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구세주
사박 사박
걸어가는 발걸음에 스치는 나뭇잎들이 작은 소음을 냈다.
불안하게 느껴지는 눈으로 앞을 향해 이동하는 앤젤라는 제 두 손을 꼭 그러쥐었다.
무서웠다.
지금 이 상황도, 가족들의 행방도 너무 걱정되고 무서웠다.
그런 앤젤라의 마음을 알기에 아리엘은 그녀의 옆에서 침묵했다.
그러던 그때.
부스럭!
“!!!”
바로 옆에서 들리는 풀잎 소리에 앤젤라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아리엘은 그런 앤젤라의 앞을 가로 막으며 눈을 날카롭게 떴다.
사박 사박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 소리의 주인이 다가왔다.
앤젤라와 아리엘의 입가가 굳어질 무렵 넝쿨을 뜯으며 한 인영이 빠르게 나타났다.
아리엘과 앤젤라의 동그란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인영의 남색의 머리카락이 눈부셨고 똑같이 남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앤젤라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레기 오빠!!”
레기 스페라도였다.
레기 또한 앤젤라의 등장에 두 눈을 크게 뜨며 다급히 손을 뻗었다.
“앤젤라!”
앤젤라는 망설이지 않고 두 팔을 뻗어 레기를 꽉 껴안았고 레기도 든든한 팔을 뻗어 앤젤라를 감싸 안았다.
“오빠아아...!”
앤젤라의 음성에 안도한 레기가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무사했구나.”
“무서웠어어..!!”
“앤젤라, 울지 마. 오빠 얼굴 좀 보여줘. 다친 곳은 없니?”
엉엉 우는 동생을 달래며 레기가 부드럽게 앤젤라와 눈을 맞췄고 곧이어 그녀의 몸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다친 곳이 있는지 꼼꼼히 살피는 눈에서 짙은 안도와 걱정이 담겨있었다.
앤젤라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나 안 다쳤어... 오빠는 괜찮아?”
“응, 오빠도 괜찮아.”
레기는 부드럽게 웃으며 앤젤라의 손을 꽉 잡았다.
“가자, 가족들을 찾아야지.”
“응...!”
“레인삼촌의 지도에서 봤어. 여기가 남쪽으로 넘어가는 중앙의 경계 숲인 것 같아.”
“그렇구나...”
든든한 구세주의 등장에 앤젤라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리엘 또한 무척 안도한 얼굴로 레기를 바라보았다.
앤젤라와 제일 가까이 있던 채로 워프 되어서 그녀와 빠르게 만날 수 있던 것 같았다.
앤젤라는 레기의 단단한 손을 꼭 잡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레기가 무사한 것을 보고 다른 가족들도 무사할 것이란 강한 안도가 밀려왔다.
“리아는 괜찮을까...?”
“당연하지, 아빠랑 엄마랑 함께 있었잖아.”
“맞아... 엄마랑 아빠는 강하잖아!”
“그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모두 무사할거야.”
동생의 걱정에 레기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그의 눈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막 정신을 차렸을 때... 제가 껴안고 있던 앤젤라가 곁에서 없어졌다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나타난 극심한 불안감과 무서움이 아직도 생생했다.
한 번 도 겪어보지 못한 누군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서둘러 몸을 움직여 주변을 뒤지며 겨우겨우 찾은 제 동생의 모습에 얼마나 안도했던가.
레기는 온 몸의 감각을 곤두세우며 앞을 바라보았다.
이제 남은 가족들을 찾아야 했다.
‘앤젤라를 지켜야해.’
그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잡은 레기는 굳어진 입매로 속삭였다.
“이 근처에 아마 고ㅁ...”
콰과광!!
“!!!!”
“오, 오빠!!”
멀리서 들리는 강한 폭발음에 레기의 눈이 커졌고 앤젤라가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았다.
땅을 울리게 만들 정도의 강한 폭발에 레기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
저 폭발이 일어난 곳에 분명 제 가족들이 있을 것이란 예감이 들어서였다.
“가자.”
“오빠...?”
“저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
“!!!”
레기의 말에 앤젤라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아리엘은 그런 앤젤라와 레기를 바라보다가 이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다녀올게.’
“언니...?”
‘너희들이 저 위험한 상황 속으로 걸어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내가 허락 못해. 차라리 내가 얼른 다녀와서 안내할게.’
“하지만...”
‘레기가 곁에 있지만... 그래도 빨리 다녀올 테니 어디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
“언니...!”
‘무슨 일 있으면 나 부르고!’
아리엘은 그 말을 끝으로 서둘러 자리를 이동했다.
제 시야에서 다급히 사라지는 아리엘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본 앤젤라는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레기를 향해 입술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부스럭
“!!!!”
“헉!!”
근처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에 레기가 황급히 앤젤라를 품에 안고 나무 뒤로 숨었다.
그녀의 입가를 한 손으로 막으며 레기가 긴장된 눈으로 소음의 근원지를 찾았다.
저벅 저벅
‘한 명이 아니야....!’
한 두 명의 발걸음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앤젤라를 말없이 단단히 안아주며 귀를 기울였다.
“여기까지 도망쳤겠어?? 고작 10살은 좀 넘긴 것 같은 아이들이었다고.”
“야, 마법을 썼는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도망쳤어. 그게 애들 짓이라고 생각해?”
“엥?”
“다른 누가 있는 거잖아! 우리가 인원을 다 파악하지 못했던 거야. 그리고 샅샅이 뒤져서 찾아야지 대장한테 안 혼난다고.”
