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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157화 (156/218)
  • 157화. 성자, 성녀

    다음 날, 밝은 아침 햇살 사이로 앤젤라의 연두색 눈동자가 떠졌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눈부시게 하얀 은발이었고 동시에 굳게 감겨있는 제 아빠의 얼굴이었다.

    앤젤라의 눈이 확 밝아지며 이내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시원한 향기가 그녀의 코를 자극했다.

    그런 그녀의 등에 부드럽게 손을 올린 제이는 나직이 웃으며 앤젤라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잘 잤니?”

    “아빠! 앤젤라 잘 잤어요!”

    “다행이구나. 아빠도 잘 잤단다.”

    “헤헤헤 아빠 좋아요.”

    앤젤라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그의 볼에 제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그 부드러운 감촉에 나직이 웃은 제이는 이내 앤젤라를 가볍게 들어 올려 안아주며 검지를 제 입가에 댔다.

    “쉬이... 오빠들과 엄마는 아직 꿈나라구나.”

    “으아... 쉬잇!!”

    앤젤라의 동그란 눈동자에 깊이 잠든 세린과 그런 그녀의 품에 안겨 잠든 레기, 그리고 그녀의 옆에서 곱게 잠든 에드가 담겼다.

    가족의 잠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앤젤라가 제 두 팔로 입을 막으며 제이를 바라보았다.

    그 귀여운 모습에 제이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볼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세린은 앤젤라가 너무도 걱정되어 밤을 지새우며 딸을 뒤다 보다가 뒤늦게 잠이 들었다.

    분명 피곤할 것이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해준 뒤에 깨워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제이의 시선이 부드럽게 앤젤라를 향했다.

    키득키득 웃으며 즐거워하는 딸을 보고 안도했으나 알게 모르게 그의 푸른 눈에는 분노와 같은 감정이 일렁였다.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불면 날아갈까 무서워서 제 손 하나를 까딱하지도 못 했던 소중한 딸이었다.

    그런 딸의 작은 손목에 담긴 짙은 멍을 제이는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누구든 찾게 된다면....’

    뒷말은 생각하지 않았으나 예상이 가능했다.

    잔혹해질 뒷말을 목 뒤로 넘긴 제이는 부드럽게 앤젤라를 안고 가족들의 이불을 정돈해준 후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서기 전 세린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전에 가봐야 하니 일단 마부에게 가서 마차를 대기시킨 후 세린과 아이들을 깨워 밥을 먹이고 신전으로 이동을 할 계획이었다.

    그런 그의 계획 속을 함께 이행하게 된 앤젤라는 그저 기쁘게 웃으며 제이의 목에 팔을 둘렀다.

    아빠와 함께 둘이서 돌아다니는 것은 너무도 오랜만이라 기분이 좋아진 탓이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어!”

    “앤젤라?”

    “아, 아니에요!”

    앤젤라의 놀란 듯한 음성에 제이가 의아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으나 앤젤라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놀란 음성의 이유는 앤젤라의 시야에 담긴 아리엘 때문이었다.

    어제부터 안 보이던 터라 걱정을 했던 앤젤라였기에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주지 못했으나 앤젤라는 누구보다 환하게 웃으며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아리엘도 반가운 기색이 만연한 앤젤라의 표정에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말이다.

    그 후에는 모두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제이는 앤젤라와 함께 마장으로 향해 마차와 말을 대기시켰고 주방으로 향해 아침밥을 준비시켰다.

    그리곤 아직도 곤히 잠든 두 아들과 아내를 부드럽게 깨우기 시작했다.

    “세린.”

    “우음....”

    “일어나야지요. 벌써 아침입니다.”

    “너무 졸려요오...”

    “어머니 레기도 졸려요...”

    제이의 부드러운 음성에 뒤척이는 세린의 품에 파고들며 레기도 투정을 부렸다.

    두 사람의 잠투정이 너무도 귀여운지라 제이의 입가에 담긴 미소가 짙어졌다.

    “아침을 준비시켰습니다. 얼른 가서 먹고 신전에 가야지요.”

    “음?.... 헉! 맞아요, 신전...!”

    제이의 말에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난 세린은 제 품에 안기는 레기와 에드를 양 팔로 두드려주며 아들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우리 멋쟁이들! 일어나세요.”

    “우우웅...”

    “우리 레기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리 늦잠을 잤지? 피곤하니?”

    “아니요.. 레기 안 피곤해요..!”

    세린의 다정한 물음에 레기가 서둘러 눈을 비비며 제 스스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씩씩한 모습이 무척이나 의젓한 것과 동시에 웃음이 나올 만큼 귀여워서 제이와 세린이 키득키득 웃음을 참았다.

    항상 부지런한 레기의 늦잠과 잠투정이 드문 상황인지라 지금 이 순간의 그가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에드도 안 피곤해요!”

    에드는 여전히 눈이 감긴 채 형을 따라 간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은 자고 있는데 몸은 일어났으니... 그 모순적인 모습이 귀엽기도 했고 동시에 우습기도 했다.

    사랑스런 아이들의 기상에 세린과 제이는 아이들을 챙겨 식당으로 향했다.

