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그들의 밤
그날 밤, 몸을 씻고 온 제이는 달을 바라보고 있는 세린을 뒤에서부터 감싸 안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제이, 왔어요?”
“네.”
세린이 조금 반가운 마음을 담으며 그를 바라보았고 이내 부드럽게 그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처음... 제이와 결혼식을 올리고 대공작 성에 왔을 때가 생각이 났어요.”
“신혼이라 놀림 받던 때군요.”
“하하하, 맞아요. 뭔가 지금 상황이랑 그때랑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더라고요.”
“흠....”
세린의 말을 유심히 듣던 제이는 이내 푸른 눈동자를 번뜩이며 다정히 말했다.
“세린.”
“네?”
“우린 오늘 두 번째로 결혼식을 올렸지요.”
“어... 그렇죠? 제이 덕분에 결혼식도 두 번이나 했네요.”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신혼인 것이 아닌가요.”
“엥...? 음... 따지고 보면 신혼인거겠죠...”
“신혼 첫 날밤.”
“!!!!”
“우린 뭘 해야 할까요.”
제이의 질문에 세린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제, 제, 제이??”
“그때랑 똑같은 표정이신 것을 아시는지...”
“아, 아니! 뭔가 당황스러워서...”
“벌써 당황하실 필요는 없지요. 이제 시작인데...”
“에에??!”
세린의 입에서 나타나는 요상한 비명을 입맞춤으로 멈춰 세운 제이는 부드럽게 세린의 가운을 끌어내리고 침대에 눕혔다.
세린의 분홍빛 머리카락이 하얀 이불보 위로 흐트러졌고 부드러운 머릿결 밑으로 홍조가 가득한 아름다운 얼굴이 달빛에 빛났다.
붉은 입술 사이로 나오는 작은 숨소리와 잔뜩 떨리는 연두색의 눈동자가 그의 피를 마르게 만들었다.
심한 갈증 속에서 제이는 세린의 입술을 삼켰다.
부드럽지만 거친 입맞춤 속에서 제이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부드러운 허리를 지난 손이 봉긋한 정점에 닿았고 그녀의 신음이 거칠어졌다.
“윽!”
제이의 손이 다시 아래로 옮겨가며 그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약한 곳만 공격하는 그의 손가락에 세린은 정신이 없었다.
“제이..!”
“쉬이...”
세린의 부름에 부드럽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제이가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 저도요...”
세린의 손이 부드럽게 제이의 고개를 감쌌고 그의 푸른 눈동자를 올곧게 마주 바라보며 그녀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정말 사랑해요. 내 모든 것을 제이에게 줄 수 있을 만큼이요.”
“.... 당신은 정말....”
짙은 한숨을 쉰 제이는 세린의 속삭임을 들으며 한 번에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윽!!!”
크게 몸을 움찔거린 세린이 그의 어깨를 두 팔로 감쌌다.
제이는 그런 세린의 얼굴에 입을 맞춰주며 이내 몸을 움직였고 그와 그녀의 호흡이 거칠게 뒤섞였다.
아름다운 보름달이 뜬 밤이었고 두 부부에게는 무척이나 애틋한 밤이었다.
달이 천천히 산을 넘어가기 시작할 때까지도 두 사람의 방 속의 거친 호흡은 멈추지 못했다.
두 사람의 두 번째 첫날밤이었다.
*
어두운 밤, 황성에는 선명한 보름달이 하늘 가운데를 차지하며 제 자신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달빛 아래에서 세린과 제이의 세쌍둥이들은 함께 이불을 덮고 잠들어 있었고 아리엘은 그런 아이들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귀여운 것들...’
그래, 너무도 귀여워 두 팔로 안아주고 싶었고 보듬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리엘은 제 불투명한 손을 바라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앤젤라의 마력이 워낙 방대하고 풍부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실체화를 할 수 있었고 앤젤라의 마력으로 마법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 실체화를 하거나 마력을 사용하게 된다면 작은 손녀에게 무리가 갈 것을 알고 있었다.
마력을 다루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그 태초의 마력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었다.
앤젤라가 아무 생각도 없이 내뿜는 마력들을 향해 달려들려는 영혼들의 수만 헤아려도 그 위험도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이 소녀의 주변을 벗어날 수 없었다.
불안했기에.
“움냠....”
‘잘도 자는구나.’ 앤젤라가 잠꼬대를 하면서 제 몸을 뒤척였고 옆에서 곤히 잠든 레기를 꽉 껴안았다.
아리엘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 피어났다.
‘에구구 귀여워라... 보면 볼수록 세린을 쏙 빼닮았다니까.’
그게 날 닮은 것이랑 별반 다르지 않으니 날 닮았다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우스운 생각을 하는 아리엘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가며 이윽고 문가를 바라보았다.
문가에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길게 흐트러트린 제복 차림의 로레인이 서 있었다.
‘레인...’
저절로 그의 애칭을 부르며 그를 바라보는 아리엘의 눈동자에는 지독한 슬픔이 담겼다.
로레인은 당연하게도 그런 아리엘의 부름을 듣지 못하고 천천히 아이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털썩
아이들의 침대 옆 의자에 자리한 그는 세 아이들의 이불을 정리해주며 애틋하게 미소를 지었다.
