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자격이 없었다.
붉은 노을이 들어오는 창가의 손님 방 테이블에서 환한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앉아 있었다.
소년이라기보다는 사내로 변해가기 시작하는 직전의 단계인 모습이었다.
성인이라 부르기도, 소년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남자는 청록색 눈동자로 무르익어가는 노을을 관찰했다.
남자의 이름은 데미언 하트만.
제국에 단 한 명밖에 없는 대신관의 유일한 아들이자 예비 대신관이라 불리는 자였다.
선명한 이목구비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청록색 눈동자가 눈부셨고 굳게 다물린 붉은 입술이 하얀 피부와 대조되어 나이에 맞지 않는 퇴폐미가 진하게 풍겼다.
데미언은 제 손에 끼여진 하얀 면장갑을 정돈하며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고 이내 잔뜩 얼굴을 굳혔다.
딱딱하게 느껴질 만큼 굳은 얼굴로 문가를 향해 시선을 돌린 데미언은 조금씩 제 귀를 자극하는 단정한 걸음소리에 침을 삼켰다.
“.....”
뚜벅 뚜벅
철컥.
이윽고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거대한 문 틈 사이로 큰 키의 사내가 들어섰다.
잘게 흔들리는 부드러운 흑발을 밑으로 날카롭지만 섬세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이목구비가 눈에 띄었다.
눈부신 금빛 눈동자가 천천히 데미언을 시야에 담았다.
사내의 이름은 이엔 프레제.
황제가 직접 지어준 성을 받고 백작의 작위까지 거머쥔 평민 출신의 남자.
그리고 제국 유일한 여성 마스터의 연인.
데미언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이엔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엔의 표정도 자신 못지않게 굳어있었지만 예의를 지켜야 했다.
“데미언 하트만입니다. 이리 갑작스럽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 이엔 프레제입니다. 인사는 그만두고 자리에 앉으세요.”
“그럼 감사히...”
데미언은 천천히 제 자리에 다시 착석했고 이엔은 부드럽게 걸어 그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긴 속눈썹 사이로 빛나는 금색의 눈동자가 테이블에 올려 진 찻잔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을 지나 이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본론으로 먼저 들어가서... 저를 찾으신 이유에 대해 여쭈어보아도 괜찮을까요.”
“......”
이엔의 날카롭게 느껴지는 질문에 데미언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고 어디서부터 제 고민을 표현해야 할까.
망설이는 시간이 길게 느껴질 즘에 데미언은 결국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미 제게 가까워지실 때부터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
스륵
데미언은 조심스럽게 제 오른손에 낀 면장갑을 뺀 후 천천히 이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제 손바닥을 보여주며 힘을 끌어올렸다.
새까만 어둠을 담은 안개가 그의 오른 손바닥 위로 요동쳤다.
이엔의 눈이 딱딱해졌다.
데미언은 그런 이엔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씁쓸히 입안을 다시며 다시 장갑을 꼈다.
다급하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장갑을 낀 데미언은 제 손을 꾹 잡고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보시다시피 제 손은 저주가 가득합니다.”
“......”
“생명을 갉아먹다가 이르게는 그 생명들을 죽이는 능력을 가진 이들을.... 모두 어둠술사라고 표현하더군요.”
“......”
데미언의 청록색 눈동자에 아주 작은 물기가 올라왔다.
“제가 그 어둠술사 중 하나였습니다.”
“.... 데미언님.”
“도와주세요.”
“....!!”
데미언이 침통에 가까운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이 저주를... 제 몸에 있는 이 어둠들을 모두 빼내고 싶습니다.”
“!!!”
“생명을 죽이는 능력 따위 필요 없습니다! 전 신관입니다!”
이엔은 고통스럽게 외치는 데미언의 비명과 같은 말들을 굳은 얼굴로 들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데미언은 참았던 숨을 모두 토해내듯 외쳤다.
“신들을 모시고 생명을 사랑하며 그들을 치유해줘야 하는 신관이 어둠술사라니...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상황이 어이가 없고 화가 납니다! 제 피를 모두 뽑아버리면 가능할까요??”
“진정하세요.”
“진정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이 저주들을 떼어내고 싶어 어둠술사를 찾고 또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고 기록도 적혀져 있지 않더군요.”
“......”
“매일 빈손으로 신전에 돌아오던 차에 백작님을 찾았습니다.”
“......!”
“신전에서 앤젤라님과 함께 대공저로 돌아가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백작님을 보자마자 느낀 기운이... 제 기운과 같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엔의 눈이 가늘어진 것과 동시에 데미언이 말했다.
“프레제 백작님도 어둠술사 맞으시지요.”
“......”
“저는 백작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는 데미언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 능력을 떼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둠은 태초부터 지니고 있는 마력과 동일한 기운입니다. 신체에 담긴 피와 같은 그 능력을 떼어낼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백작님!!”
“죄송합니다. 하지만... 떼어낼 수 있는 능력이었다면 저야말로 데미언님보다 먼저 떼어냈을 것입니다.”
“...!!!”
“저도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해봤지만 이 어둠도 결국은 제 몸의 일부였습니다.”
“..... 하..”
“드릴 수 있는 도움이 제게는 없습니다.”
