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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148화 (147/218)

148화. 그저 한마디를 원했다.

“천한 것!”

웅크려 있는 작은 분홍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을 한 사내가 거칠게 발로 내리 눌렀다.

저항도 못할 만큼 마르고 힘이 없는 어린 소년은 그저 다가온 고통에 다물린 잇새로 신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으윽....”

“성에서 그 머리카락이 내 눈에 띄지 않도록 잘 숨어있으라고 일렀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것이냐!”

퍽!

“윽....!”

“천한 핏줄을 가진 것이 가여워 기껏 먹여주고 재워주었더니 은혜를 모르고 까부는구나! 내가 페르돈의 성을 주었다고 네가 후작이 될 성 싶더냐!!”

“자... 잘못....!”

“시끄럽다! 네 녀석의 목소리가 감히 내 귀에 안 들리도록 하라고 그리 주의를 주었는데도!!!”

퍽!! 퍽!!

거칠기만 한 사내의 발길질에 소년은 바닥을 거칠게 굴렀다.

고귀한 귀족으로 불리던 사내는 페르돈 후작이었고 그런 그의 발치에 굴러다니며 소리 없이 아파하는 소년은 바로 로레인이었다.

먼지로 인해 칙칙해져가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분노에 찬 눈으로 바라본 후작이 외쳤다.

“네 머리카락 덕분에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라. 더 오래 살고 싶거든 앞으로 이 성에서 소리도 내지 말고 숨을 쉬어야 할 것이다!”

“쿨럭.....”

그리곤 망설임 없이 로레인의 방에서 나왔다.

방이라고 불리기 민망할 정도로 어두운 그 공간은 창문 하나 달려있지 않았고 몇 년 동안 청소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했다.

로레인은 멀어지는 후작의 등 뒤로 닫혀가는 문을 웅크린 몸을 한 채 바라보았다.

쾅!!!

철컥.

굳게 닫힌 문 밖으로 더욱 견고하게 잠긴 제 방문이 그리도 처량할 수 없었다.

볼품없이 구겨지고 찢긴 제 옷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로레인이 비틀 거리며 일어섰다.

그러나 일어서는 그의 다리에는 힘이 없었고 결국 작은 몸이 다시 한 번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쿠당탕!

“으.....”

아픈 것은 익숙해질 수 없었다.

아무리 아프지 않다고 되새기고 되새겨 보아도 고통은 전혀 줄지 않았다.

로레인의 제비꽃 눈동자에 천천히 맑은 눈물이 고였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 땅을 촉촉이 적셔갔을 때 그의 방문 앞으로 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이 시간에 왜 여기까지 왔소.”

자신을 대하는 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그 부드러운 어조는 후작의 것이었고.

“당신이 보고 싶어서요. 임신을 하니 잠이 많아져서 뵈러 올 틈이 없었네요.”

한없는 애정이 느껴지는 저 목소리는 후작부인의 것이었다.

로레인은 눈물로 인해 불투명해진 시야 속에서 굳건히 잠긴 방문을 바라보았다.

“아가야, 어머니랑 뭘 하고 놀았느냐. 밥은 먹었고?”

“밥은 아까 든든하게 먹었답니다. 정원에 산책도 다녀왔어요.”

“잘했소. 거동이 힘들 텐데 내 손을 잡으시오.”

“고마워요. 우리 아이가 당신을 닮았으면 좋겠네요.”

“하하하 난 당신을 닮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후후, , ,”

“아이가 얼른 태어나서 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듣고 싶군.”

“마음도 급하셔라.”

따스한 온기가 담긴 다정한 가족의 대화가 힘없이 쓰러져있는 로레인의 귀에 천천히 박혀갔다.

제비꽃 색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천천히 자신의 손을 시야에 담았다.

때가 끼고 상처 많은 작은 손에는 쥐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쥘 수 있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라고 칭해지는 후작에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고 자신을 낳다 죽었다고 하던 어머니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철저한 외톨이였다.

힘없이 쓰러져있는 작은 소년의 등이 너무도 서글펐다.

“쓸모없는 것!!”

“모자란 것!”

“천박한 것.”

별명에 가까운 수많은 자신의 호칭과 지칭하는 단어들은 그가 자신의 이름이 ‘로레인’ 이라는 것을 잊기 쉽게 만들었다.

싸늘하기만 한 후작의 시선이 무서웠고 거침없이 다가오는 폭력에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런 어린 로레인의 괴로운 일상은 어느 누군가의 하얗고 아름다운 손에 의해 천천히 바뀌어 갔다.

수많은 귀족들의 멸시하는 눈빛 속에서 점점 움츠러드는 로레인에게 한 여인이 손을 뻗은 것이다.

“반갑다 아가야.”

로레인의 시선이 여인의 하얀 손을 타고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담아갔다.

푸른 하늘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머리카락과 너무도 따뜻한 미소를 담고 있는 사랑스런 얼굴.

그 아름다운 여인은 바로 이 제국의 황후 아리엘이었다.

아리엘은 제 손을 아주 느리게 잡은 로레인의 마르고 작은 손을 부드럽게 잡아 그를 안아 올렸다.

그 조심스러운 손길과 애정 어린 온기가 너무도 낯설어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거칠게 요동쳤다.

황족만이 앉을 수 있는 상석에 자리한 황후 아리엘은 자연스럽게 로레인을 제 품에 감싸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작은 소년을 멸시하는 귀족들의 시선을 누르게 하기 위함이었고 동시에 로레인의 위치를 명확하게 알리려는 태도였다.

그 후부터는 로레인에게 당황스런 상황의 연속이었다.