힘없는 그 미소에 아리엘의 눈이 슬프게 휘었다.
친모의 기억을 읽은 후부터 저런 모습으로 웃는 아들이 안쓰럽기만 했다.
그러나 그에게 그 기억을 준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앤젤라의 손에서 세어 나온 마력을 사용해서 그녀의 기억을 그의 머릿속에 주입시킨 이유는 하나였다.
그가 페르돈의 더러운 피가 아닌 그 고운 여인의 피를 가지고 그녀의 품에서 태어난 것임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의 행복을 바라며 그를 낳은 여인, 그의 행복을 바라며 그의 이름을 지은 여인.
그리고 마찬가지로 로레인의 행복을 바라던 제 자신.
로레인이 그 것을 깨닫고 이제 그만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 했던 것이었다.
‘넌 페르돈의 아이가 아닌 나와 그 여인의 아들이니까.’
그런 그녀의 애탄 마음을 느꼈는지 로레인의 시선이 천천히 창문가로 옮겨갔다.
아리엘을 향해 고개를 올린 로레인은 입술을 꾹 다물고 다시 시선을 내렸다.
‘...... 레인.’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있어요.”
‘...!!’
“나한테 그 사람의 기억을 준 것도 어머니라는 것도 알고 있고요.”
‘......’
아리엘의 시선이 저절로 빳빳해졌다.
로레인은 제 양손을 깍지 끼며 자조적으로 웃었고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어머니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내가 도대체 뭐라고...”
‘.....’
“두 분 다 나에 대해 몰랐으면서 왜.... 그분은 왜... 얼굴도 모르는 나를 위해 죽을 것을 알고 날 낳으신 걸까요.”
아리엘의 연두색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러나 로레인의 눈에는 이미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피를 토하듯 괴롭게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어머니도...! 피를 잇지도 않은 거의 남남이었을 날 위해 왜 그리 사랑을 주고 헌신을 했죠?”
‘로레인....’
“난 왜!!”
그가 절망했다.
“... 내가 그런 과분한 사랑을 받은 줄도 모르고 살아서...”
‘......’
“내 피는 더럽다고... 내 피는 죄인의 피라고.... 난 그냥 행복할 수 없다고.... 바보 같이...”
그의 어깨가 무너졌다.
쌓아둔 고통스런 감정들이 폭발을 했고 아리엘은 그런 아들을 눈으로 밖에 바라볼 수 없었다.
로레인은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땅이 눈물방울로 촉촉이 적셔졌다.
아리엘은 무너지는 아들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입술을 꾹 깨물고 그에게 다가갔다.
앤젤라의 손에서 미세하게 흘러나온 마력을 제 몸에 두르고 말이다.
번쩍이는 빛과 함께 불투명한 아리엘의 손이 아주 조금 선명해졌다.
아리엘은 그런 제 손을 뻗어 망설임 없이 슬피 우는 아들을 껴안았다.
옷깃이 스치는 소음과 로레인에게서 뿜어지는 생기가 넘치는 온기가 그녀의 품에 가득 찼다.
“!!!!”
로레인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아리엘은 그런 로레인의 어깨에 고개를 올리며 속삭였다.
“더럽지 않아.”
“... 어, 어머니....?”
“넌 내 아들이야.”
“.....!!”
“누가 뭐라고 해도 넌 내 아들이야.”
아리엘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 여인에게도 나에게도 네 행복이 너무 중요했어.”
“......”
“네가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이 너무 중요했어.”
“어머니....”
“제발 네 스스로를 몰아세우지마. 네 이름처럼 살아.”
“......!”
“네 피의 반은 그 여인의 피고 나머지는 내 피라고 하자. 넌 나와 그 여인의 소중한 아들이니까.”
로레인의 입술이 꾹 깨물어졌다.
아리엘은 그런 아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이내 나직이 속삭였다.
“네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야.”
“....”
“행복하게 살아.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어머니....!”
“내 걱정도 하지 마.”
아리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난 스스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
“자식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로 능력이 없지 않단다.”
그 말을 끝으로 빙긋 웃은 아리엘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실체화가 풀린 것이었다.
로레인은 그런 허공에서 아리엘의 흔적을 찾고 또 찾다가 이내 깊은 한숨을 쉬며 제 얼굴을 쓸었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으며 나직이 말했다.
“그래도 찾을 겁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방법.”
그의 단호한 말에 아리엘이 투덜거렸다.
‘.... 저 고집....’
“어머니께서 지금 앤젤라의 옆에 계시는 덕분에 앤젤라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아이가 안전해질 방법도 제 선에서 최대한 찾아볼 것이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방법도 찾아보겠습니다.”
로레인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이어 말했다.
“아버지한테나 가족들에게는 말하지 않을 것이니 이 점은 안심하세요..”
‘......’
“..... 그 분의 기억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어머니는 당신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로레인은 부드럽게 뒤를 돌아 방을 나섰다.
아리엘은 그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이내 따뜻하게 미소를 지었다.
안정을 되찾은 듯 보이는 아들이 참 기특하기도, 애틋하기도 했다.
멀어지는 아들을 향해 아리엘이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도 내 아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