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함께 이기에
“데미언 오빠!”
“.... 앤젤라님.”
“어디가요?? 앤젤라도 같이 가요!”
작고 앙증맞은 발을 열심히 움직여 제게로 도착한 조그마한 인영은 볼에 달아오른 홍조만큼 밝은 분홍빛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맑게 웃고 있었다.
데미언은 그 싱그러운 눈동자를 바라보며 침묵하다가 이내 단호히 말했다.
“안됩니다.”
“웅?? 왜여어??!”
“곧 아버지께서 오실 것이고, 아버지께서 오시거든 앤젤라님은 수업을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힝... 난 오빠랑 놀고 싶었는데...”
“본 수업에 집중하시거든 언제든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실 수 있으십니다.”
데미언의 말에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던 앤젤라는 이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울상을 지었다.
데미언은 그런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허물어지려는 입매를 다잡았다.
그리곤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나직이 말했다.
“오늘은 해내실 수 있으십니다. 갈수록 잠도 늦게 드시고 발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앤젤라는 또 잘지도 몰라요...”
“자더라도 어떻습니까. 기회는 내일도, 그 내일도 있습니다.”
“우우.....”
데미언은 더욱 위축되려는 앤젤라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고 이내 두 손을 뒤로 감추며 나직이 말했다.
“전 언제든 기다릴 수 있으니 천천히 하세요.”
“.... 웅?”
“앤젤라님이 잠에 드시지 않으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 앤젤라 잠 안 잘 때까지요?”
“네. 그러니 부디 조급해하지 마세요.”
“앤젤라 기다려주기로 약속한 거예요?”
“네. 약속하겠습니다.”
“와아!!”
앤젤라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 환한 미소와 붉어진 홍조가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저절로 시선이 이끌렸다.
데미언은 그 미소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고 단호하게 말했다.
“곧 수업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가시지요.”
“네에~!”
냉정하게 느껴질 법도 하건만 앤젤라의 미소는 여전히 맑았다.
데미언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녀가 발을 내딛으며 넘어지지만 않았더라면 그 미소는 오래 지속되었을 것이었다.
“으아!”
철푸덕!
“!!!”
무릎을 꿇으며 넘어진 앤젤라가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제 무릎을 바라보았다.
데미언은 그런 앤젤라에게 다가와 면장갑을 낀 두 손을 다급히 뻗었으나 이내 잔뜩 굳은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걱정스런 기색을 면면에 가득한 채운 채로 말이다.
앤젤라는 그런 데미언을 울상을 지으며 바라보다가 이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제 눈물을 닦아 내렸다.
그리곤 다시 밝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나도 안 아파요!”
“.....”
“앤젤라 안 울었어요!”
“.....”
그 씩씩하고 당찬 음성에 데미언의 백금색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거렸고 이내 그 아름다운 눈이 꾹 감겼다.
그의 입술 사이로 서글프게 느껴질 만큼 슬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을 찾아보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앤젤라 안 다쳤는데...”
“사제님께 살펴봐 달라 이르겠습니다.”
데미언은 그 말을 끝으로 앤젤라에게서 멀어졌다.
서두르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앤젤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제 무릎을 바라보았다.
드레스에 숨겨진 무릎이 약간 쓰라렸지만 많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앤젤라는 발로 땅을 비비다가 이내 천천히 베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제게서 멀어지는 데미언에게 조금은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
데미언은 앤젤라에게서 다급히 멀어진 후 지나가는 신관을 붙잡고 말했다.
“앤젤라님께서 넘어지셨습니다. 무릎을 조금 다치신 것 같은데 약을 준비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런... 바르는 연고가 있습니다. 지금 얼른 가져오겠습니다.”
“앤젤라님은 지금 아버지의 수업을 듣고 계실 것입니다. 그쪽으로 보내주세요. 전 급한 일이 있어서...”
“네, 그러지요.”
신관이 고개를 끄덕인 후 서둘러 뒤를 돌아 약을 찾으러 이동하자 데미언은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고개를 앞으로 숙이며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아직 그의 머릿속에는 넘어지며 눈물을 흘리는 앤젤라가 남아 있었다.
잡아 일으켜주지 못한 제 자신이 우스우면서도 한심해서 저절로 입 안이 쓰게 변했다.
‘하나도 안 아파요!’
머릿속을 파고드는 당찬 목소리로 앤젤라가 외쳤다.
데미언은 그 목소리를 되새기며 허탈하게 웃었다.
“아파서 울었으면서...”
눈물이 글썽이기까지 했는데 안 아팠을 것 같지 않았다.
데미언은 천천히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슬프게 휘어진 입을 열어 작게 속삭였다.
“많이 안 다쳤으면 좋겠는데...”
부디 큰 상처가 생기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
아리엘은 우울해 보이는 앤젤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니?”
“.... 데미언 오빠가 앤젤라 싫어하나 봐요.”