따뜻한 손길, 아름다운 미소, 다정한 눈동자.

그 세 가지 모두가 제게는 낯설면서도 동시에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제게 다가오는 아리엘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로레인, 늦어도 괜찮아. 네가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을 마음이 생길 때... 그때 불러줘.”

“......”

“언제 불러주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네가 건강해지는 것이거든.”

“.....”

“난 정말 너에게 훌륭한 어머니고 싶고, 언제든지 널 사랑할 준비가 되어있어. 그러니 너는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놀고, 많은 것을 배워가고 행복해지기만 하면 돼.”

아리엘의 아름다운 연두색 눈동자가 곱게 휘었다.

“그저 내가 늙어 죽기 전에만 날 어머니라고 인정해줘. 내가 그렇게 불릴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

그녀가 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을 그렇게까지 아끼고 지키려는 것인지 그 당시의 로레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진심이 한 발 다가오듯 로레인의 가슴에 스며들었고 결국 로레인은 그 진심에 항복을 외쳤다.

처음으로 불러본 단어로 말이다.

“어머니...”

그 한 마디가 뭐라고.

그게 뭐 그리 대단한 말이라고.

단어 하나에 누구보다 환하게 미소를 짓는 당신을 향해 차마 그 뒷말을 내뱉지 못하고 삼켜버렸다.

그래, 어머니.

당신은 내 어머니였다.

나를 가슴으로 낳고 사랑으로 키운 나의 어머니였다.

당신 말고는 이제 내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이 기다려지듯 늘 행복한 마음으로 지내기 시작하는 그의 앞에 한 장의 종이가 보이기 전까진 말이다.

황제의 집무실에 올려 진 하나의 종이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담겨 있었다.

밤하늘 같은 아름다운 머리카락과 제 눈과 똑같은 색으로 빛나는 제비꽃 색의 눈동자.

누가 보아도 자신과 닮았다는 것이 명확해 보이는 화사하고 아름다운 얼굴.

그 사람은 자신을 낳다 죽었다고 하던 친어머니였다.

어린 로레인의 눈이 저절로 빳빳하게 굳었고 저도 모르게 그 종이를 가지고 제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왜 가져왔을까.

쓸 곳이 없는 정보였고 알 필요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도저히 그 종이 한 장에 담긴 그 사람의 얼굴을 버릴 수 없었다.

그렇게 가지고 온 종이는 지금 현재의 로레인의 품에 아직도 존재했다.

*

짙어져가는 노을을 멍하니 바라보며 예전의 기억을 떠올린 로레인은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에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복도 저 멀리서 자신을 향해 밝게 웃으며 달려오는 이는 바로 앤젤라였다.

로레인의 눈이 저절로 곱게 휘었다.

“앤젤라.”

“삼촌~!!”

제 품에 꼭 껴안긴 앤젤라를 내려주며 로레인이 나직이 물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거야?”

“숨바꼭질하고 있었어여! 레기 오빠가 술래에여!”

“그렇구나.”

“어?”

앤젤라의 대답이 귀여워 부드럽게 웃는 로레인을 향해 웃던 앤젤라가 그의 뒤편을 바라보더니 이내 밝게 외쳤다.

“예쁜 언니다!”

“......”

로레인의 눈가가 빳빳해졌다.

그런 그의 변화를 모르고 앤젤라는 하얀 손을 뻗어 한 영혼을 쥐었다.

고사리 같이 작은 손에 담긴 작은 마력파동이 영혼에 닿자 로레인의 시야에 밝은 빛이 나타났다.

“!!!”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듯 로레인의 얼굴이 느리게 굳어갔다.

노을과 같은 따스한 색을 가진 빛을 등진 한 인영이 선명하게 그의 시선에 나타난 탓이었다.

밤하늘과 같은 남색의 머리카락과 제비꽃 색을 가진 아름다운 눈동자.

그래, 제 품에서 놓지 못하고 있는 그 종이 속의 여인이었다.

“......”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한 친모의 시선에 로레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저와 같은 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도 굳어있기는 매한가지였다.

“.....”

강한 마력과 능력을 가졌을수록 실체화를 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했던가.

이 상황이 앤젤라의 마력 때문인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동시에 제 눈을 바라보는 친모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는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지?’

뭐라고 불러야 맞는 것일까.

어머니라고?

내가 당신을 그리 불러도 되는 것이 맞는 걸까?

망설이는 입술이 지나치는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한 마디의 말을 내뱉었다.

“... 어, 어머니....”

그런 그의 한 마디에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에 놀라움이 뜨더니 이윽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휘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여인은 너무도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로레인.”

“...!!!”

제 이름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저물어가는 노을빛에 녹아내리듯 그녀가 수많은 빛들과 함께 사라졌다.

사라지는 그녀의 존재에 당황한 로레인의 아래에서 앤젤라도 무척 당황스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예쁜 언니가 없어졌어여!”

“... 없어졌다고?”

“어디 갔지? 요기 있었는데...”

앤젤라의 의문을 듣던 로레인의 머릿속에 대신관의 말이 떠올랐다.

‘맺힌 마음이 풀리거든 언제든 신의 품으로 가실 수 있는 혼입니다.’

당신의 맺힌 마음은 고작 그것뿐이었나.

내게 ‘어머니’라는 그 부름이 듣고 싶어 몇 십 년을 내 곁에서 맴돌았던 것이었나.

그 한마디가 뭐라고.

이제야 당신을 처음으로 마주했는데...

“윽...!”

지끈거리며 천천히 울리기 시작하는 머리의 통증에 로레인은 제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삼촌...?”

조카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못 할 만큼 고통스런 통증에 그는 기절하듯 앞으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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