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원한이 없다고
성스러워 보이는 하얀 벽면과 천장 사이에는 여신의 조각상이 놓여 있었고 그러한 조각상의 정 가운데에는 아름다운 문양이 담긴 십자가가 자리했다.
붉은 레드카펫이 하얀 바닥의 중앙에 깔려 있었고 십자가에 가까운 카펫의 끝자락에는 한 사람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눈이 부시다고 느껴질 정도로 밝은 백금발과 긴 속눈썹 안으로 가려진 눈매가 참으로 아름다운 사내였다.
금색과 붉은 색의 자수로 수놓아진 사내의 옷이 발목 위로 곱게 흔들거렸다.
이 성스러운 장소는 신을 모시는 대신전.
그리고 그러한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그 사내는 제국에 단 한 명뿐인 대신관이었다.
기도가 끝났는지 스르륵 눈을 뜬 대신관은 머리카락만큼 밝은 금색의 눈동자를 돌려 신전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담고 고개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인사는 그것으로 됐습니다.”
대신관의 기도를 멈춰 세운 그 사람은 제국의 마법사 로레인이었다.
로레인은 제비꽃 색을 가진 눈동자로 대신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미리 통보한 시간보다 이르게 왔군요. 기도를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이미 마무리된 기도였습니다. 심려치마세요.”
대신관은 부드럽게 그를 인도하며 대신관의 집무실로 향했다.
신전만큼이나 하얀 집무실 안에 있는 테이블에 로레인이 앉자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대신관이 차를 타기 시작했다.
“찻잎의 향과 맛이 깊어 아마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로레인은 대신관이 건네준 차를 한 입 마시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맛있군요.”
“입맛에 맞으시니 제가 더 기쁘군요.”
대신관이 다정히 웃으며 그에게 말하자 로레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교주님께 여쭙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언제든 괜찮으니 말씀해주세요.”
“죽은 자, 그러니까 영혼을 눈으로 직접 직시하고 대화까지 나누는 이가 있습니다.”
“......”
대신관의 백금색 눈동자가 천천히 로레인을 시야에 담았다.
“영혼을 말입니까.”
“네.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 능력이 그 사람에게 해가 될까 걱정되어서 여러 책을 읽어보고 찾아보면서 조사했지만 그러한 능력에 대해 쓰여 있는 자료는 없었습니다.”
“......”
“그래서 교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랬군요.”
대신관은 잠시 고민하듯 눈을 감았다가 다시 천천히 뜨며 로레인을 향해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제가 알게 된다면 안 되는 것인가요?”
“그 사람의 능력을 남들은 몰랐으면 합니다.”
“마음을 잘 알겠습니다. 제가 비밀은 지키겠다고 장담할 수 있으나 마음에 놓이지 않는다면 말씀해주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
“영혼을 보는 눈을 가진 이는 지금까지의 제국에 단 한 명뿐이었는데... 전하께서 아시는 분까지 총 두 분이 되었군요.”
“....! 한 명 더 있습니까?”
“네. 하지만 그 자가 바라보는 시점에서의 영혼은 아주 흐릿한 잔상처럼 보입니다. 목소리도 들을 수 있으나 자세히 귀를 기울여야 들리는 정도지요.”
“..... 누구입니까 그 사람은.”
대신관이 부드럽게 웃었다.
“접니다.”
“!!!”
로레인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자 대신관은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말씀해주신 분에 비한다면 부끄러운 수준의 능력인 것 같지만 그래도 이 능력을 통해 많은 영혼들을 신의 품으로 인도했습니다.”
“대단하신 일이란 것을 압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이 능력으로 인해 다치시기라도 할까 걱정된다고 하셨지요.”
“.... 네.”
대신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말했다.
“다치셨다면 아마 진즉 다치셨을 겁니다.”
“.....?”
“영혼을 볼 수 있는 사람의 몸에는 아주 깨끗한 태초의 마력이 흐릅니다. 그 마력을 통해서 땅에서 헤매는 영혼들에게 길을 만들어 신의 품으로 인도할 수 있지요. 가지고 있는 태초의 마력이 출중하고 풍부할수록 영혼을 잠시 실체화 시키는 것도 가능합니다.”
“......!!!”
“그렇기에 주변의 영혼들이 아마 눈에 불을 켜고 전하께서 말씀해주신 그 분께 달려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분이 자신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런....”
“이승을 떠도는 영혼들이 유일하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무척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
로레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대신관은 조금 의문스러운 얼굴로 나긋이 말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무사하시다는 것은 면역력이 높고 신체와 정신이 무척이나 강인한 분이시거나....”
“.....”
“주변에 그런 영혼들이 다가갈 수 없을 만큼 강한 영혼이 이미 자리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
앤젤라의 곁에 항상 있는 한 영혼.
그 사람은 대마법사라 불렸던 제 어머니뿐이었다.
*
‘앤젤라... 솔직히 말해. 나랑 한 약속 어겼지....’
“히끅!”
날카로운 물음에 앤젤라의 연두색 눈동자가 커졌다.
