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세린의 분노
황성의 복도에서 거대한 빛들이 터졌다.
눈부시게 일렁이는 연두색의 막 안에서 세린은 앤젤라를 품에 안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자는 누구지? 누구인데 황성에 들어올 수 있던 거야? 그보다 왜 앤젤라한테...’
세린은 제 품의 작은 딸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물었다.
“누구야 당신...”
‘...... 아이를 내놔.’
“뭐?”
‘아이를 내놔!!’
“!!!”
마력으로 둘러진 막을 향해 인영이 빠르게 달려왔다.
쿵!
그러나 세린이 쳐둔 막 안으로 들어설 수 없었다.
밝은 세린의 마력의 빛을 통해 인영의 모습이 확연하게 세린의 시야에 담겼다.
불투명하게 보이는 신체의 모습이 강하게 시선에 박히자 세린의 눈이 커졌다.
‘몸이...’
‘내놔!! 내놓으라고!!’
“.....”
‘살아야 해!! 나한테 다시 삶을 달란 말이야!!!’
“.... 그게 무슨...”
“으아아앙!!”
분노가 서린 인영의 외침에 앤젤라가 눈물을 터트렸다.
세린은 놀란 눈으로 앤젤라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녀의 몸을 살폈고 이내 앤젤라의 팔에 남아있는 짙은 멍 자국을 발견했다.
“!!!”
세린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짙은 고통과 분노에 세린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세린의 연두색 눈동자가 천천히 제 막을 건드리는 인영을 향했고 감정을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딸은 네 물건이 아니야.”
‘내놔!!!’
“손대지마!!”
콰과광!!
세린의 분노에 찬 외침과 동시에 강한 마력이 그녀에게서 분출되었다.
뭉쳐진 마력의 소용돌이가 황성의 복도의 기둥들을 날려버렸다.
기둥의 잔해들이 바닥에 처참하게 떨어져 내렸고 앞에 서 있던 인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죽은 건가? 아니, 애초에 몸이 불투명했어... 마치 탁한 물처럼.’
그녀가 의문을 품은 것과 동시에 세린의 옆으로 차가운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휘릭!
“??”
세린이 앞을 바라보았으나 여전히 그녀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타다다닥!
자신이 있는 방향을 향해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리자 세린은 온 몸을 휘감은 긴장을 조금씩 풀었다.
이윽고 복도의 끝에서 제이가 나타났다.
하얀 은발을 휘날리며 창백해진 얼굴로 황급히 달려온 제이는 세린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를 살피며 물었다.
“다친 것입니까? 무슨 일입니까! 얼마나 다친 겁니까!”
“제이...”
“세린!”
“아빠... 오빠들까지...”
세린은 제 곁으로 몰려온 제이와 에드윅, 로레인, 테오를 향해 안도에 찬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에드윅이 세린의 품에서 눈물을 훌쩍이는 앤젤라를 발견하고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앤젤라! 다친 것이냐.”
“앤젤라 손목이...”
로레인은 세린의 품에서 삐져나온 작고 통통한 손이 푸른 멍으로 뒤덮인 것을 발견하고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야!”
“미안해 앤젤라. 삼촌이 금방 낫게 해줄게.”
“으응.... 힝....”
로레인의 푸른 마력이 그녀의 손목을 감싸기 시작했다.
천천히 나아가는 그녀의 손목을 유심히 바라보는 제이의 푸른 눈이 무섭도록 섬뜩하게 빛났다.
제이는 세린을 향해 나직이 물었다.
“누굽니까.”
“제이...”
“누가 앤젤라와 당신에게 이런 짓을 한 겁니까.”
당장이라도 검을 꺼내서 그를 찾아내 베어낼 기세였다.
세린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아까까지 존재했던 그 인영의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내려 앤젤라를 바라보았다.
“앤젤라.”
“흑....”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아니?”
“몰라요....”
“지금 네 눈에는 어때? 그 사람이 보여?”
세린의 부드러운 물음에 앤젤라는 세린의 품에서 고개를 살짝 들어 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텅 비어있는 복도는 그저 어지러운 기둥의 잔해들로 어지럽혀 있었다.
“없어요...”
“그렇구나. 알겠어. 많이 놀랐지?”
“.... 엄마아아...”
“그래 우리 딸. 엄마 여기 있으니까 울지 마렴.”
세린은 훌쩍이는 딸을 꼭 안아주며 제이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제이.”
“.... 네.”
“앤젤라를 데리고... 대신전에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로레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으나 아무도 그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제이는 동그랗게 변한 눈동자로 그녀를 향해 물었다.
“대신전이요.”
“네... 앤젤라에게만 보이는 것들도 방금 그 상황도 연관이 있을 것 같아요.”
“지금 마차를 준비시키겠습니다.”
“앤젤라가 지쳤을 거예요. 내일 아침에 출발해요 우리.”
“당신의 말대로 하죠. 앤젤라, 이리오렴. 아빠와 자자꾸나.”
“아빠아....”
제이가 부드럽게 두 팔을 뻗자 앤젤라는 잔뜩 슬프게 일그러진 얼굴로 제이의 품에 안겼다.
제이는 그런 제 딸을 품에 꼭 안아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천천히 침실을 향해 걸어갔다.
세린은 그런 제이와 앤젤라를 바라보다가 이내 에드윅과 테오, 로레인을 향해 말했다.
