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제 입가를 가렸다.
무서웠다.
항상 곁에 있어주던 그녀를 자칫 그 한순간에 잃어버릴 뻔 했다는 공포가 그녀를 두려움에 휘말리게 만들었다.
점점 거칠게 떨려오는 앤젤라의 모습에 데미언이 약간 창백해진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앤젤라님! 진정하세요.”
“.......”
“앤젤라님!”
“..... 헉!”
데미언의 거친 부름에 다급히 정신을 차린 앤젤라가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햇빛만큼 찬란한 눈동자가 제 시야에 담기자 앤젤라는 잠깐 숨을 멈췄다.
그리곤 이내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데미언.... 오빠?”
“.... 정신이 드십니까.”
“아.....”
“많이 놀란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본다면 그냥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앤젤라는 심호흡을 내뱉으며 가슴을 진정시켰고 이내 제 시야에 담긴 푸른 하늘색의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니!!”
‘... 앤젤라’
“언니!!”
덥썩!
망설임 없이 아리엘의 손목을 잡은 앤젤라가 다급히 말했다.
“절대 저한테서 멀어지지 마요!!”
‘.....!’
“제 곁에서 절대로 떨어지지 마요!”
‘......’
“알았죠?!”
앤젤라의 절규와도 같은 외침에 아리엘은 천천히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 이야기는 조금 나중에...’
“언니!!”
‘쉬이... 지금 네 뒤에는 대신관 아들이 있잖아. 널 보고 있는데 이러면 네가 곤란해지잖아.’
“....!!!”
아리엘의 말에 화들짝 놀란 앤젤라가 고개를 돌려 데미언을 시야에 담았다.
데미언은 커진 동공으로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물었다.
“아까 말씀해주신 영혼이신가 봅니다.”
“.... 네...”
“많이 소중한 분이신 것 같네요.”
“.......”
소중한 분이냐고.
굳이 말하게 된다면 입이 아플 만큼 소중하다.
앤젤라는 그런 데미언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자신이 정말 그녀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앤젤라는 입술을 꾹 다물다가 이내 데미언을 향해 물었다.
“데미언 오빠. 제... 제가 잘못된 건가요...? 영혼을 무조건 신의 품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이... 정말 당연한건가요?”
“.... 사람마다 다른 가치관을 가지듯 두 분도 다른 시선에서 영혼들을 바라봐서일 것입니다.”
“.....”
“앤젤라님.”
데미언의 손이 부드럽게 앤젤라의 손을 감쌌다.
부드러운 면장갑 안으로 느껴지는 그의 온기에 앤젤라가 천천히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그녀를 가족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상황이 놀랐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데미언 오빠.”
“몇 번이고 정정해드리겠습니다. 잘못된 게 아닙니다.”
“......!”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앤젤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의 말처럼... 아리엘은 자신의 가족이었다.
너무도 소중한, 너무도 사랑하는.
*
앤젤라와 데미언이 나간 후, 베르는 로라를 자리에 앉힌 후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앤젤라님이 4살일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곁에 있어주셨던 영혼입니다. 함께 한 시간만큼 정이 깊어 로라님의 모습에 화가 나셨던 것이지요.”
“.... 이해가 안가요.”
로라는 베르의 말에 얼굴을 살짝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영혼들을 수도 없이 많이 신의 품으로 보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이런 모습은 특별한 경우지요.”
“그렇다면 앤젤라님은 그 영혼을 영원히 곁에 둘 생각인 건가요?”
“앤젤라님은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녀를 보내주는 것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기다려줘야 하는 것이지요.”
“능력이 부족하다고요?”
로라의 되물음에 베르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강한 영혼이시거든요.”
“......”
“강한 영혼을 보내줄 능력이 아직 안 되어있다고 하셨으니 로라님도 앤젤라님이 스스로 보내드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 아닐 텐데.”
“네?”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로라는 베르의 질문에 긍정하며 제 손가락을 엮어 잡았다.
‘능력이 부족해서 그 영혼을 보내줄 수 없다고?’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의문이 피어올랐다.
‘충분히 가능할 텐데 말이지.’
*
데미언은 훌쩍이는 앤젤라의 옆에 앉아 그녀의 진정을 도왔고 묵묵히 기다렸다.
앤젤라는 제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겨우겨우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고마워요 데미언 오빠...”
“진정이 되셨습니까.”
