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그 마음
황성의 별궁 창문에는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오며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췄다.
그런 황성의 창문 밖으로 한 울음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따스한 날씨만큼이나 온기를 담은 울음소리였다.
“응애애애애!!”
따스한 봄바람이 부는 늦은 저녁.
헤일리의 침소에서 트레일과 헤일리의 아이가 태어났다.
우렁찬 아이의 울음소리에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린과 황족들은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고 산모도 건강하다는 소식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들어가 보시겠습니까?”
산파의 부드러운 물음에 황족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땀에 젖은 헤일리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트레일의 모습과 그런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작은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헤일리를 닮은 푸른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세린은 밝아진 표정으로 헤일리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헤일리, 괜찮아요? 몸은 좀 어때요? 많이 아팠죠?”
“전하 말씀대로 정말 아프더라고요... 2황자 전하께서 아니셨다면 더 아팠을 것 같아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아기 머리카락은 헤일리를 닮았나보네요.”
“하하... 저보단 전하를 닮았으면 좋겠는데...”
헤일리는 부드럽게 웃으며 제 품에 있는 푸른 머리카락의 아이를 응시했다.
아이를 낳느라 힘을 다 빼냈던지라 그저 안아주는 것 말고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제 품에 안긴 작은 생명이 너무도 애틋해서 저절로 힘을 주어 안았다.
트레일은 잔뜩 붉어진 눈으로 그런 헤일리와 아이를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였고 테오는 그런 트레일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눈물을 쏟아내며 울기 직전이구나. 표정 좀 풀고 있거라.”
“형님...! 엄청 무서웠다고요! 막 헤일리가 소리도 못 지르고 막 네?! 막 피가 많이 나오고 막!!”
“알겠으니 일단 진정부터 하거라.”
테오가 약간 걱정스런 얼굴로 트레일을 두드렸고 이어 로레인도 나직이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래도 생각보다 아이가 씩씩해서 빠르게 나온 것 같아. 널 닮았나보구나.”
“형님....”
“그 덩치에 맞지 않는 눈물은 그치렴. 내가 보기가 좀 그래.”
“레인 형님까지 정말!”
트레일은 속이 터진다는 얼굴로 결국 버럭 외쳐버렸고 이내 세린은 헤일리의 손을 잡아주며 맑게 웃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도 기뻐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
헤일리가 무사히 아이를 낳은 후 세린과 제이가 대공저로 돌아가는 날이 밝았다.
에드윅은 사랑하는 딸과 그녀만큼 사랑스런 세명의 아이들을 바라보며 벌써부터 짙은 그리움에 입술을 꾹 다물어버렸다.
지금 가면 또 언제 돌아오려나...
보고 싶다면야 자신이 찾아가도 되는 일이지만 굳이 편히 아이들과 쉬어야 할 세린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이 먼저 그녀를 찾아갈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도 확신했다.
그런 에드윅의 고민을 알았던지 세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에드윅의 곁으로 다가섰다.
“아빠, 다음에 또 올게요!”
“.... 그래. 다음에도 아이들과 함께 오거라.”
“당연하죠! 아빠도 제가 없는 동안 식사도 잘 챙겨 드셔야 해요?”
“알겠다.”
“약속한 거예요! 클로비스 언니한테 물어볼 거니까 약속 지키셔야 해요!”
“그러마.”
세린의 잔소리가 그저 정겹고 귀여워서 에드윅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담겼다.
그의 시선이 세린에게서 느리게 돌아가며 제이와 리사, 이엔의 품에 안긴 작은 아이들을 눈에 담았다.
다음에 만날 때는 조금이라도 더 건강해지고 쑥쑥 자라있으면 하는 마음이 넘실거렸다.
따스한 온기가 담긴 바람을 맞으며 에드윅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들을 눈과 가슴에 천천히 담았다.
“아이들도 더 건강해져서 왔으면 좋겠구나.”
“그럼요, 트레일 오빠보다 건강하게 자랄걸요?”
세린의 농담에 에드윅이 부드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부디 그래주길 바라는구나. 몰론 너도 같이 건강해져야 한다.”
“저도 밥 잘 챙겨먹을게요, 걱정 마세요.”
“그래.”
세린을 바라보는 에드윅의 눈이 아름다운 곡선으로 휘었다.
대가족이 되어 떠나는 딸이 애틋하면서도 기특하기도 했다.
세 아이의 엄마로서 아이들을 사랑할 그녀를 생각하면 너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동시에 행복해할 것이 분명해서 안심이 되었다.
에드윅은 세린의 행복을 바라며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사랑하는 딸이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
로레인은 마차 앞에 서있는 세린을 향해 다가서며 말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내가 대공저로 찾아갈게. 앤젤라의 마력이 어떤지 건강이 어떤지 지속적으로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오빠를 번거롭게 만드는 것 같아서... 제가 차라리 아이들과 궁으로 한 번씩 올게요.”
“워프 한 번이면 바로 이동되는데 무슨 걱정을 하는 거야. 넌 내가 아니라 아이들을 걱정해야지.”
로레인이 맑은 웃음을 터트리며 세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세린은 키득키득 웃으며 그를 제 품에 꼭 안아주었다.
“고마워요.”
“내가 더 고마워. 넌 언제나 날 행복하게 해주는구나.”