아리엘은 그런 소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녀가 정말 약속을 어겼음을 알아챘고 이내 책망하듯 물었다.
‘내 이야기 다른 사람에게 말 안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니?’
“히끅!!”
아리엘의 연두색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앤젤라를 눈에 담자 앤젤라가 서둘러 읽고 있던 책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앤젤라 몰라요!!”
‘이제는 모르는 척까지...?’
“몰라요!”
‘..... 나참... 방귀를 낀 녀석이 성을 먼저 낸다더니.’
“앤젤라 방귀 안 꼈어여!”
‘누가 앤젤라가 꼈다고 했니? 아니, 도대체... 말을 해주더라도 왜 하필 그게 로레인이야?’
“..... 우..”
‘에휴.... 봐준다 내가.’ 낮게 혀를 차며 주변을 휙 둘러본 아리엘은 먼 창문가에서 꿈틀거리는 수많은 영혼들을 바라보며 픽 웃음을 지었다.
‘이리 다가왔단 봐라.’
“네?”
‘아니야. 앤젤라, 다음부턴 먼저 한 약속을 지키는 거다?’
“.... 네에.... 미안해요.”
‘이제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한테 절대 하지 않기로 다시 약속해!’
“약속.....!”
‘꼭 지키렴.’
“네!”
앤젤라의 다짐하는 듯한 대답에 아리엘은 할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참 미워할 수 없는 아이였다.
*
로레인은 대신관의 이야기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많이 심란해 보이는 모습에 대신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전하께 이런 말씀은 더 힘들게 만드는 것 같아 죄송스럽지만 지금 전하의 곁에도 한 영혼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이승에 남아 있는 영혼들은 대다수 바라는 것이 맺혀 한이 남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하의 곁에 계시는 분 또한 그런 분들과 마찬가지시고요.”
“...... 바라는 것.”
“네, 맺힌 마음이 풀리거든 언제든 신의 품으로 가실 수 있는 혼입니다.”
대신관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로레인이 다급히 물었다.
“그렇다면 길을 잃었다고 하는 영혼은 어찌해야 하나요?”
“길을 잃었다고요?”
“네, 길을 잃었다 들었습니다. 그런 경우도 있는 것인가요?”
“흠....”
대신관은 고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 수 없어 뭐라고 말씀을 드리기 어려움이 있네요...”
“.....”
로레인의 입술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 상황에 대해 물어야 하는 것일까.
입에 담기도 전부터 가슴 아픈 그 상황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하는 것일까.
로레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천천히 대신관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입술을 열었다.
“마법사에 의해 영혼이 억지로 끌려왔었습니다.”
“....!!!”
그래, 당신은 이미 평온했을 저 하늘에서 억지로 다시 끌려 내려왔다.
“그러한 영혼체인 상태로... 죽어가는 다른 사람을 마법으로 다시 살렸습니다.”
세린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까지 애쓰던 당신의 마력이 아직도 내 가슴에 깊이 박혀있다는 것을 그 분은 아실까.
“그게 가능한건가요? 그게 원인일까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공허한 걸음으로 로레인이 황성의 복도를 걸어갔다.
그의 공허한 머릿속으로 대신관과의 대화가 나직이 울렸다.
‘처음 듣는 경우라 저도 뭐라고 대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제가 찾아뵙거나 신전으로 모셔 오신다면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교주님이 직접 봐주시는 겁니까.’
‘일단 제가 알고 있는 영혼을 보는 눈을 가진 이가 저 뿐이니까요.’
대신관은 로레인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 전하의 곁에 계시는 분의 맺힌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아드리고 싶으나 저에게 입을 열고 싶어 하지 않으시군요.’
‘.....?’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씀은... 전혀 해가 되는 영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한이라는 것도 없어 보이니 안심하세요.’
‘원한이 없다고요.’
‘네. 없습니다.’
로레인의 제비꽃 색 눈동자가 천천히 감겼다.
무척이나 피곤해지는 기분과 너무도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그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대신관은 그런 로레인을 향해 격려하듯 말했다.
‘걱정 마세요. 모두 좋아질 것입니다.’
‘.......’
‘제 이름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소중하다고 하셨던 그 분께 해가 된 일이 생기거나 전하께서 도움을 요청하신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응하겠습니다. 그러니 홀로 심의 병을 키우지 마시고 언제든 신전으로 오세요.’
‘.... 감사합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로레인은 황성의 복도 한 가운데서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노을이 저물어가는 창문 밖의 하늘을 향했고 이내 아름다운 노을의 빛이 그의 얼굴을 따스하게 감쌌다.
복잡한 심정을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어려운 문제들이라 그의 고민이 깊어져만 갔다.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노을에서 천천히 돌려지며 이내 제 옆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여기에 있을까.
내게 원한이 없다고 했던가.
내가 당신을 죽게 만들었던 장본인이었을 텐데... 원한이 없다고.
그거야 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고 그런 그를 마주 바라보는 영혼만 남아버린 여인의 시선은 너무도 슬프게 빛났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선은 마주 닿지 못했다.
같은 자리에 있으나 같이 있지 못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