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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173화 (172/218)

173화. 냉정한 세상

“리아...!”

풀로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익숙하고 사랑스런 음성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 음성의 주인은 플로리아가 그토록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었으니까.

플로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강한 빛을 끌어 모은 듯 반짝였다.

“엄마!”

고사리 마냥 작은 손을 펼쳐 세린을 향해 양손을 뻗은 플로리아는 조그만 다리를 바쁘게 움직여 달려갔다.

세린은 작은 제 막내딸을 단단히 제 품에 안아주었다.

“리아!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웅! 리아는 안 다쳤어여! 엄마는? 엄마는 아야 안 했어여?”

“응, 엄마도 괜찮아.”

세린은 리아의 걱정스런 말에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다정히 웃었다.

가족 모두가 무사한 것이 너무도 다행이었다.

지독한 안도를 느끼며 미소 지은 세린이 고개를 올리자 제이와 눈이 맞닿았다.

제이는 그런 세린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꾹 다물고 이내 고개를 돌렸다.

“...!!”

자신의 눈을 한 번도 피한 적이 없는 제이였다.

언성도 높였던 적도 없었으며 항상 먼저 눈을 맞추고 자신을 안아주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눈을 피했다고...?

세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왜...?’

마음속에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왜.....?'

*

황성에서 하루 머물고 가라는 테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 세린은 제이와 함께 방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에 일어난 불안은 천천히 세린의 가슴을 침범해나갔다.

세린의 시선이 힐끔 제이에게로 닿았다.

남자다운 턱 선과 화사한 이목구비 속에서 빛나는 푸른 눈동자.

달빛에 반사되어 밝게 빛나는 하얀 은발.

늘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운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세린은 이내 입술을 꾹 깨물고 자리에서 멈췄다.

“.....”

“세린?”

조심스러운 제이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세린은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있었다.

제이는 그런 세린을 향해 다가가며 물었다.

“세린, 왜 그러십니까.”

“.... 제이.”

“네.”

“내가... 내가 뭔가 잘못했나요?”

“!!”

세린의 눈에 고인 눈물을 발견한 제이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제이는 멍하니 그 눈물을 바라보다가 이내 제 눈가를 쓸며 나직히 한숨을 내쉬었다.

“세린이 잘못한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제이 지금 나한테 화가 난 것 같아요.”

“그런게 아닙니다...”

“그럼 왜 내 눈을 피해요? 날 봐요.”

“.......”

제이는 질끈 감았던 눈을 스르륵 뜨며 세린을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짙은 고통을 담고 있었다.

“당신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닙니다.”

“.... 그럼 왜...”

“제 스스로한테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네...?”

제이는 천천히 세린의 한 손을 붙잡고 그 고운 손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전 당신처럼 강인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을 지켜주지도 못했고 당신을 보호하지도 못했습니다.”

“제이! 무슨 소리에요!”

“냉정한 사실입니다. 전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이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세린은 그런 제이의 두 볼을 감싸며 말했다.

“제이, 여태 그런 생각을 하느라 날 보지 못한 거예요?”

“.... 당신에게 소리를 치면 안 되었어요. 제겐 그럴 자격도 없었습니다.”

“.... 제이.”

세린의 가슴에 소용돌이가 멈췄다.

제이의 진심이 그녀에게로 닿았고 세린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제이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제이는 나직이 말했다.

“불안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사과하지 말아요.”

“소리쳐서 미안해요.”

“정말... 사과하지 말라니까...”

“사랑합니다.”

“..... 나도요.”

제이의 입술이 부드럽게 세린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훌륭한 부모가 되기란 어려웠고 아이들을 지키는 것도 어려웠다.

언제 어디서 다시 부닥칠지 모를 위험이 두려웠으나 이내 세린과 제이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무슨 일이 있거든, 아이들을 반드시 지켜낼 것이었다.

천천히 입술을 뗀 제이가 세린의 귀에 속삭였다.

“로레인 전하와 잠시 수색을 다녀올 예정입니다. 오늘은 아이들과 쉬고 계세요.”

“네?”

“제가 가겠다고 이른 일입니다. 내일 자정이 지나기 전에는 돌아오겠습니다.”

“강한 마법사에요. 위험할 수 있어요!”

“세린, 로레인 전하도 강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인간의 뿌리를 뽑아놔야 제 마음이 편해서 그럽니다.”

“하지만....”

“그 인간을 놓친다면 우리 아이들에겐 항시 주변에 위험이 도사리는 것과 같죠. 전 그런 가시밭길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 않습니다.”

“.... 제이.”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요 제이...”

세린의 걱정스런 말에 제이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담겼다.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춘 제이는 세린을 아이들이 있는 방 앞까지 에스코트하였고 이내 부드럽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이 굳은 결심을 담은 듯 했다.

세린은 제 두 손을 그러모아 쥐며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제이가 다칠까봐, 로레인이 상처를 받을까봐.

*

그레고리는 어두운 숲을 빠르게 걷고 또 걷고 있었다.

정체를 들켰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제 손에 잡히지 않았으니 우선 숨어있어야 했다.