“대장한테 혼나면 무서운데.... 이 새끼들 잡히기만 해봐라...!”
그들의 대화가 레기의 머리에 강하게 박혔다.
‘우리들 인원까지 파악해서 계획적으로 공격했다고...?’
그들은 누구지?
그런 레기의 고민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사내들의 걸음이 점점 앤젤라와 자신에게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둘 다 잡힐지도 몰라...’
레기의 눈이 천천히 앤젤라를 향했다.
다가오는 무서움에 두 눈을 질끈 감은 여동생의 몸이 안쓰럽게 떨려왔다.
‘앤젤라를 지켜야해.’
내가 오빠니까.
레기는 앤젤라를 부드럽게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작게 속삭였다.
“소리치거나 움직이면 안 돼.”
“... 오빠...?”
“알았지? 소리도 내면 안 돼.”
“.... 오빠 무슨...”
“미안해 앤젤라.”
레기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앤젤라의 커진 눈동자를 다정히 바라본 레기는 이내 망설임 없이 앤젤라의 반대쪽을 향해 달려갔다.
일부러 그러하듯 나뭇가지를 꺾으며 소음을 내고 말이다.
“찾았다!!!”
“잡아!!”
“저 쪽!! 저 쪽으로 간다!!”
자신쪽으로 걸어오던 사내들의 발소리가 레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앤젤라의 눈에 경악이 서렸고 다급히 한 손을 레기를 향해 뻗었으니 절대 닿지 못했다.
소리를 내려는 목이 경악에 묻혀 입 밖으로 그의 이름을 내뱉지 못했다.
점차 당황과 극도의 공포에 물들여지는 그녀의 눈이 슬프게 빛났다.
‘레기 오빠...!!!’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는 제 목을 붙잡으며 달려 나가는 레기의 뒷모습을 울부짖으며 바라보았다.
‘언니...!’
앤젤라의 눈이 질끈 감겼다.
“언니...!!”
도와줘.
그러나 레기는 이미 멀어졌다.
*
“야이씨!! 애가 무슨 저렇게 빨라?!”
“잔말 말고 빨리 잡기나 해!!”
사내들의 지쳐가는 소음과 함께 레기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그저 앞만 바라보고 달리고 또 달렸다.
앤젤라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강한 마음이 그의 발을 반복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레기는 목청껏 외쳤다.
“살려주세요!!!!”
울창한 숲을 타고 레기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살려주세요!!!”
타다닥!!
“야! 너 거기 안 서?! 애 맞아?! 이씨..!!”
남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빠르게 달리는 레기의 뒷모습이 굳건했다.
오기와 분노로 눈에 불이 붙은 사내가 있는 힘껏 다리를 박차고 날아 레기의 등을 덮쳤다.
퍽!!
“큭!!”
바닥에 사내와 함께 나동그라진 레기가 두 눈을 질끈 감고 고통을 호소했고 사내는 뻘뻘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이를 악물고 외쳤다.
“너 이 새끼!! 너 때문에 얼마나 달렸는지 알아?! 헉.. 헉...!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탱그랑!
레기의 손가락에서 반지가 떨어져나갔다.
천천히 밝은 빛과 함께 하얀 은발이 나타났고 어두운 숲 안에서 푸른 눈동자가 환히 빛났다.
사내가 커다랗게 변한 눈으로 말했다.
“야... 이 녀석 머리 은발인데??”
“마법반지였나?”
“어쩐지... 대장이 아무나 잡아들이라 하지 않지.”
“야, 일단 묶자.”
한 사내가 품속에서 밧줄을 꺼냈고 곧 엎드려 입술을 꾹 깨무는 레기의 손을 등 뒤로 돌려 묶기 시작했다.
레기의 남색 옷 어깨부근이 짙은 피로 적셔졌다.
사내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러니까 왜 도망쳐? 얌전히 따라왔으면 이렇게 다치지 않았을 것 아냐.”
“하....”
레기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왜 도망쳤냐고...?”
“앙?”
“난 도망친 게 아닌데?”
그의 푸른 눈에 섬뜩하게 휘었다.
사내의 얼굴에 의문이 스치는 것과 동시에 레기가 말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어.”
“.... 얘 뭐라는 거야?”
“황성에서 동, 남, 북을 지키기 위해 뭘 비밀로 하는 지 알아?”
“뭐라고??”
레기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담겼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습을 위한 행군의 경로. 그게 제일 우선시하는 비밀이지.”
“.....?”
“난 그 경로를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고.”
“야, 반말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
“도망치지 마.”
“뭐야??”
“어차피 도망칠 수도 없을 거야.”
레기가 살짝 웃은 것과 동시에 그의 뒤편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콰과과광!!!!
그 살벌한 마력과 검기의 기세에 사내들이 뒤로 나가떨어졌고 검기를 날린 한 인영이 한 걸음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하얀 은발을 찰랑이며 걸어 나온 인영은 레기와 똑같이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내려 바닥에 쓰러져있는 레기를 눈에 담았다.
레기는 그런 인영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고 이내 나직이 중얼거렸다.
“고모...”
레기의 구세주, 리사 도베로만의 등장이었다.
살기가 넘쳐 보이는 리사의 푸른 눈동자가 레기에서부터 사내들에게로 향했고 이내 섬뜩하게 빛났다.
“야 이 개XX들아...”
그녀의 손에 잡힌 검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휘몰아쳤다.
“너네 다 뒤졌어.”
사내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레기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딱 맞춰 자신을 찾아준 리사의 모습이 짙은 안도를 가져다주었다.
아무 생각 없이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리사의 행군의 위치를 기억한 레기의 계획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