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의외의 손님
단란한 가족의 식사가 끝날 무렵 세린이 제 곁에 있는 이엔을 향해 물었다.
“이엔은 언제 결혼할 생각이야?”
“.... 예?”
“이제 두 사람 나이도 생각해야지. 나는 적어도 우리 아이들이 10살은 되기 전에 결혼할 줄 알았어.”
“하하하.”
세린의 장난스런 말에 이엔이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아름답게 빛나는 금색의 눈동자를 굴려 나직이 말했다.
“안정적인 모습으로 청혼하고 싶었습니다. 때를 기다리다보니 늦어져서 너무 죄송스럽네요.”
“안정적인 모습?”
“네. 평생 두 발 뻗고 노셔도 전혀 지장이 없을 만큼 풍족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엔의 말에 제이가 물었다.
“리사가 황성에서 벌어놓은 것 만해도 가능했을 텐데... 다른 생각이라도 있던 것인가.”
“제가 벌어놓은 것으로 맛있는 것, 좋은 것을 다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너무 유치한 이유지요.”
“유치하지 않지. 리사도 분명 같은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 것일 테고 말이지.”
제이의 나직한 말에 이엔의 입가에도 미소가 담겼다.
“이번 토벌이 끝나고 돌아오시거든 청혼할까 합니다.”
“!!”
“제일 큰 고민이 황제폐하께서 하사해주신 ‘성’ 이었지만...”
그의 금빛 눈동자에 기쁨이 서렸다.
“어떤 성이든 리사님과 같은 성을 가지고 같은 이름을 불리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 말은...”
“제가 리사님의 성을 함께 사용해도 된다고 하신다면... 그리하려고 합니다.”
테오가 직접 하사해준 제 성을 내려놓더라도 리사와 함께 이고픈 이엔의 마음이 세린에게 와 닿았다.
그의 애틋한 마음이 너무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엔!!”
세린은 환하게 웃으며 이엔을 향해 말했다.
“이엔 너무 멋져! 분명 리사도 수락할거야!”
“그러기를 바랍니다만... 하하, 제가 더 노력해야죠.”
“지금도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 걸? 리사라면 이엔이 노력하고 있는 걸 알고 있을 거야.”
“그렇죠...”
그녀의 반응이 새삼 궁금해졌다.
자신이 청혼을 하고 고백을 하고 그녀의 옆으로 가겠노라고 당당히 말한다면 과연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호탕하고 명량한 그 사랑스런 사람의 반응이 기대가 되는 것과 동시에 걱정도 되었다.
혹시 제 청혼을 기다린 것은 아닐지, 자신이 너무 늦게 마음을 알리는 것은 아닐지 불안한 탓이었다.
그러나 욕심이라는 감정이 물씬 이엔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제 그녀를 욕심내고 자신 혼자서만 차지해도 괜찮은 것이 아닐까.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자신의 안에 놓고 싶었다.
그런 그의 욕심이 스스로도 낯설어서 이엔은 난처하게 웃었다가 이내 밝게 웃었다.
빨리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
같은 시각, 황성에서 일하는 중인 리사는 마차에 실어지는 짐을 체크하며 제 기사단들의 진로를 파악하고 있었다.
저번 토벌에서 다녀온 곳과는 다른 진로를 정해서 행군을 하고 토벌을 하는 것이라 보다 신중해야했다.
초행길에 긴장이 없다면 쉽게 사건과 사고에 휩쓸리기 마련이었다.
지도를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긴 리사의 곁으로 로레인이 다가왔다.
“리사경, 요청한 짐들은 다 실었으니 안심해도 좋아.”
“감사합니다 로레인님.”
“2황자가 아닌 이름을 경에게서 들으니 어색하군.”
“하지만 대마법사로서 곧 새로운 성을 받으신다고 들었습니다. 황성에 마법사로서 계셔주시니 든든합니다.”
“왜 오늘따라 난처하게만 말하는 건가...”
“놀리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길.”
리사의 태평한 대답에 로레인이 할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물품 서류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대는 이엔과 결혼은 안 할 생각인가?”
“그거 좀 놀렸다고 벌써 복수하십니까.”
“안 놀렸다더니... 경의 말은 순 거짓말투성이군.”
“흠...”
리사는 푸른 눈동자롤 돌려 시선을 피하며 서류를 보았다.
로레인은 그런 리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다시 물었다.
“토벌이 끝나면 결혼할건가?”
“에헤이 정말... 남의 결혼사가 그리도 궁금하십니까.”
“이래보여도 이엔을 아껴서 말이지.”
“에?? 아하하하!! 제가 서운해서 말도 못 잇겠네요.”
로레인의 말에 리사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고 이내 근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토벌을 갔다 오면 청혼도 하고 확 잡아먹어버릴 겁니다.”
“저런....”
로레인의 눈이 안타깝다는 듯이 휘어졌다.
“이엔에게 도망가라고 미리 언질을 해야겠어.”
“도망 못 갈걸요? 제가 한 번 물어버리면 잘 안 놔서...”
“그건 그거대로 안타까운 일이군.”
리사의 말에 로레인이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화사한 얼굴을 부드럽게 휘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리 축하하네.”
“그 말씀 감사히 받겠습니다.”
리사의 호쾌한 눈동자가 시원한 바람을 타고 맑게 빛났다.