‘설마 그 정도의 실력일 줄은.... 섣부른 판단이었어...’

몇십년 만에 처음 마주한 복수의 대상으로 인해 마음이 급했던 자신의 탓이었다.

그레고리는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기며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북부로 돌아가서 정비를 다시 해야겠어. 쓸 만한 녀석들로 모아야겠군.’

이 날만을 위해 키운 세력들이었다.

북부의 반절을 차지하는 청부업장은 모두 그레고리의 일부였고 서부, 동부, 남부에도 그 청부업은 자리가 잡혀 있었다.

그 정도로 키워놓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가.

‘녀석들을 불러 모은 후에 동쪽의 황성과 대공성의 동태를 파악해야겠군. 이번에는 놓치지 않....’

‘그럼 넌 뭘 알아...’

“......!”

머릿속에 떠오른 목소리에 그레고리의 발걸음이 멈췄다.

‘내가 네 아빠로 인해서 저주를 받아 온 몸이 썩어 죽을 뻔 했던 것을 알아?’

“......”

‘그런 날 살리기 위해서 내 저주를 가져가 대신 죽어버린 엄마를 마주한 기분을 네가 알아?’

모른다.

아니, 알 것도 같았다.

비슷한 상황 속에서 자신도 제 어머니와 아버지를 잃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의 복수를 위해 지금까지 버티고 또 버텼으니까.

“......”

반란군, 배신자, 제국의 위험, 끔찍한 범죄자.

제 아버지를 지칭하는 단어들은 끝도 없이 많았고 좋은 의미의 것들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 자신에게만큼은 항상 훌륭한 아비였다.

제 시선에서 그는 항상 빛나 보였고 그의 손길은 항상 부드러웠다.

그 다정한 미소를 받기 위해 어릴 적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레고리는 천천히 두 눈을 감고 그때의 그 지옥을 다시 생각했다.

‘도망쳐야해!’

자신을 품에 꼭 안으며 외치는 여린 비명 같은 목소리는 애처롭게 떨려왔다.

‘들킨 거야... 들켜 버린 거야...!’

‘어머니...?’

‘레리....’

자신의 애칭을 부르며 자신의 볼을 쓰다듬은 여인은 서둘러 후작성의 뒷문에 아들을 밀어 넣었다.

다급한 손의 떨림이 제게도 느껴졌지만 그녀의 손은 망설이지 않았다.

‘황후가 우릴 모두 죽일 거야. 너라도 살아! 죽은 듯이 살아!’

‘어, 어머니...?’

‘절대 살아있단 걸 들켜선 안 돼! 오늘부터 페르돈은 죽은 거야!!’

‘네??’

‘우리의 잘못이야... 이 일이 널 위험하게 만들 줄 알았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거야.’

횡설수설이라기에는 명확한 발음이었다.

다급한 말투 속의 그 의미를 알아채기 위해 눈을 찌푸린 그는 갑작스런 후작성의 폭발에 결국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콰과과광!!

‘꺄아아악!!!!’

‘아악!!’

붉게 타오르는 불길에 제 어미는 타들어갔고 그 폭발에 휩쓸린 제 얼굴에 다가온 고통에 비명을 질렀었다.

그레고리의 눈이 천천히 다시 떠졌다.

그 날 이후로 멈추지도 못하고 달리고 또 달렸었다.

얼굴에 생긴 끔찍한 화상 흉터를 껴안고 차가운 사람들의 시선과 모진 괴롭힘 속에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 절망 속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의지는 오직 복수 때문이었고 지독한 분노 덕분이었다.

그것들을 위해 제 아비와 어미를 지칭하는 흉한 단어들과 말들을 일부러 무시하고 듣지 않았다.

현실을 부정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

‘내가 네 아빠로 인해서 저주를 받아 온 몸이 썩어 죽을 뻔 했던 것을 알아?’

“모르지. 알고 싶지도 않아.”

‘그런 날 살리기 위해서 내 저주를 가져가 대신 죽어버린 엄마를 마주한 기분을 네가 알아?’

“알 필요 없지. 알게 된다면....”

알게 된다면?

알게 된다면 무엇이 변하지?

한 마디의 의문을 품은 그레고리가 시선이 천천히 올렸다.

먼 숲을 응시하듯 푸른 눈동자를 빛내던 그의 시선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달빛을 받은 분홍색의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보였고 반짝이는 아름다운 제비꽃 색의 눈동자가 강하게 가슴에 박혔다.

그레고리는 마주한 보랏빛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제일 만나고 싶지 않은 이의 등장이었으니까.

“.... 이거야 원...”

“......”

“... 형님이라 불러야 하나?”

“너에게 형님으로 불리고 싶지 않으니 알아서 정해라.”

날카롭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그레고리의 입에 삐뚤어진 미소가 담겼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 당신과 나는 형제가 아니었나?”

“내 형제는 세상에 단 3명뿐이다. 더는 필요 없어.”

“냉정하네...”

그래, 참으로 냉정한 세상이었다.

이 차가운 세상 속에서 자신은 어떻게 지금까지 버텨왔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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