“.....”
데미언은 장갑을 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어쩌면 예상했던 결과였고 각오했던 상황이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속이 타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데미언은 깊이 한숨을 내쉰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드린 말들은 다른 이들이 몰랐으면 합니다.”
“..... 네.”
“감사합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 인사를 끝으로 데미언은 방문을 벗어났다.
무척이나 피곤했고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자신은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데미언 오빠!”
“....!”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데미언의 시선이 저절로 돌아갔다.
벚꽃이 휘날리듯 아름답게 찰랑이는 분홍색의 머리카락과 사랑스런 얼굴.
늘 다정하던 손을 뻗어 제게로 달려오는 앤젤라를 가만히 바라보던 데미언은 천천히 몸을 곧게 폈다.
“여기로 오셨네요? 이엔을 보러 왔다고 들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 없습니다. 단지... 제국의 영웅을 눈으로 보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랬구나. 실제로 보니까 어땠어요?”
“.....”
데미언은 방금 전 마주한 이엔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날카롭게 느껴질 법도 한 눈매 속에서는 자신과 같은 고통이 엿보였었다.
데미언은 묵묵한 눈으로 창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앤젤라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좋은 분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맞아요! 이엔은 너무 착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 그렇더군요.”
“오빠도 정말 좋은 사람이고요!”
“!!!”
데미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고 앤젤라의 미소가 애틋하게 빛났다.
그 아름다운 미소에 다급히 시선을 돌린 데미언은 자신의 눈가를 쓸었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저 미소 한 번에 마음을 진정시키는 제 자신이 우스웠다.
‘바보 같아...’
어릴 적, 자신을 향해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오는 소녀를 향해 자신은 어떤 모습을 보였던가.
잔뜩 경계하고 날카로워진 눈을 하며 뒤로 물러났었다.
제 앞에서 넘어지거나 고꾸라진 소녀를 향해 어떤 모습을 했던가.
일으켜주지 못하고 쳐다만 보거나 반복해서 뒤로 물러나는 것 말고는 하지 못했다.
그런 제 어디가 좋은 사람이라고 그리 단정하는지 알 수 없었다.
데미언은 잠잠해진 눈으로 앤젤라를 다시 바라보았다.
저 순수해 보이는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과 상상이 들어가 있는지 새삼스럽게 궁금해졌다.
저 올곧아 보이는 신뢰가 자신을 향한 것이 맞을까?
진심일까?
그러나 입 밖으로 그 궁금증을 내뱉지 못했다.
데미언은 버릇처럼 제 두 손을 등 뒤로 감춰 마주 잡으며 말했다.
“시간이 늦어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앗! 저 때문에 늦게 가게 된 건 아니죠?”
“아닙니다. 전 신경 쓰지 마시고 마저 하시던 일을 마무리하세요.”
데미언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앤젤라에게서 다급히 멀어졌다.
제 저주가 혹시라도 장갑 밖으로 새어나오기라도 한다면 저 작은 소녀가 큰일이 날지도 모르니까.
자신 스스로도 제 손이 무서웠으니 급해지는 발걸음이 더 급해졌다.
생명들을 죽일까 전전긍긍하는 신관이라니... 이리 우스운 일도 더는 없을 것이었다.
‘예비 대신관이라고...?’
데미언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담겼다.
‘난 태어났을 때부터 그 자리에서 실격이었던 거야.’
그의 넓어져가는 등이 소리 없이 무너져만 갔다.
*
빠르게 제게서 멀어지는 데미언의 등을 유심히 바라보던 앤젤라는 이내 붉게 달아오른 볼을 하고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언니! 나 티 났어요? 막 눈에 보일정도로 티내고 그래보이지는 않았죠??”
‘너도 참 대단한 아이구나.’
“내가 뭘요?”
‘귀엽다는 뜻이야.’ 아리엘이 동그래진 앤젤라의 눈을 바라보다가 놀리듯 물었다.
‘그렇게 저 녀석이 좋아?’
“네! 좋아해요.”
‘언제부터 좋아했던 거야? 무슨 반하게 된 계기라도 있었어?’
“음....”
앤젤라의 두 볼에 점점 짙은 홍조가 올라왔고 이내 고개를 숙이고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영락없는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모습에 아리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얼씨구, 생각만 해도 좋은가보지?’
“하하하! 비밀이에요.”
‘뭔가 섭섭하네, 우리 사이에 비밀이라니.’
“나중에 이야기해줄게요. 그때까지 좀만 참아요.”
‘그러면 더 궁금한 거 알지? 외모? 성격? 마음? 얼굴이 참 잘생기긴 했지.’
“언니! 쉿!”
‘뭐 어때서? 어차피 내 목소리 안 들릴 텐데...’
“그래도요. 내가 부끄럽단 말이에요.”
앤젤라의 연두색 눈동자가 찌푸려졌으나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담았다.
이미 사라진 뒷모습을 향해 애틋하게 웃은 앤젤라는 얼굴에 가득 오른 홍조를 두 손으로 감추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렇다.
앤젤라는 데미언에게 반했고 반한지 족히 4년은 흘렀을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시작된 깊은 호감과 짙어져가는 마음은 순수한 소녀를 매일 설레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