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세린과 제이
황성의 일을 전혀 모르는 세린과 제이는 평화로운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곧 내일 아침이면 ‘하얀 바다.’라고 불리는 꽃밭의 마을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세린의 볼을 잔뜩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제이는 그런 세린의 작은 몸을 안아주며 물었다.
“그리도 기대가 되십니까.”
“네!! 아무리 생각해도 하얀 꽃들이 바다처럼 펼쳐졌다고 하니... 너무 너무 예쁠 것 같아요.”
“아주 예전에 보았던 기억뿐인지라 무엇이 바뀌었을지 여전히 아름다울지 장담을 할 수 없어 조금 걱정도 됩니다.”
“꽃 한 송이만 있어도 제 눈에는 제일 예쁠 거라고 장담해요.”
“남편 듣기 좋으라고 예쁜 말씀만 하시니... 세린의 책임입니다. 입 맞춰드려도 되겠습니까.”
“.. 제, 제이!”
“진심입니다만.”
“아니 정말...”
제이는 당황이 가득 묻은 세린의 볼에 입을 맞추며 나직이 웃었다.
그의 키득거림에 세린이 입술을 쭉 내밀었으나 제이는 그런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잡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눈은 감아주세요.”
“제이.... 나빴어요...”
“그런 제 심보마저도 사랑해주시니 기쁩니다.”
“익! 바보에요!”
“네, 바보지요.”
세린의 투정도 부드럽게 받으며 제이가 이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깃털이 내려앉은 것 마냥 부드러운 감촉에 세린의 눈도 자연스럽게 감겼다.
늘 그러하듯 달콤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마차가 마을에 도착했음을 알리며 자리에서 멈췄다.
“벌써 마을에 도착했나 봐요.”
“그렇군요. 시간도 그렇고... 시장하십니까.”
“조금 배고파요.”
“그러면 방을 먼저 잡고 나서 그곳에서 식사를 하도록 하죠. 따로 먹고 싶었던 것이나 먹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까.”
“음....”
세린의 입술이 깊은 고민으로 쭉 내밀어졌다.
제이는 그 버릇 같은 세린의 입술이 귀여워 유심히 그 모양새를 관찰하기 시작했고 말이다.
“예전에 제이가 사줬던 닭꼬치도 먹고 싶어요!”
“그게 그리 맛있었습니까.”
“네!! 엄청요!!”
그 맛을 다시 상상해보자 느껴지는 튀김의 바삭함과 고기의 촉촉함에 세린이 침을 꿀꺽 삼켰다.
오래 마차를 타서 몸이 피로했고 배도 무척이나 고팠다.
제이는 그런 세린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짐을 정리하고 저녁을 먹은 뒤에 마을을 둘러보며 닭 꼬치라도 먹지요.”
“와아! 좋아요!”
그리도 좋을까.
제이는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세린을 다정히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늘 솔직하게 반응하는 표정도 저 맑은 웃음도 언제든지 그를 설레게 만들기 충분했다.
두 사람이 마차에 내리고 한 여관에 들어서자 여관의 주인으로 보이는 마른 여인이 밝게 외쳤다.
“어서 오세요~!”
“하루 머물려고 합니다만.”
묵묵히 말하는 제이를 여인이 빠르게 훑었다.
가히 천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과 건장한 체격을 가진 사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남색의 머리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수려한 외모의 여인이 눈에 띄었다.
무난한 색상이지만 고급스러운 재질로 느껴지는 옷의 원단까지 눈에 들어오자 여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방은 몇 개가 필요하시죠?”
“마부도 쉴 예정이니 두 개면 충분하겠군요.”
“말은 뒤뜰에 묶을 곳이 있답니다. 마차도 함께 놓는 곳이 있으니 참고하시고요. 은화 5개입니다.”
“저녁까지 먹고 가지요.”
“그럼 은화 6개를 주세요.”
“7개를 줄 테니 같은 층에 소란이 없도록 부탁드리죠.”
“그러지요.”
여인의 손에 은화 일곱 개를 준 후 제이가 망설임 없이 키를 받아 세린의 허리를 감싸고 위로 올랐다.
세린이 그런 그의 품에서 작게 소곤거리며 물었다.
“제이 소란이라뇨? 여관에 무슨 소란이라도 자주 일어나나요?”
“음? 아,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지만 타지에서 온 사람들의 방을 뒤지거나 오밤중에 문을 두드려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언질을 놓았으니 안심하세요.”
“세상에... 그런 사람들도 있네요... 제이도 많이 화가 났었겠어요.”
“전 괜찮습니다.”
‘그런 짓 다시는 하지 못하게 만들어줬거든요.’ 라는 속말을 삼킨 제이는 자연스럽게 방에 짐을 정리한 뒤 세린을 이끌고 여관의 식당에 들어섰다.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음 사이에서 제이는 부드럽게 세린을 향해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먹고 싶으신 것으로 고르세요.”
“음.....!”
세린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맑게 웃으며 외쳤다.
“전 돼지고기 스테이크요!”
“고기만 드시면 더부룩하실 수 있으니 샐러드도 함께 주문하겠습니다.”
“네!”
세린의 의견에 맞게 주문을 넣은 제이는 이내 조금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이들은 잘 지내고 있을까요.”
“제이도 걱정이 많아서 탈이에요. 그렇지만 저도 좀 걱정되기는 하네요...”
“밥은 잘 먹었겠지요.”
“아빠나 오빠들이 우리 아이들을 얼마나 예뻐하시는지 알잖아요. 굶기는 것보다 너무 많이 먹였을까봐 걱정이에요.”
“아이들이 살찌면 좋은 것이지요. 특히 앤젤라는 좀 쪄야 합니다.”