“과장은 그만하시고요!”
“과장이라니, 너무한 걸?”
로레인의 눈에 즐거운 기색이 담겼다.
그때 서둘러 세린의 곁으로 트레일이 달려왔다.
“헤일리는 아직 움직이면 안 된다고 의사가 신신당부를 해서 나오질 못했어. 엄청 미안해하던걸?”
“나왔으면 화냈을 거예요! 아이를 낳은 지 며칠이 지난 것도 아닌데... 오빠가 헤일리 많이 챙겨줘요.”
“알겠어! 너도 우리 천사들이랑 잘 지내야 해?”
“네, 자주 놀러올게요.”
“그 약속 잘 지켜!”
트레일의 투덜거림에 세린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곤 다가오는 클로비스의 품에 안기며 더욱 행복하게 웃었다.
“언니.”
“세린이 좋아하는 디저트를 많이 준비해둘게요. 미리 편지를 주면 같이 티타임도 가지고 여인들끼리 이야기도 나눠요.”
“아하하 너무 좋아요! 오기 전에는 언니한테 편지할게요!”
“그건 내가 섭섭하지.”
옆에서 끼어든 테오가 세린의 품에 옅은 분홍빛이 도는 꽃을 안겨주었다.
“널 닮아서 가져왔다.”
“우와... 고마워요 오빠.”
“조심해서 가렴. 최대한 빠르게 놀러왔으면 좋겠구나.”
“아하하하 네, 알겠어요.”
테오와도 인사를 마치고 세린은 천천히 마차에 올랐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운 제이는 부드럽게 고개를 숙여 그들에게 인사를 했고 이윽고 자신도 마차에 올랐다.
아엔과 리사까지 마차에 오르자 마부는 말을 움직였고 부드럽게 황성의 문을 나섰다.
황성에서 멀어지는 마차의 창문 안으로 눈부신 햇빛이 들어왔다.
세린은 따뜻한 햇살을 맞이하며 천천히 제이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의 품에는 앤젤라가 안겨있었는데 몇 개월 사이로 쑥쑥 자란 작은 아이가 새삼스럽게 기특해졌다.
세린은 이제는 마력으로 만들어진 구 안에서 나온 앤젤라의 손을 잡아주며 맑게 웃었다.
사랑스런 가족들이 늘어나고 있음에 가슴에 따스한 온기가 불었다.
부디 자신이 훌륭한 엄마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
그날 밤, 세린과 제이는 침실에서 곱게 누워있었다.
둘 사이에는 세 쌍둥이들이 쪼르르 나열되어 누워있었는데 그 귀여운 행렬에 세린이 입을 가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제이도 무척이나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가족이 늘어서 돌아왔군요.”
“그러니까요. 제이, 이것 봐요.”
“흠?”
세린이 침대에서 몸을 돌려 조심스럽게 레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레기는 보면 볼수록 제이를 쏙 빼닮은 것 같아요. 눈도 그렇고 머리도 그렇고!”
“마음은 세린을 닮았으면 좋겠군요.”
“제이 마음이 어디가 어때서요?”
“.... 앤젤라는 셋 중에서 제일 세린을 많이 닮았네요.”
제이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며 이제는 조금씩 살이 오른 앤젤라의 손을 잡아주었다.
세린은 맑은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앤젤라를 바라보았고 이내 곤히 자는 둘째 에드를 바라보았다.
입술을 삐죽이며 작게 코를 고는 에드의 모습에 제이와 세린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천천히 제이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이... 있잖아요.”
“네.”
“내가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
세린의 눈이 조금씩 그리움에 젖어갔다.
“우리 엄마가 왜 나 같은 것을 위해서 다 희생했는지... 그걸 전혀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세린.”
“그런데... 내가 우리 아이들을 낳고 우리 아이들 눈을 바라보니까 딱 알겠더라고요.”
세린의 눈이 곤히 잠든 쌍둥이들을 담았다.
지금에 와서야... 그 때 그 상황 속에서의 엄마 마음을 알 것 같은 기분에 그녀의 눈이 촉촉이 젖어갔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놓고 자신 하나만을 위해 이를 악물고 버틴 아리엘의 심정과 그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고 너무도 명확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제 자신이 어떻게 되더라도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그 상황을 말없이 감내한 것이었다.
제이는 볼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천천히 세린에게로 다가갔다.
한품에 쏙 안기는 작은 몸을 강하게 끌어안아주며 제이는 속삭였다.
“울지 마세요.”
“안 울고 싶어요...”
“이렇게 좋은 날에 울면 제가 더 속상합니다.”
“하지만...”
제이는 부드럽게 세린의 볼을 잡고 근사하게 웃었다.
“세린 당신도 어머님만큼이나 훌륭한 어머니가 될 겁니다.”
“그럴까요?”
“그렇지요. 전 당신이 어떤 분의 딸로 태어났고 당신이 그 누구보다 그 분을 닮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제이....”
세린의 눈가에 깊은 미소가 담겼다.
그의 품에 기대어 안기는 세린의 입가에 담긴 미소가 천천히 짙어졌다.
누구보다 사랑을 줄 것이었다.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하고 마음을 나누어가며 키울 것이었다.
사랑하는 존재가 세린의 가슴에 늘어났던 깊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