    얼른 밥을 먹고 신전으로 가서 신관님을 만나 앤젤라의 상황에 대해 알아야 했다.

    *

    하나의 예술품처럼 여신들의 조각상들로 장식된 대신전의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빛났다.

    마치 세린과 가족들이 올 것을 알았다는 듯 신전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열린 문 안으로 붉은 색의 카펫이 길게 깔려있었다.

    그 카펫을 밟으며 앞으로 걸어 나가자 금색과 하얀색으로 장식된 신관의 복장을 한 대신관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세린과 제이를 마주하자마자 부드럽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영광입니다. 교주님.”

    세린과 제이의 인사에 대신관이 화사한 백금발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더 감사드리지요. 이리 귀하신 분들과 인연이 닿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좋은 차가 있습니다.”

    대신관의 안내에 제이와 세린, 그리고 세쌍둥이는 부드럽게 그를 따랐다.

    몰론 아리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리엘은 자신을 분명하게 바라본 대신관의 눈을 관찰하다가 이내 그의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제가 곁에 있다는 걸 말하지 말아주세요.’

    “.....”

    ‘그게 힘들다면 적어도 제가 누군지 모르게만 해주세요.’

    아리엘의 말에 대신관의 백금색의 눈동자가 살짝 커지다가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담았다.

    긍정에 가까운 미소에 아리엘이 천천히 그에게서 멀어졌다.

    이윽고 도착한 서재에서 대신관은 세린과 제이에게 차를 내주었고 세쌍둥이들에게 달콤한 향기를 품은 쿠키를 내어주었다.

    그리곤 다정한 시선으로 앤젤라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세린과 제이를 향해 물었다.

    “왜 이런 곳까지 오셨을지 예상은 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듣기 힘드실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자녀분들의 말동무로 제 아들을 소개해드려도 될까요.”

    “그런... 너무 죄송해서....”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아들이 워낙 스스로 외로움을 만드는 아이라 이리 밝으신 분들이 곁에 잠시 있어주시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신관의 나직한 말에 세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전했고 대신관은 빙긋 웃으며 책상에 놓인 벨을 울렸다.

    하급 신관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대신관이 나직이 말했다.

    “데미언을 불러 주겠니.”

    “네.”

    대신관의 말에 신관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떠났고 이내 누군가 부드럽게 다시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대신관을 닮은 백금발이 눈에 띄었고 총명하게 빛나는 청록색의 눈동자가 아름다웠다.

    이제 막 7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아이는 부드럽게 세린과 제이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베르 하트만 대신관님의 아들 데미언 하트만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곤 부드럽게 세쌍둥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려 말했다.

    “부족한 몸이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귀하신 분의 시간을 제게 빌려주셔도 괜찮을까요.”

    “웅?? 앤젤라요?”

    “세 분 모두입니다.”

    “레기, 에드, 앤젤라. 다녀오렴. 엄마랑 아빠가 금방 데리러 갈게.”

    “웅.... 네에.”

    세린의 다정한 말에 레기와 에드는 앤젤라의 양 손을 잡아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데미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세린은 그런 네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대신관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굉장히 성숙하고 총명한 아이 같아요.”

    “하하하. 제겐 아직 어린 아이 같습니다. 어른을 흉내 내려는 어린 아이지요.”

    대신관의 백금색의 눈동자가 작은 물결을 치며 일렁였다.

    “제 감정에 서툴러서 솔직하지 못하고 숨거나 숨기기 바쁜 여린 아이입니다.”

    그 물결 속에 담긴 애정이 눈에 띄어서 세린의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세린은 조금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제 드레스를 쥐었다가 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은... 다름이 아니라 딸아이가 걱정이 되어서 이리 갑작스럽게 찾아왔어요.”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가지고 있는 마력이 마법사나 검사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아이에요. 그런데 워낙 몸이 약한 것에 비해 그 특이한 마력이 방대해서 조심하며 지내는데... 평소에 허공을 보며 자주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듯이 보이더라고요. 그게 그 마력과 혹시 연관이라도 있는 것일지...”

    “흠...”

    “그리고 어제 갑자기 나타난 사람으로 인해서 다쳤었어요. 그 사람의 몸이 불투명해서... 이것도 연관이 있을까 해서...”

    “!!”

    대신관의 눈이 커졌다.

    “불투명한 몸이요?”

    “네... 아이를 갑자기 공격해서... 그게 뭔지 저는 도저히 알 수 없어서요...”

    “......”

    대신관은 제 턱을 천천히 쓸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시선을 올려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는 부부를 향해 입술을 열었다.

    “따님분이 특이한 마력과 허공을 보며 이야기하시는 것의 연관성은 깊습니다. 어제 따님을 공격했다던 그 불투명했다던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

    “따님이 보시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입니다. 그리고 따님의 마력은 죽은 자를 실체화 시키거나 신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는 태초의 마력이고요.”

    “...!!!!”

    “한마디로 따님은 ‘성자’라고 보셔도 됩니다. 아니, ‘성녀’라고 불리셔도 되겠지요.”

    죽은 자를 인도하고 그들의 한을 풀어주는 자.

    그들의 혼에 힘을 불어넣어 실체를 쥐여 줄 수 있는 자.

    사람들은 이를 ‘성녀’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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