“에드도 요즘 마법을 스스로 배워보겠다고 열심이라서 살이 쪽 빠졌잖아요.”
“레기도 검술을 배운다고 몸을 많이 움직이기 시작했죠.”
“에구... 힘들텐데...”
저절로 생각나는 세쌍둥이들의 모습에 세린과 제이의 그늘이 조금씩 짙어졌다.
한숨이 나올 만큼 슬퍼지는 분위기에서 제이가 부드럽게 분위기를 전환하며 말했다.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생각해야겠지요. 어떤 것을 선물해주면 좋아할까요.”
“음... 아이들이 지금 관심을 쏟고 있는 것... 으로 골라줘야 기뻐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레기는 목검으로 해주고 싶군요. 이름을 직접 새겨서 말입니다.”
“우와 그거 멋지네요! 레기가 엄청 좋아할 것 같아요!”
“워낙 검술의 성장속도가 남다르니 목검에서 금방 진검으로 넘어갈 것 같지만 말이죠.”
아직 검을 시작한지 한 달 밖에 안 지난 레기였지만 팔불출인 제이의 시선에는 참으로 훌륭하다 못해 엄청난 잠재능력을 가진 검사처럼 보였다.
그저 바리보기만 해도 예쁜 아이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에 제이는 감동이라는 것을 느꼈다.
가슴께가 뻐근해질 만큼 뭉클한 감정들이 아이들이 무언가 작은 것 하나라도 해낼 때마다 점점 더 크기를 불려갔으니 말은 다 했을 것이다.
그러던 그때였다.
아이들의 선물을 정하며 부부가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는 그 때, 그들을 향해 무언가가 날아왔다.
정확히는 세린을 향해서 말이다.
휘릭!
“꺅!”
와장창!!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세린의 곁에 다가온 제이는 세린에게 날아온 그릇을 맨손으로 잡아 주먹을 쥐어 산산조각을 냈다.
그의 목에 핏대가 섰다.
사랑스런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느라 주변의 소란스러움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그 무신경이 이런 위험한 상황을 낳았다.
제이의 갈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천천히 소란의 중심을 담았다.
용병으로 보이는 옷을 입은 사내와 마을 영주의 기사복을 입고 있는 사내가 서로의 멱살을 움켜쥐며 싸우고 있었다.
“말 다했어??!!”
“내가 틀린 말을 했소? 듣도 보도 못한 용병단이라고 한 것이 그리 큰 죄요? 사실을 그대로 표현했을 뿐인데!”
“이 자식이 진짜!!!”
용병의 이마에 핏줄이 서며 빠르게 주먹을 쥐어 휘둘렀다.
몰론 큰 손아귀에 의해 바로 잡혔지만 말이다.
턱!!
용병의 팔을 움켜 쥔 하얀 손이 억센 힘으로 그 팔을 내리 눌렀다.
“으아악!! 너, 너 뭐야!!!”
당연하게도 용병의 팔을 잡아 무릎을 꿇린 이는 제이였다.
제이는 갈색의 눈동자를 차갑게 뜨며 용병이 아닌 기사복을 입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릇을 던진 자가 누구지.”
“뭐요? 당신 누구요!!”
“그릇을 던진 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제이의 눈동자 속의 짙은 살기가 피부를 찢을 듯이 피어오르자 기사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이정도 기세를 가진 이가 이런 마을에 있었다고?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저... 저 용병이 던졌소.”
“익!! 이거 놔!! 안 놔?!”
제이의 시선이 천천히 제 아귀힘에 아등바등 거리는 용병을 담았다.
그리곤 아주 시린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네가 던진 그릇이 누가 맞을 뻔 했는지 아나.”
“으윽!!! 알게 뭐야!! 빨리 안 놔?!!”
“이제부터라도 알아야 할 거다.”
“뭐야??!!”
제이의 입가에 잔혹해 보이는 미소가 피어났다.
“네 무릎을 부셔버리고 평생 걷지 못하게 해줄까, 아니면...”
“!!!”
“직접 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할 것이냐.”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살벌한 음성에 용병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나 그의 팔에 더욱 가해지는 억센 손아귀에 용병이 다급히 외쳤다.
“악!! 아, 알았어!! 사과하면 되잖아!!”
“.... 제대로 사과해야 할 것이다.”
“익....”
용병은 제 팔을 거칠게 놓은 제이의 눈치를 보며 제 팔을 잡고 제이를 따라 천천히 자리를 이동했다.
그리곤 사과를 전하기 위해 고개를 들자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난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이, 난 괜찮아요.”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제가 잠시 자리를 비웠더라면 큰 일이 났을 수도 있던 상황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목소리마저도 아름다워서 용병은 눈을 돌리지도 못하고 그저 멍하니 세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시선에 부드럽게 맞춰오는 남색 눈동자가 난처함을 담았다.
그 선명한 아름다움에 용병의 입이 점점 벌어지자 제이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사과를 하라고 데려왔건만 외려 세린에게 반한 듯이 구는 용병 탓이었다.
“사과를. 하러. 온. 것이. 아닌가.”
“....!! 아, 그, 그러니까.”
말을 딱딱 끊어내며 화가 났음을 표현한 제이로 인해 용병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잔뜩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들지도 못하고 눈을 굴린 용병은 이내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 제가... 그...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네, 충분한 사과였어요.”
용병의 사과에 세린이 따스히 웃으며 대답했고 이내 용병의 얼굴도 환해졌다.
그러나 그런 세린의 옆에 서 있는 제이와 눈이 마주치자 용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힉...!!”
살벌하게 자신을 쏘아보는 제이의 눈빛이 너무도 무서운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