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걱정이 되었습니다.
로레인에게서 그레고리의 소식을 들은 세린은 슬퍼 보이는 눈으로 물었다.
“우리 아이들을 힘들고 다치게 한 건 정말 용서할 수 없지만...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지... 만약 페르돈이 그리 사랑을 주지 않았다면... 조금은 다른 결과가 되었을지도 몰라.”
“혼란스러운 걸까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페르돈은 그 녀석에게만큼은 애정을 아끼지 않았으니까. 그런 자상한 아버지가 시녀와 시종들을 죽이는 것을 일삼고 황위를 위해 아무 거리낌 없이 누군가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알아버리기 무서웠던 거지. 그런 새끼도 제 아버지라고 사랑했었으니까.”
“.... 그 남자는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알아. 그리고 그 녀석도 알고 있어.”
로레인의 손이 부드럽게 세린의 손을 감쌌다.
“조금만 귀를 열어도 제 아비가 끔찍한 죄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거야. 그렇지만 그 말을 듣고 알게 된다면 복수라는 것도 할 수 없게 되겠지. 그것을 위해 살아남았던 녀석이었고 그를 너무 사랑했던 아이였으니까.”
“........”
“페르돈을 닮지 않아 정에 약하고 불의를 못 참은 성격이더구나. 여태 쌓아온 인연들이 모두 귀족이나 범죄자들에게서 구해낸 사람이었고 고아거나 평민들이었다는 것을 그 녀석 머릿속에서 읽어서 알았어.”
“그런....”
“그런 녀석이 자기 아버지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과연 그 마음가짐으로 복수를 할 수 있을까.”
“.... 아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그런 벌을 준거야. 자기 아버지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살라고. 그런 사람을 위해 복수를 준비한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라고.”
“......”
“인장도 새겨놨으니 아이들을 공격하거나 널 다치게 할 일은 없을 거야. 아마 너와 우리를 생각하는 것도 벅차겠지.”
“그냥 놔준 것이 그 일 때문만은 아닌 거죠?”
“하하...”
로레인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그 녀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레고리에 대한 신뢰도가 굉장히 높았어. 만약 그 녀석을 잡아들였다면 북쪽 지역을 붙잡고 있던 청부업이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할지도 몰라. 내 가족들을 위협시키면서까지 큰 싸움을 바라지 않았어.”
“그레고리의 청부업은 정확히는 뭘 하는 건데요? 많이 큰 범위를 차지했나요?”
“전쟁의 지원군, 호위... 말고도 누군가에게서 받아올 문건을 받아오거나 힘을 쓰는 의뢰들을 받고 그 일을 해결해주는 사람들이지. 그런 일들을 하는 녀석들의 실력이 하나같이 다재다능하고 출중하더구나. 그리고 그 청부업이 북쪽 지역을 대부분 붙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로 크지.”
“.... 그렇구나.”
“하지만 이제 됐어. 잘 해결된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 고마워요 오빠.”
“너도 아이들도 무사해줘서 내가 더 고맙단다.”
*
환한 햇살이 들어오는 방 안에서 앤젤라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었고 아리엘은 그런 앤젤라의 옆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앤젤라는 아리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언니...”
‘응?’ 아리엘의 연두색 눈동자가 앤젤라를 담았다.
앤젤라는 조금 흔들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천천히 내리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때...”
‘엥? 언제? 네가 뭘 했었나?’
“저번에 레기 오빠가 큰 일이 날 뻔 했을 때... 반말해서 미안해요. 마음이 급하고 오빠가 너무 걱정되어서 실수했어요.”
‘응? 뭐야, 고작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어?’ 아리엘이 커다랗게 변한 눈으로 되묻자 앤젤라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고작이라뇨! 저 지금 진지해요! 언니는 저보다 나이도 많은 어른인데 반말을 했다는 건 제가 예의를 지키지 않은 거니까요!”
‘하하하! 그래그래. 알겠어.’
“놀리지 마세요!”
예의를 중시하는 세린의 교육으로 인해 그때의 제 발언을 되짚어보고 자신의 실수를 부끄러워하는 앤젤라를 바라본 아리엘은 그녀가 참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그레고리의 사건 속에서 아이들이 많이 다치지 않았음이 너무도 다행스러웠고 이렇게 다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해진 것에 마음이 안도로 물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진지하게 사과를 해야겠구나..’
“네?”
‘나도 미안해 앤젤라.’
“무슨...”
아리엘이 천천히 상체를 숙여 앤젤라의 작은 손을 향해 한 손을 뻗었고 이내 텅 비어있는 듯한 불투명한 손이 잔뜩 온기를 품은 고운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미안해. 내가 또 네 곁에서 떨어져서.’
“....!”
‘내가 널 또 위험하게 만든 거나 다름없어. 네 곁에서 멀어지면... 그랬으면 안 되었던 거야.’
“언니.”
‘미안해. 내가 네 곁에 있을 수 있는 그때까진 꼭 붙어있을게.’
“언니...”
‘네가 위험한 건... 내게도 정말 무서운 일이니까.’