“네... 부끄럽네요. 창피한 모습을 보였어요.”
“감정을 내비치는 것은 전혀 창피한 일이 아닙니다.”
데미언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고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들어가시겠습니까?”
데미언의 물음에 앤젤라는 조용히 손수건을 꾹 말아서 쥐었고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아니요.”
아직 로라에 대한 화가 풀린 것이 아니었다.
아니, 시간이 지나도 풀릴 화가 아니었다.
인젤라의 단호한 대답에 데미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마차를 부르겠습니다. 아버지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미안해요, 제가 주변을 난처하게 만든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시고요.”
데미언은 싱그러운 연두색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며 천천히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다 급히 제 손을 뒤로 물린 후 몸을 돌려 앞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미쳤구나.’
잡아서는 안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아까 그녀를 데리고 나올 때어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이 머릿속에 들어오자마자 데미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 차려. 잡지 마. 그녀를 다치게 할 생각이야?’
그런 데미언의 생각을 모른 앤젤라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지신의 뒤를 묵묵히 따라오는 아리엘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깊이 고민하고 있는 기색이 만연했기에 걱정이 되었다.
데미언의 인사를 받고 마차에 오른 앤젤라는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제 건너편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아리엘은 그런 앤젤라와 눈이 마주치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왜 네가 더 놀라고 그래?’
“.... 언니.”
‘누가 보면 네가 하늘로 승천하는 줄 알겠다.’
“언니!”
‘얼씨구, 이제는 컸다고 화도 막 내고... 농담도 못하겠네.’
태평하게 놀리는 톤은 평소와 똑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의 눈 속에 담긴 수만 가지의 감정이 앤젤라의 가슴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언니... 무슨...”
‘앤젤라.’ 아리엘이 앤젤라의 말을 끊고 그녀를 나직이 불렀다.
앤젤라는 입술을 꾹 다물다가 이내 태평하게 말을 돌렸다.
“날씨가 좋기는 좋죠? 오늘 이대로 집에 가지 말까 봐요.”
‘앤젤라.’
“수도의 카페에서 디저트라도 사서 리아랑 같이 먹어야겠다.”
‘앤젤라.’
“..... 리아가 좋아하겠지..?”
‘내 이야기를 들어.’
“..... 듣기 싫어요..”
아리엘의 부드러운 부름에 앤젤라의 눈에 눈물이 고여 갔다.
아리엘은 그런 앤젤라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내게 많이 의지하고 날 너무도 생각해주는 거 나도 잘 알고 있어.’
“...... 안 들을래.”
‘그런데 말이야 앤젤라. 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듣고 싶지 않아요!”
앤젤라가 다급히 두 귀를 막았으나 아리엘의 서글픈 목소리는 그녀의 귀에 강하게 박혔다.
‘널 만난 그 후부터 늘 준비했던 일이야.’
앤젤라의 연두색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아리엘은 작은 소녀의 놀란 얼굴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난 언제든 떠날 사람이니까. 항상 마음의 준비를 했어. 지금 이 상황도 수백 번을 생각해왔던 당연한 상황이야.’
“!!!”
준비해왔다고?
그럼 그 지난 시간동안 제 곁에서, 이 세상에서 떠나게 될 준비를 계속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야?
'항상 아침이 되면 언제라도 너와 헤어질 준비를 해. 하고 싶은 말이나 해주고 싶던 말들을 이야기해줄 준비를 하고 마지막까지 너에게 웃어줄 수 있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해.'
“....!!”
앤젤라의 눈에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에 아리엘의 입술이 멈칫했으나 이내 아리엘은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여기서 네가 더 내게 의지하고 날 붙잡게 된다면... 그동안 준비해왔던 것들이 소용없어.’
“어, 언니...”
‘그러니 앤젤라.’
듣기를 거부하는 앤젤라의 머릿속에 아리엘의 단호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네 옆에 머무는 거... 더는 할 수 없어.’
“!!!!”
더는 나에게 의지하지 않도록.
'네가 말한 네 능력이 갖춰진 것 같을 때 내가 스스로 너한테 갈 테니까.'
“언니...!!”
내가 떠날 때 네가 더는 상처받지 않도록.
‘날 찾지 마.’
그것이 아리엘과 앤젤라의 마지막 대화였다.
항상 이별을 준비해왔던 여인과 언제나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헤어짐을 예기치 않았던 소녀의 대화는 누구보다 서글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