벌써 토벌을 다녀왔을 때가 기대가 되어 큰일이라고 스스로도 그리 생각했다.
*
다음 날 아침은 금방 밝았다.
황성에서 모인 2기사단들은 행군의 대열을 이루었고 리사는 그들의 앞에서 허리에 한 팔을 올리고 있었다.
기사단의 인원수, 물품 수량, 마차의 개수, 행군의 진로 등 파악해야할 것들을 다시 한 번 씩 살펴보며 출발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리사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엔은 이내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입을 열었다.
“준비는 다 되신 겁니까?”
“응, 다 된 것 같아.”
“폐하께서 오시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뭔데?”
리사의 푸른 눈이 이엔을 올곧게 담았다.
이엔은 기사단들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다치지 마세요.”
“웃겨, 내가 어디 가서 다칠 사람으로 보여?”
“아니요, 하지만 이런 당부라도 하지 않으면 몸을 아끼지 않으시니까요.”
이엔은 천천히 제 눈동자에 리사를 담아가며 말을 이었다.
“사랑하고 있어요.”
“....!”
“리사님이 곁에 없으시면 너무 허전해서... 솔직히 걱정도 되지만 참아볼게요.”
“야...”
“빨리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
이엔의 다정한 웃음과 그 온기를 품은 말에 리사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몇 년을 사랑했고 몇 년을 연애했건만 늘 그의 다정함과 몸에 베어버린 듯한 애정이 그녀의 가슴에 물결을 만들었다.
저 맹목적인 애정에 질릴 일은 앞으로 평생 없을 것이라 감히 장담하며 리사는 시원하게 웃었다.
“좋아. 너도 기대하라고.”
“네?”
“안 재울 테니까.”
“컥!!”
이엔의 표정에 단번에 경악에 물들어지며 잔뜩 붉어졌다.
그 순식간에 바뀐 표정변화에 리사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하!!”
“리사님!”
“진심이니까 장난치지 말라고 하지마라?”
“아, 아니 정말...!”
이엔이 당황하며 얼버무릴 차에 테오가 부드럽게 두 사람의 사이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언제나 한결같군.”
“폐하.”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는 되었네. 토벌 준비는 다 되었나?”
테오의 물음에 리사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출발하라 이르기만 하신다면 언제든 출발할 수 있습니다.”
“얼른 출발하라 해야지 빠르게 돌아오겠지.”
“그럼 감사한 일이지요.”
“괜히 길게 말해서 기사단들의 귀중한 시간을 뺏어버리지는 않겠네. 언제든 준비가 되었다면 출발해도 좋아.”
“네, 다녀오겠습니다.”
“몸조심하도록.”
리사는 테오의 말을 끝으로 근사히 웃으며 외쳤다.
“2기사단 이제부터 북쪽으로 출발하겠다!”
“네!”
“다치거든 나를 한 번 거치고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
기사단들의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이내 행군의 대열에 의해 숨길 수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는 리사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엔은 이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다치지 마시길...’
그런 이엔의 얼굴을 바라보던 테오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리 오랜만에 황성에 온 김에 같이 식사라도 하고 가지.”
“아... 바쁘실 때 찾아뵌 것 같아 죄송합니다.”
“전혀 그런 것은 아니니 따라오도록.”
이엔이 당황스런 얼굴로 테오를 따라 걸어갔고 이내 황성에서 오랜만에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테오가 보내준 마차를 타고 대공저로 돌아가는 이엔의 시선이 하늘로 올라갔다.
조금씩 노을이 저물어가는 주황빛의 하늘이 참 아름다웠다.
‘마을에는 잘 도착하셨을까.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것은 아니겠지...?’
몰론 리사가 사고를 칠 것 같은 부분에서 말이다.
이엔은 그런 생각을 하염없이 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좋은 생각만 해야 좋은 일이 생긴다고 누가 말해줬던 기억이 나서였다.
‘잘 도착하셨을 것이고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그래, 그녀는 누구보다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한 사람이니까.
*
이엔이 그런 생각을 할 무렵 마부가 대공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열리는 마차의 문 사이로 천천히 내려간 이엔은 제 손목을 돌리며 뭉쳐진 근육을 풀었고 이내 대공저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세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엔이 다급히 세린에게 달려가며 물었다.
“전하? 왜 나와 계십니까.”
“네가 다 와간다는 말을 듣고 방금 나온 거야. 급하게 전달해야 할 말이 있어서... 이엔에게 연락을 어떻게 넣어야 할지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잘 됐다.”
세린의 눈이 곱게 휘어지며 다정히 말하자 이엔의 눈이 커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던 겁니까?”
“응, 다른 게 아니라 손님이 왔어.”
“손님이요?”
“널 찾아온 손님이야. 대공저에 오자마자 바로 이엔 널 찾으러 왔다고 하던걸?”
“저를요...?”
“응, 검은 머리에 금색 눈동자를 가진 대공저의 기사를 만나고 싶어 찾아왔다고 콕 집어 말하던데?.”
“....?”
이엔의 눈동자에 의문이 스치자 세린도 비슷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자세한 상황이나 용건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 얼른 들어가 봐.”
“누구신가요 그 분은?”
“대신관님의 아드님.”
“.....!”
“데미언 하트만 이라는 예비 대신관이야.”
이엔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은 것과 동시에 세린이 의문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아는 사이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