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그레고리
로레인은 어둠속에서 밝게 빛나는 금발을 그저 가만히 응시했다.
어린 시절, 자신을 향해 망설임 없이 손을 들고, 발을 내딛던 그 사내와 똑같은 머리카락이었다.
그리고 극도로 혐오했던 그 인간의 이목구비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 아름다운 외모도 눈에 띄었다.
턱에 자리한 깊은 화상자국도 함께 말이다.
상처의 원인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로레인은 그런 그의 흉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딱히 너에게 악감정이 있던 것은 아니야.”
“.....”
“단지 네 아버지라는 인간이...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너 덕분에 알게 되었다는 것 밖에는 없었어.”
“.....”
그래, 그는 자신을 사랑했다.
그 넘치는 사랑에 시야는 좁아졌고 그 애탄 사랑에 눈이 멀어졌다.
그레고리의 시선이 천천히 좁아졌다.
“그래서? 날 죽일 생각이야?”
“... 못 죽일 것도 없지. 하지만... 궁금해졌어.”
“뭐?”
“네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내가 생각하는 그 인간의 자식이 맞는지, 만약 맞다고 한다면 그 긴 시간동안 뭘 했는지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
“난 알아야겠어.”
로레인은 제비꽃 색의 눈동자를 번뜩이며 이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레고리는 주춤하는 기색 없이 가만히 서서 제게로 다가오는 로레인을 응시했고 이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로레인에게서 흘러나온 마력의 기세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 정말.... 너도 마법사였나.”
“이제 곧 대마법사의 칭호를 얻지.”
“그 정도의 마력이라면 칭호는 이미 옛날에 얻었어야했겠어.”
“정확한 녀석이구나.”
로레인의 손이 이미 포기를 한 듯한 그레고리의 머리를 감쌌다.
부드럽지도 그러나 거칠지도 않은 손에서부터 푸른빛이 터졌고 곧이어 그레고리의 머리에 짙은 고통이 스쳐지나갔다.
제 기억을 읽기 시작하는 마력의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찌르르 머리를 울리는 고통 속에서 제 기억은 머리 위로 떠올라갔다.
‘이번엔 주방시녀야... 후작님의 상에 올라온 음식이 간에 맞지 않았나봐. 사지가 베였다더라...’
‘정말? 너무 무서워...’
‘황위권에 발도 내디딜 수 없다는 충격이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남아 계신다나봐. 그 화풀이를 우리에게 하고 있는 거래.’
‘황자가 된 사생아로 황위를 노린다는 말도 있어, 반란을 준비하는 것 같다는 말을 조지가 들었대. 빨리 도망갈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다 우리 다 죽는 거 아니야?’
속삭이는 시녀들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선명히 박혔으나 못들은 척 외면하던 자신이었다.
‘내가 들었는데, 거 페르돈인지 페돈인지 황자님들로 협박해서 황제를 위협했다며?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어서.’
‘에헤이... 진짜 끔찍한 놈이네. 그것도 그거지만 황후가 마녀라는 소문도 돌고 있어, 황녀의 몸에 저주를 넣어서 썩게 만들었다는데...’
‘뭐야? 그 저주가 우리에게 퍼지면 어떻게?!... 높은 사람들은 무슨 세상에서 사는 지 도저히 알 수 없네.’
술집에서부터 들리는 사내들의 이야기에도 들리지 않은 척 했다.
그래.
자신을 귀를 닫았다.
듣고 싶은 것만 듣기 위해 귀를 열었었고 듣기 싫은 것을 차단하기 위해 귀를 닫았다.
제 아비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그것으로 제 삶의 목표가 아예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 사실로 인해 복수도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모두 할 수 없게 된다면... 지금 제게 남는 것은 ‘공허’였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 이를 악 문 세월만 해도 수십이었다.
그런데 제 가족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는 수많은 악행을 일삼던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레고리의 가슴속에 꽁꽁 숨겨진 불안감을 발견한 로레인이 마력을 모두 거두고 그를 응시했다.
“.... 여태껏 그러고 산거냐.”
“......”
“복수를 위해서 모든 걸 외면하면서 살아간 것이 이제는 만족스럽나?”
“......”
그레고리의 푸른 눈이 로레인을 담았다.
로레인은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짙은 한숨을 쉬었다.
“현실을 직시해.”
“.....”
“네 부모는 나를 이용해 황위권을 찾으려 마탑과 교류한 남자야.”
“...!!”
“그가 고용한 어둠술사가 내 동생의 몸을 썩도록 저주를 넘겨버렸고, 그 저주를 대신 가져간 내 어머니는 온 몸이 썩어가면서 죽었어.”
“......”
“그 죄는 그저 일부야. 넌 후작 성에서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하녀와 시녀들이 죽었는지 아니?”
로레인은 잔뜩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그 일부에 지나지 않은 죄들까지 내가 모두 네 머릿속에 넣어주마.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고 깨달아.”
“!!!”
턱!!
로레인의 손이 거칠게 그레고리의 머리를 쥐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기억들이 물이 밀리듯 밀려왔고 이내 숨이 차오르는 고통에 그레고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으윽!!!!”
“눈 똑바로 뜨고 잘 들어!! 이게 네 아버지라는 인간이다!”
