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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149화 (148/218)

149화. 그 여인의 한

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고 확신이 서린 결과를 들었을 때.

나는 무슨 생각을 제일 먼저 했던가.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 자신의 안위였다.

이 소식을 그 사람과 그 사람의 부인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종이쪼가리 마냥 사지가 찢겨 죽을 것이 분명했다.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돼.’

그리고 결정해야해.

아이를 낳을 것인지, 아니면 지울 것인지.

천천히 내 배를 두 손으로 감싸보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가슴속에서부터 두 가지의 감정이 고요하게 휘몰아쳤다.

하나는 ‘고통’이었고 남은 하나는 내겐 없을 줄만 알았던 ‘모정’이었다.

아이라는 것을 원한 적도 낳을 것이라 생각해본 적도 없던 나였는데...

이 안에 내 아이가 숨을 쉬며 버티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여졌다.

‘살 수 있을 가능성은?’

적어도 나는 분명히 죽겠지.

그 잔인한 인간이 나를 죽이지 않고 놔줄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

‘그렇다면 아이는?’

아이는 살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후작부인이 불임이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 두 사람 사이에선 아이의 소식이 없었으니까.

내가 이 아이를 낳게 된다면... 아이는 살 수 있을 것이다.

몰론 후작의 아이로.

후작부인과 후작의 아이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으니 그 점에서는 안심이지만... 난 후작부인과 후작에게 이 아이도 뺏기고 죽임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의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아이를 지우는 것.

‘아이가 없어야 내가 살아.’

그런데... 내 아이를 죽이고 살아남는다면 내게는 무엇이 남을까.

본래의 삶도 공허하고 허망하기만 한데...

생각보다 고민의 시간은 길어졌다.

착잡한 마음에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고 이내 답답함을 잊으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밖에는 커다란 사탕을 들고 웃고 있는 작은 소년과 그 소년의 손을 잡고 웃으며 걸어가는 엄마로 보이는 이가 눈에 띄었다.

“......”

행복한 듯 보이는 모자의 모습에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절로... 정말 본능적으로 내 배를 감싸며 시선을 내렸고 내리자마자 그간 참아왔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내가 가진 아이의 아버지가 다른 누구도 아닌 하필 그 사람이라서 미래가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내가 널 지킬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내가 어떤 처지인지는 내 자신이 더 잘 알기 때문에.

하지만 지켜내고 싶었다.

아이도 그리고 자신도.

마음을 잡자 행동은 신속해졌다.

서둘러 큰 가방에 쌓은 짐들을 추스르고 허름한 방문을 열었고 그대로 후작가의 성에서부터 도망치듯 걷고 또 걸었다.

잡혀선 안 돼.

그 사람이 날 찾지 못하도록 숨어야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

커다랗게 부른 배를 두 손으로 감쌌다.

뱃속에서 요동치는 생명의 소리가 너무도 애틋해서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담겼고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를 만큼 서글프게 느껴지는 힘찬 발길질에 눈물이 툭 떨어졌다.

“엄마가 지켜줄게.”

너라도 살 수 있게.

네가 살아남을 수 있게.

“아가야, 너에게 엄마라고 불리기도 전에.... 아마 나는 죽겠지.”

하지만...

“네가 다른 사람을 향해 엄마라고 부를지도 몰라. 그게 네가 살 수 있는 방법일 테고.”

알고 있지만...

“욕심이겠지만....”

코가 시큰해지며 저절로 눈물이 차올랐다.

바짝 마른 입술을 꾹 깨물다가 이내 굵은 눈물줄기를 쏟아 내리며 말했다.

“나도 너에게 엄마라고 불리고 싶었어...”

허름한 옷이 눈물에 적셔가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살아야해. 잘 살아야해.”

*

“응애애애!!!!”

힘찬 울음소리.

붉은 피부.

선명한 분홍빛의 머리카락.

‘분홍색 머리카락....’

기운이 다 빠져버린 손을 억지로 들어 올려 아이의 피부에 묻은 피들을 닦아내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말발굽의 소리와 소란스런 사람들의 소음을 배경으로 아이의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빛났다.

황족을 뜻하는 분홍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라니.

그 머리카락이 어쩌면 네가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명줄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아가...”

“응애애애애!”

눈 좀 떠보렴.

이 엄마가 네 눈을 보고 싶어서 그래.

마지막으로 한 번 만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네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 정도는 알아가도 되는 거잖니.

그래야 내가 널 잊어버리지 않지.

어미의 짙은 애정을 알아챘는지 아이는 눈물을 뚝 그치고 이내 꾸물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가늘게 떠진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니 가슴 속에 온기가 확 퍼졌다.

환한 미소가 저절로 지어질 만큼 아이의 눈동자는 아름다웠다.

“엄마 닮았구나....”

다행이다.

쿵!!! 콰광!!

잠겨 있던 집 문이 부서지고 그 안으로 한 사내와 여러 기사들이 몰려 들어왔다.

땀에 절어있는 머리카락에 손을 대지도 못하고 아이를 품에 안은 난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이런 곳에 숨어 있으니 찾기 어려웠군.”

“.....”

“내 핏줄을 품고 도망치다니... 살고 싶은 마음은 처음부터 버렸나보구나.”

“..... 저의 핏줄이기도 합니다...”

“웃기지마라. 아이는 이제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

페르돈 후작은 말이 없는 내게서 아이에게로 시선을 옮겼고 이내 경악했다.

“분홍색의 머리카락...?”

황족들만이 가질 수 있다는 그 머리카락이 탐날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를 망설이지 않고 데려갈 것이고 분명했고 부족하지 않게 키울 것이 선명했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아이를 데려와라.”