“큽...”
“?”
아리엘에게 대답했건만 뒤를 돌아있는 베르에게서 웃음소리가 나타나자 앤젤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다시 아리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자꾸 앤젤라가 막 달려가면 뒤로 걷고, 앤젤라가 막 안아달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하고.”
‘...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 앤젤라?’
“웅?”
‘누군가 막 앤젤라한테 달려오면 앤젤라 놀라겠지?’
“음... 네...!”
‘그리고 데미언 오빠는 아직 8살이라서 앤젤라를 안아주기에는 힘이 부족해.’
“그렇구나! 그럼 앤젤라를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구나.’ 깨달음을 얻은 듯한 앤젤라의 기색에 아리엘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앤젤라.’
“웅?? 네??”
‘이제 수업을 해야지?’
“헉!!”
‘오늘은 자면 안 된다?’
앤젤라의 수업의 시작이었다.
*
같은 시각 대공성.
세린은 티 테이블에 앉아 홍차를 마시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 한숨소리에 제이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세린,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앤젤라가 잘하고 있을까 걱정이 되어서요.”
“흠...?”
제이는 막내딸을 걱정하는 세린의 옆에 앉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다정히 말했다.
“어디를 가든 잘 할 아이가 아닙니까. 저도 걱정이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신관님께서 직접 봐주신다고 하시니 조금 마음이 놓이기도 합니다.”
몰론 그 대신관과 그의 아들에게 앤젤라가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따르는 것이 불안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말을 목 뒤로 넘긴 제이의 미소를 바라보며 세린은 천천히 미소를 담았다.
“그렇겠죠? 앤젤라가 제발 그런 일을 다시는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때를 다시 생각하면 온 몸의 솜털이 모두 곤두설 정도로 무서웠다.
한 번 도 생각해본 적 없는 두려움과 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다시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세린은 제 팔을 잡아주는 제이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잡으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앤젤라가... 성녀라고 한다면... 앞으로 앤젤라는 그 영혼들을 인도하고 그들을 보내주면서 일생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
“평범하게는 살 수 없는 걸까요? 난 우리 아이들이 위대하거나 대단한 업적을 만드는 것까지 바라지는 않았어요. 단지 평범하게 행복한 일, 슬픈 일, 기쁜 일들을 겪어가면서 살아가기를 바랐는데... 죽은 자들의 한을 풀어주면서 살아간다니... 그건 너무 슬프잖아요.”
“세린.”
“그 아이가 그 일을 원한다고 한다면 언제든 그러라고 하고 싶지만... 그 아이가 슬픈 일들만 겪기를 바라지 않아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 제이.”
“그렇지만 세린.”
제이의 푸른 눈이 다정한 온기를 담고 세린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 속의 온기에는 신뢰와 함께 무언가를 결심한 기색이 엿보였다.
“전 우리 아이들이 선택한 일들에서부터 아이들이 행복과 만족을 느낀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라도 찬성입니다.”
“.... 제이.”
“설령 죽은 자들을 바라보고 그 자들을 신의 품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게 될 지라도.”
“.....”
“그 아이가 그 일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면 전 수긍할 것입니다.”
그래, 자식의 행복이 우선이다.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고 행복해한다면 더 이상의 반대나 걱정은 필요 없을 것이었다.
제이는 부드럽게 세린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나직이 말했다.
“성녀로서 살아가겠다고 한다면 저는 막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옳지 않은 길로 걸어가거나 빠져나올 수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땐 우리가 바로잡아주거나 도와주면 됩니다.”
“.....”
“그게 부모니까요.”
“...!!”
“우리는 그저 아이들이 제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그 아이들을 지켜주기만 하면 됩니다.”
세린은 나긋하게 말하는 제이의 말 속에서 짙은 애정과 온건한 신뢰를 느꼈다.
올곧게 나아갈 아이들의 미래가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과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한 치의 불안을 느끼지 않는 그 모습이 세린의 눈을 커지게 만들었다.
세린은 그런 제이를 바라보며 반성했다.
아이들을 향한 그의 마음과 비교되는 불안과 걱정만 가득한 제 마음 탓이었다.
세린은 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다정히 웃었다.
“제이 말이 맞아요. 그게 정답 이었어요 제이.”
“세린.”
“제이 말처럼 우린 아이들이 행복하다고 한다면 믿고 지켜봐줘야 했어요. 난 늘 걱정만하고 불안해만하고...”
“걱정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하지만 믿어주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 맞아요.”
세린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무리 배우고 배워도, 겪고 또 겪어보아도 부모의 역할이란 끝도 없이 새어나왔다.
다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늘 부족했고 다 이해한다고 하지만 완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세린과 제이는 세 아이들을 통해 천천히 부모에 대해서 알아나갔고 누구보다 강한 부모로 성장해나갔다.
함께 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