“허억!! 큭!!”
몰아치는 기억의 소용돌이에 그레고리의 몸이 푹 가라앉았다.
엎드려 누워있는 그레고리의 등이 안타깝게 떨려왔다.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기억과 이런 사실 따위.
‘레리.’
자신을 불러주는 따뜻한 얼굴 안으로 꽁꽁 숨겨 있던 수많은 피들과 흉터는 그레고리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풀썩 꺾인 그의 무릎 위로 고개를 깊이 숙인 그레고리는 격한 숨을 토해냈다.
“허억...!! 꺽!!”
“..... 직시한 소감이 어때, 아직도 복수가 하고 싶니? 그 인간을 위해서?”
“..... 헉... 헉....”
복수가 하고 싶냐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쓴 아버지를 위해서?
정답은 간단명료했지만 쉽게 그 정답을 잡을 수 없었다.
그간의 시간과 그간의 믿음이 한순간에 무너진 사실이 그의 온 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어찌해야 한 단 말인가.
로레인은 소리 없이 절규하는 그레고리의 괴로운 등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지금은 널 데려가 지하 감옥에라도 집어 쳐 넣어야겠지만...”
“.....”
“이것으로 일단 보내주도록 하지.”
“!!!”
로레인의 손이 그레고리의 손목을 꾹 잡았고 푸른 마력이 뭉쳐져 그의 손목에 인장을 새겼다.
“내 인장이야. 내 모든 마력을 끌어 모아서 만든 인장이니... 네가 깨려고 해도 절대 안 될 거야.”
“......”
“네 위치도, 네 행동도 모두 내가 지켜보고 있겠어. 이건 널 봐주는 게 아니라 널 감시하는 것이니까.”
“......”
“네 아버지의 죄를 잘 기억하고 살아. 그게 너에게는 더 괴로운 벌일 테니까.”
로레인의 냉정한 말에도 그레고리의 푹 숙여진 고개는 들려지지 않았다.
로레인은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이곳을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 거다.”
“.....”
“이리로 오고 있는 녀석은 제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무척 잔인하니까.”
*
“왜 풀어준 겁니까.”
“... 풀어준 게 아닌데. 감시하는 중이야.”
“그게 풀어준 겁니다. 지금 잡아놓아야 아이들에게 위험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대공, 내가 아무 이유 없이 그랬을 것 같아?”
“.... 이유가 뭡니까.”
제이의 푸른 눈이 로레인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세린과 아이들을 위협한 그 사람을 풀어준 것이 여간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었다.
로레인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자조적으로 웃었고 이내 씁쓸해 보이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세린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어.”
“..... 네?”
“페르돈을 닮지 않았기도 했고.”
“그게 무슨...”
“북쪽의 유명한 대집단 중 하나가 청부업인데 그 청부업의 주인이 저 녀석이야.”
“!!!”
“그런데 그 청부업을 이루는 녀석들 모두가 고아이거나 부모를 잃은 평민들이 대부분이더군.”
“.....”
“그 녀석들 모두가 그를 잘 따르던 것을 보면... 뭐라고 해야 할까.... 정을 많이 준 것 같아.”
로레인은 천천히 제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복수를 하기에는 강인하지 못했기도 했고, 누구보다 제 아버지를 잘 알고 있던 터라서 일부러 귀를 모두 닫고 살았더군. 페르돈이 지은 죄들을 알게 된다면 여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필사적으로 살았던 제 자신이 쓸 때 없는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 되어버리니까.”
“......”
“어차피 손 하나 까딱하면 죽는 녀석이야. 일단 지켜보자.”
“..... 하.”
“내 생각에는....”
로레인의 눈이 푸른 달을 응시했다.
처량하게 멀어지던 그 뒷모습이 아직 시야에 남은 듯했다.
“저 녀석의 복수는 이미 처음부터 물거품이었던 거야.”
*
앞으로 뭘 해야 할까.
어떻게, 무엇을 목표로 살아야 하지?
내게 남은 것이 뭐가 있더라.
그레고리의 손이 천천히 제 얼굴을 감쌌다.
짙은 고독과 외로움이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고 괴로운 고통이 그를 땅 아래로 끌어내렸다.
“.......”
“대장!”
“.....!”
그레고리는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자신이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제 앞에 서 있는 동료들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추운데 왜 그러고 있어요? 어서 들어와요.”
“......”
“무슨 일 있어요?”
“.... 후...”
“엥? 청승맞게 그러지 말고 일단 들어와요. 오늘 메뉴는 오다 녀석이 스프를 끓였어요.”
“대장! 내 온 정성을 쏟았다고? 얼른 먹자!”
“빨리요! 빨리!”
뭘 하며 살아가야할까.
나 따위의 것이 너희들의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어도 되는 것일까.
따지고 본다면 나도 똑같은 죄인인데...
‘네 아버지의 죄를 잘 기억하고 살아. 그게 너에게는 더 괴로운 벌일 테니까.’
정말로 잔인하구나.
언제 터질지 모를 인장을 몸에 박고, 제 아버지의 죄를 되짚으며 살아가라니.
형제라 부르고 싶어도 형제라 부를 수 없는 자는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