앤젤라는 아리엘의 눈을 올곧게 직시하다가 이내 말없이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것 말고는 대답해줄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똑똑
“...! 아, 네!”
갑작스러운 노크에 앤젤라가 다급히 아리엘의 손을 놓고 문을 바라보았다.
앤젤라의 수락에 천천히 열린 문 안으로 시종이 들어왔고 시종은 부드럽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네. 데미언 하트만 신관님께서 안부를 물어보고자 이리 방문하였다고 합니다.”
“데미언 오빠가?!!!”
시종의 말에 앤젤라의 두 볼이 붉게 타올랐다.
잔뜩 떨리는 귀여운 눈동자를 한 앤젤라는 시종이 나가자마자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제 드레스를 살펴보며 구겨진 자국을 피기 시작했다.
“으아아! 올 줄 알았으면 미리 단장하고 있는 건데!!”
‘많이 구겨진 것도 아니네. 드레스는 괜찮지만 오히려 머리를 신경 써야 할 것 같은데?’
“머, 머리가 왜요? 어떤데요?”
‘자국이 났어. 베개에 누운 흔적 그대로.’
“꺅!”
아리엘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방의 화장대 거울을 살펴본 앤젤라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부드러운 머리카락 옆태가 꾹 눌려진 제 우스운 머리 모양에 기겁한 탓이었다.
“어... 어떻게!! 이대로는 못 만나요...!!”
‘나름 귀여워.’
“안 귀여워요! 으아...! 이러고 어떻게 오빠를 만나요!”
‘.... 별꼴이야 정말...’ 앤젤라의 절망을 낮게 혀를 차며 관람한 아리엘은 이내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리와. 내가 만져줄게.’
“어떻게 하려고요...?”
‘예쁘게 묶어주면 될 거 아니야. 다시 만지다가는 한참 기다리게 할 거야. 그건 실례인 거 잘 알고 있지?’
“..... 예쁘게 묶어주세요...”
‘나만 믿으렴.’
*
푸른 하늘이 담긴 창문을 유심히 바라보는 남자의 등은 넓었고 굵은 선을 가진 옆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붉은 입술과 대조적으로 빛나는 백금색의 눈동자가 하늘을 직시하고 있었으나 손과 발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뒷모습 위로 불안한 듯한 기운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똑똑
“!!”
나직이 울리는 시종의 노크소리에 그의 눈이 다급히 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고 앤젤라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들어서다마자 서둘러 앤젤라의 얼굴과 몸을 살피던 데미언은 그녀가 아무 다친 곳이 없음을 알아채고 다시 시선을 올려 앤젤라를 눈에 담았다.
앤젤라는 자신에게로 올곧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에게로.
아주 천천히.
분홍빛의 아름다운 머리가 높이 올려 묶어져 있었고 갸름해져가는 귀여운 얼굴 위로 사랑스런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그의 시선에 담겼다.
그러다 그녀가 다정하게 빛나는 연두색 눈동자를 올려 자신을 직시하자 데미언은 마른 입술 안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보고 싶었던 소녀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낀 데미언은 버릇처럼 면장갑을 낀 제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단단히 붙잡았다.
앤젤라는 마주친 백금색의 눈동자와 가히 천사를 닮았다고 칭할 수 있는 아름다운 얼굴을 발견하고 맑게 웃었다.
두 볼을 가득 채운 홍조가 더욱 붉게 물들어지며 이내 밝은 목소리를 하고 물었다.
“데미언 오빠!”
“......”
높이 머리를 올려 묶은 것을 한 번 도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자꾸 목소리가 떨려올 것 같은 느낌에 입술을 꾹 다문 데미언은 망설이는 모습을 하다가 이내 붉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네?”
“큰일을 겪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자칫 다치실 뻔 했다는 말도 들려 무례를 무릅쓰고 이리 찾아왔습니다.”
“아...! 전 다친 곳은 없어요! 레기 오빠가 어깨를 다쳤었지만 레인 삼촌 덕분에 금방 치료돼서... 정말 괜찮아요.”
“...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 네에..”
데미언의 담담한 말에 앤젤라는 수줍게 물들어진 제 볼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혹시... 정말 혹시... 자신이 걱정이 되어서 이리 바로 달려온 것일까?
무언가 그에게서 자신이 특별해졌다는 느낌에 앤젤라의 가슴이 크게 요동쳤다.
부풀어진 가슴을 말리지도 못한 앤젤라는 이내 그의 백금색의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제 걱정 하셨나요?”
“... 네?”
“그래서...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온 건가요?”
“.....”
데미언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붉게 달아오른 홍조와 다정히 빛나는 따스한 눈동자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스럽게 만드는지.
자신이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얼마나 약한지.
그리고...
“네. 맞습니다.”
“.... 네?”
그리고...
“앤젤라님의 말 그대로입니다.”
그녀의 소식을 듣고 머리가 하얗게 변해서 이리 달려온 제 자신을... 자신 스스로마저도 알 수 없었다.
데미언은 놀란 눈동자를 한 앤젤라를 올곧게 직시하며 말했다.
아주 선명한 목소리였다.
“앤젤라님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안심했습니다.”
그의 가슴 속 작은 물결에 거친 파도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