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새어나오는 진심
어두운 밤, 앤젤라는 자리에 누워 있었고 옆에는 세린이 그녀의 옆에 앉아 다정히 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는구나. 어땠니?”
“재밌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우리 공주님, 이제 자야지요.”
“히히 네에.”
키득키득 웃으며 두 눈을 곱게 휘어 웃는 딸이 사랑스러웠다.
세린은 사랑스런 앤젤라의 눈가에 입을 맞추며 나직이 속삭였다.
“모처럼 함께 간 여행에 그런 일이 생겨서 많이 놀랐지? 엄마가 미안해. 너희를 안전하게 지켜줬어야 하는데...”
“엄마...! 그건 엄마 탓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더 조심했어야 하는 게 맞았단다.”
세린의 나직한 말에 앤젤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 거렸다.
“... 저는 이 일에 엄마가 사과하는 건 싫어요.”
세린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이어 되물었다.
“왜?”
세린의 물음에 앤젤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세린의 고운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엄마의 잘못도 아닌 일인데 사과하는 건 잘못된 것 같아요. 이건 그 나쁜 사람의 탓이잖아요.”
“.... 앤젤라.”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여행은 다시 또 함께 가면 되고 우리는 스스로 우리 몸을 지킬 수 있어요.”
아니,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었다.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없어 남에게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졌던지 아무도 모를 것이었다.
그 한심함과 절망감, 사랑하는 이를 지킬 수 없는 나약함에 신물이 날 것 같았다.
앤젤라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배워야 함을 깨달았다.
간절하게 강해지기를 원했다.
세린은 그런 앤젤라의 연두색 눈동자를 애틋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앤젤라,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
“지금은 레기도 에드도 그리고 너도 엄마나 아빠에게 기대어도 괜찮아. 그러기 위해서 엄마랑 아빠가 너희의 곁에 있는 거란다.”
“... 엄마.”
“할머니 이야기를 엄마가 해준 적이 있었니?”
“.... 아니요!”
한 번 도 그녀의 입에서 들은 적이 없던 할머니의 이야기에 앤젤라의 눈이 반짝였다.
세린은 그런 앤젤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넘겨주며 말했다.
“할머니는 엄마를 너무도 사랑했었어. 평생을 퍼서 날라도 갚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단다.”
“.....”
“많이 의지하고 많이 사랑하고 많이 기대면서 살았어.”
세린의 눈이 조금씩 짙은 그리움이 담겨갔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 사랑 때문에 돌아가시게 되었어.”
“......!”
“자세한 이야기는 아직 해줄 수 없지만... 할머니는 정말 엄마나 삼촌들이나 할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 가셨단다.”
세린의 손이 천천히 앤젤라의 두 볼을 감쌌다.
“처음에는 그런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아니야.”
“엄마?”
“엄마가 너희들을 낳고 리아를 낳고나서는 할머니의 마음을 알게 되었어.”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그 사랑의 선택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린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던가.
그녀가 얼마나 보고 싶던가.
세린은 자신을 똑 닮은 앤젤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나직이 속삭였다.
“할머니나 엄마나 똑같다는 이야기란다. 널 너무 사랑해서 널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어.”
“... 엄마.”
“마음껏 의지해도 좋아. 지켜줄게. 무슨 일이 생기던 엄마는 항상 네 옆에 있을 테니까...”
세린의 진심이 앤젤라의 가슴에 고동쳤다.
앤젤라는 말없이 세린의 품에 고개를 묻으며 달콤한 향기를 가득 맡았다.
아리엘은 그런 모녀를 말없이 바라보며 창가에 기대었다.
그녀의 눈이 너무도 슬프게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세린의 품에 안긴 앤젤라는 알지 못할 것이었다.
아리엘의 시선에 보이는 앤젤라의 엄마.
아니, 자신의 하나뿐인 소중한 막내딸.
그녀는 지금 그 누구보다 훌륭한 부모로서 아이들을 지키고 사랑하며 노력하고 있었다.
‘......’
그 작은 발과 그 작은 손가락을 움직여 자신에게 달려오던 작은 딸아이의 성장이 아리엘의 가슴에 깃들었다.
‘엄마가 너희들을 낳고 리아를 낳고나서는 할머니의 마음을 알게 되었어.’
희생이라 칭할 수 없던 제 과거를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그러나...
딸의 입에서 듣는 제 모습에 아리엘은 흐르지도 않는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이 준 사랑만큼이나 세린도 자신을 사랑했던 것이었다.
너무도 큰 그 사랑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과거의 선택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 이야기를 꺼내는 세린의 표정이 지독히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아직도 내 생각만 하면 그런 표정을 짓게 되는 거니?’
네가 그리 슬픈 얼굴이 될 정도면... 그는 어찌해야하니.
아리엘은 사랑하는 딸의 모습을 슬프게 바라보다가 이내 하늘에 떠 있는 푸른 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한 사람이 너무도 그리운 밤이었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방문을 두드리며 날아온 서신은 고이 앤젤라의 손에 안착했다.
“응? 누구에게서 온 거야?”
“대신전에서 온 편지라고 합니다. 대신관님께서 직접 써서 보내주신 편지이신 듯한데 읽어보시고 답장 여부를 알려주세요.”
“선생님께??”