“네!”

기사들의 억센 손길에 손쉽게 아이가 내게서 벗어났다.

점점 멀어지는 작은 핏덩이가 눈에 아른거려 힘도 나지 않는 팔을 허우적거렸으나 결코 닿지 못했다.

아이는 완벽하게 내게서 멀어졌다.

“좋은 것을 낳았구나. 내 특별하게 마지막 유언이라도 들어주지.”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흠? 일단 들어는 보지.”

“아이의 이름을... 제가 짓게 해주세요.”

“이름?”

“간청합니다.”

이름만이라도.

그래, 이름만이라도 지을 수 있게 해주길.

너에게 무언가 하나라도 선물해줄 수 있게 해주길.

“생각해둔 것이 있나보군. 말해 보거라.”

“.... 로레인.”

“로레인?”

“네.... 아이를 부디 로레인으로 불러주세요.”

“과분한 이름이구나. 그러도록 하지.”

후작의 눈이 잔혹하게 휘었다.

“이제 죽거라.”

푹!

망설임 없이 내 심장에 내리꽂아진 장검에 이불은 피로 가득 적셔져갔다.

그러나 내 눈은 여전히 내 아이를 담아내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조그마한 아기.

그래, 내 아기.

내 아이.

로레인.

로레인, 행복한 자.

이름처럼만 살아주렴.

다른 누군가를 엄마라고 부르더라도 상관없으니.

부디 네 이름처럼만 살아.

*

총명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한 여인을 향해 네가 외쳤다.

“어머니!”

“레인!”

그래, 이제 네게는 저 사람이 엄마인 것이구나.

정말 네 이름처럼 살고 있구나.

“어머니! 저 오늘은 마법으로 꽃을 피울 수 있었어요!”

“이야~! 역시 내 아들! 재능이 뛰어다나니까?”

“아하하하하!”

네 웃음소리는 그런 느낌이었구나.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소리야.

“세린이 그렇게 된 것도...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신 것도 제 탓입니다.”

“로레인! 그런 소리 하지 말거라.”

“사실이지 않습니까!! 페르돈 후작이 저를 황위권에 올리기 위해 그런 더러운 술수를 쓴 것인데... 이런 제가 원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원인이라는 겁니까!!”

“로레인!!”

황제의 호통에도 너의 눈에 눈물은 마르지 못하는구나.

네 탓이 아니라고 그 여인도 아마 그리 말했을 것인데.

울지 말거라.

“세린, 레몬 케이크를 준비했는데 너무 많더구나. 같이 먹으러 가지 않겠니?”

“와아! 너무 좋아요!!”

동생을 찾아서 다행이구나.

행복해 보여서 안심했단다.

넌 언제쯤 내 생각을 해줄까.

내가 네 어미라는 것을 언젠가 알아줄 날이 올까.

나를...‘엄마’라고 불러줄 그 날이 있기는 할까.

내가 네 이름을 불러줄 수 있는 날도 있기는 할까.

그건 기적을 바라는 것일까?

“... 어, 어머니....”

나를 똑바로 직시하는 그 제비꽃 색의 눈동자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네가 날 알아본 것도 나를 어머니라고 부른 것도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지.

맞아, 내가 네 엄마야.

네가 내게 엄마라고 불렀으니 나도 한 번 도 내뱉지 못했던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도 되는 것이겠지.

“로레인.”

네 이름은 로레인.

내 뱃속에서 태어난 나의 단 하나 뿐인 아들.

단 한 번도 단 한 순간도 너를 낳은 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너에게 처음으로 들은 ‘어머니’ 라는 그 한 마디에 더는 여한이란 것이 없어졌다.

이런 기분이구나.

엄마라고 불리는 것이.

나도 네게서 엄마로 존재할 수 있었구나.

*

“헉...!”

그 한 장면을 끝으로 로레인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꿈...? 아니야... 그건 분명 그 사람의...’

“정신이 드셨습니까.”

“교주님....?”

로레인의 아름답게 빛나는 눈동자 속의 대신관이 부드럽게 말했다.

“갑자기 쓰러지셔서 모두 걱정을 하셨습니다. 의원도 원인을 모른다고 해서 마음이 급하셨는지 저를 부르셨습니다.”

“아...”

대신관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소중하시다고 하셨던 영혼을 보시는 분의 능력이 정말 뛰어나기는 한가봅니다.”

“.... 네?”

“영혼을 실체화 시키는 것도, 그 영혼의 기억과 마음까지도 전달을 대신 할 수 있는 것도 말입니다.”

“그게 무슨....”

“영혼과 기억을 끌어내리는 것이 가능하듯 그 기억을 다른 이에게 전달하는 것 또한 가능한 일이지요. 지금 그 여파로 기절하신 겁니다. 커다란 기억들을 받아내시느라 신체가 잠시 무너진 것이죠.”

결국 그 말은 앤젤라가 그 기억을 내게 줬다는 소리가 아닌가.

로레인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 앤젤라가 아니야.’

그래, 아직 어린 앤젤라가 그런 것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앤젤라의 힘을 빌릴 수 있는 유일한 한 사람.

아니... 한 영혼.

그 분이 제게 친모의 기억을 넘긴 것이 분명했다.

왜?

왜 그 기억을 내게 보여줬지?

답은 이미 자신 스스로도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스스로를 그만 몰아세우라고.

제 행복을 바라며 죽은 친모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제 이름처럼 행복하게 살라고.

행복해야하는 강박적인 이유를 가슴에 박아버린 제 또 다른 ‘어머니’가 참으로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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