“늦은 밤에 소동을 일으켰네요...”
“무슨 일인 것이냐.”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갑자기 어떤 사람이 앤젤라의 팔을 잡아서 들어 올린 것을 보고 놀라서... 몸이 불투명한 사람이었어요... 아무래도 앤젤라가 평소에 혼자 허공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랑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요... 내일 대신전에 가보고 조사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불투명?”
“네... 탁한 물처럼 몸이 불투명했어요.”
그 상황을 다시 되짚어본 세린이 제 한 팔을 껴안으며 두려운 눈으로 말했다.
“아이한테 그런 일이 반복해서 생긴다면.... 전 무서워서...”
“세린. 그런 생각 하지 말거라.”
테오가 부드럽게 세린의 팔을 잡아주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도 옅은 걱정이 서렸으나 이내 부드럽게 말했다.
“내일 신전에서 이야기를 듣거든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최대한 이 일과 관계된 상황과 사건들을 찾아보마.”
“오빠... 고마워요.”
로레인도 이내 부드럽게 세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여기는 내가 정리할 테니 너도 들어가서 쉬어. 아버지도 형님도요.”
“레인 오빠...”
“얼른.”
“네... 고마워요 오빠.”
세린은 로레인의 다정한 모습에 힘없이 웃으며 방으로 걸어갔다.
그 걱정스런 뒷모습이 안타까웠으나 제 할 일은 명확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조사를 해서 앤젤라에게 이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처하는 것.
*
“으아앙!! 엄마아아!!!”
아리엘은 복도를 울리는 앤젤라의 비명을 듣고 경악스러운 얼굴로 서둘러 발을 놀렸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시간은 단 5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앤젤라에게 위험한 상황이라도 생긴 것인가.
아리엘이 다급히 황성의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여린 여인의 뒷모습이 눈에 담겼다.
그 가냘픈 등이 앤젤라를 강인하게 품에 안고 있었고 구불거리는 분홍빛 머리카락 사이로 뻗은 한 팔에는 제 눈동자 색처럼 청량한 마력이 강하게 휘몰아쳤다.
“손대지마!!!”
분노가 서린 굳건한 음성 사이로 제 하나뿐인 딸이 자식을 지키기 위해 마법을 난사했다.
아리엘은 그 아름다운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 건너편에 존재하는 한 영혼을 발견했다.
불투명하듯 선명한 몸을 보니 앤젤라의 마력을 통해 잠시 제 몸을 실체화 시킨 것이 분명했고 앤젤라의 손목에 난 멍을 보니 이미 그녀에게 해를 끼치려 한 것이 선명했다.
아리엘의 눈에 짙은 죄책감이 담겼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앤젤라....’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세린의 마력과 빛들을 사이로 아리엘은 영혼을 향해 다가갔다.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세린의 옆을 지난 아리엘은 바닥에 처참하게 엎드린 영혼을 눈에 담았다.
‘멍청한 것...’
아리엘의 눈이 서글프게 일그러졌다.
영혼은 소리를 죽이며 울고 있었다.
‘살고 싶어...’
‘그래서 멍청하다는 거야 네놈들이...’
‘살고 싶었어... 흑.... 아내한테... 다시 돌아가고 싶었어....’
‘멍청아. 지금 상황부터 파악해. 너 진짜 소멸될 뻔했어. 알아?’
실체화된 상태로 저런 마력을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영혼이 통째로 소멸되었을 것이다.
실체화된 영혼은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자신도 그 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엘은 흐느끼는 영혼의 목덜미를 잡고 그를 끌고 가며 앤젤라에게서 멀어졌다.
‘가자.’
‘살고 싶어....’
‘소멸되면 네놈이 그토록 보고 또 봤던 아내도 못 본다고.’
‘흑.....’
‘.... 차라리...’
그래, 차라리.
소멸되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그게 편했을 수 도 있겠지.
아리엘의 눈에 서글픈 감정을 끌어 모았지만 이내 영혼을 이끌고 어둠속으로 들어섰다.
한 곳에 뭉쳐있는 영혼들 사이로 잡아 끌은 영혼을 던지듯이 내려놓은 아리엘은 말했다.
‘저 아이를 건드리지 마.’
‘......’
‘너희들이 건드리고 또 건드려봤자 한 번 죽은 인간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아리엘은 냉정히 뒤를 돌아 앤젤라가 누워있는 방으로 향했다.
하얀 은발을 가진 건장한 사내의 품에서 속이 시원할 만큼 울은 듯한 눈으로 잠이 든 앤젤라가 시야에 닿자 아리엘의 눈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제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우지만 않았어도 상황이 이리 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미안해...’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는 날까지 지켜줘야겠다고 약속했는데.
아리엘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벽에 기대어 두 팔에 팔짱을 꼈다.
생각해야 했다.
앤젤라가 안전해지는 방법을.
지금 상황에서 제일 큰 문제는 앤젤라가 무의식적으로 흘려버리는 마력.
그 태초의 마력을 조절해야만 그녀가 안전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력운용이 필요할 것인데... 아직 4살인 어린아이가 이런 운용을 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해봐야겠지.’
그래. 저 아이가 제 스스로를 지키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아리엘은 잠이 든 앤젤라를 덤덤하게 바라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제부터 연습 또 연습이다.’
앤젤라와 아리엘의 특훈의 막이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