시녀의 말에 앤젤라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다급히 봉투를 열었다.
봉투 속에서 나타난 정갈한 글씨체의 편지는 짧지만은 않았다.
큰일을 겪은 자신의 안부와 데미언 덕분에 알게 된 자신의 소식에 안도했다는 내용이 중점이었고 그 밑으로는 소개해줄 사람이 생겼으니 대신전에 방문해주기를 원한다는 말이었다.
“소개해줄 사람?”
아무나 소개를 해줄 사람이 아님을 알기에 앤젤라의 눈에 궁금증이 생겼다.
“나 나갈 거야. 마차를 대기시켜주겠어?”
“지금 마부를 부르겠습니다. 어디로 모셔 달라고 전달할까요?”
“대신전.”
“네, 알겠습니다.”
시녀의 도움을 받은 앤젤라는 부드럽게 나풀거리는 연한 하늘빛의 드레스를 흩날리며 마차에 올랐다.
머릿속에 가득해진 궁금증과 함께 데미언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설렘이 물씬 올라왔다.
아리엘은 앤젤라의 붉어지는 홍조를 바라보며 짓궂은 표정을 하고 물었다.
‘대신관의 아들이 그리도 보고 싶었어?’
“힉!! 언니!”
‘얼굴을 본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앤젤라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네?’
“노, 놀리지 말아요! 선생님께서 저한테 소개해줄 사람이 있다고 해서 가는 거니까요!”
‘흐흥~왜 흥분을 하고 그래? 알겠어.’
“익!”
아리엘의 놀리는 듯한 말투에 앤젤라의 볼이 잔뜩 붉어졌다.
숨기고 싶었던 감정을 들킨 듯 한 느낌에 저절로 얼굴에 열이 몰렸다.
그 솔직한 반응에 아리엘은 키득키득 몰래 웃었고 말이다.
아리엘은 그런 앤젤라를 위해 일부러 말을 돌리며 다정히 물었다.
‘그런데 소개해줄 사람이라니... 누굴까? 예상가는 사람이라도 있어?’
“소개를 해준다는 것은 제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흠... 누구 일까나? 대신관이 직접 소개해줄 사람이...’
“저도 그게 정말 궁금했어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생각보다 그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선생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에요, 별로 멀지도 않은걸요.”
“하하하 엘님께서도 고생하셨습니다.
‘영혼밖에 안 남은 몸이 힘들 일이 뭐가 있겠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일단 자리를 먼저 이동해야겠군요. 이리 오세요.”
“아, 네!”
베르는 앤젤라를 이끌고 대신전의 기도실의 문을 열었다.
신전 창문의 밝은 빛들과 함께 부드럽게 흩날리는 검은 새의 머리카락이 앤젤라의 눈에 먼저 담겼고 그런 소녀의 옆에 서 있는 데미언이 다음으로 눈에 담겼다.
로라는 앤젤라를 발견하자마자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 검은 눈동자 속에서 작은 이채를 발견한 듯 했으나 이내 빠르게 사라진 감정에 앤젤라도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 이름은 로라, 성이 없는 평민이며 13살입니다.”
“아...”
“그리고... 태초의 마력을 가진 이로서 성녀의 자격이 갖춰졌다 하여 이리 대신전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
앤젤라의 눈이 딱딱하게 굳었고 옆에 있던 아리엘의 눈도 딱딱하게 굳었다.
“성녀... 요?”
“네. 앤젤라님께서도 성녀로서 활동하신지 오래 되셨다 들었습니다. 능력이 매우 출중하다 들었는데...”
“앗! 칭찬이 너무 과해. 고맙지만 아직 능력이 부족해서...”
앤젤라는 쑥스럽게 웃음을 지으며 로라를 향해 말했다.
“나랑 같은 마력을 지닌 분은 베르 선생님을 제외하고 처음이야, 정말 반가워.”
“저도 반갑습니다 앤젤라님. 그런데...”
“응?”
로라의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아리엘을 눈에 담았다.
“이상한 영혼과 함께 이신데... 떼어내시기 어려운 건가요?”
“어?”
“아직 영혼을 보내는 것이 어려우신 가봅니다.”
“!!”
로라가 망설임 없이 한 손을 아리엘을 향해 뻗었다.
앤젤라는 그 손길에서부터 느껴진 태초의 마력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로라의 손목을 붙잡았다.
턱!
“.... 앤젤라님?”
아리엘의 얼굴도 굳어 있었으나 앤젤라의 얼굴은 보다 차갑게 굳었다.
앤젤라가 로라의 손목을 붙잡은 채 물었다.
“무슨 짓이야?”
“네?”
“지금... 신의 품으로 보내려고 한 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요?”
앤젤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미미하게 담긴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로라가 태평하게 되물었다.
“이승에 머무는 영혼들은 그 곳으로 가야하는 게 당연한 이치입니다.”
“내버려둬.”
“.... 네?”
앤젤라의 얼굴에 작은 분노가 서렸다.
“내 옆에 있는 영혼은 내가 스스로 보낼 거야.”
“.....”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내 옆에 있는 영혼은... 함부로 인도시키지 말아줘.”
로라의 눈매가 굳었다.
그것은 지켜보던 베르와 데미언, 심지어는 아리엘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