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버려진 아이
이엔이 다급히 다가와 리사의 손을 잡았고 제이가 그녀의 앞을 막았다.
“리사, 진정해라.”
“리사님! 진정하세요!”
“꺼져.”
“리사님!”
이미 단단하게 꼭지가 돌아버린 리사의 눈에는 오직 벌벌 떨고 있는 클로라만 보일 뿐이었다.
리사는 어제부터 자꾸 제 속을 긁어내리는 저 인간을 한 대라도 쳐야 마음에 안정을 되찾을 것 같았다.
그녀를 말리던 제이와 이엔 마저도 억센 리사의 힘을 막기가 힘들어져 갔다.
그들이 위기감에 휩싸이는 것과 동시에 리사가 클로라의 앞에 가까이 다가섰고 빠르게 그녀의 손이 뻗어졌다.
클로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대로라면 맞는다...!
처음으로 느끼는 살기에 클로라의 눈이 질끈 감겼고 그 살벌한 기세 속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나타났다.
“리사경?”
멈칫!
그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리사의 손이 신속하게 멈췄다.
그리고 재빠르게 뒤를 돌아 달려갔고 그녀를 부른 세린의 옆으로 착실하게 섰다.
모두가 얼이 빠질 정도로 신속한 몸놀림이었다.
세린은 그저 두 눈을 크게 뜨며 리사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니요, 잠시 오해로 인해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오해요??”
세린이 당황한 눈으로 사람들이 몰린 곳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도 그녀와 똑같이 당황한 얼굴들이었다.
클로라는 상처를 덮은 손수건을 꽉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겨... 경이 제게 검을 휘둘러서....”
“네...?”
세린은 눈에 띄게 당황하며 클로라의 팔을 바라보았다.
붉은 피가 손수건을 조금씩 적셔가는 모습에 살짝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리곤 다급히 말했다.
“우선 의원을 먼저 불러서 치료를 받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대공부인! 황녀인 저에게 해를 입힌 저 기사를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전 무서워서 치료도 하기ㄱ....”
“황녀전하.”
세린이 나직이 클로라를 불렀다.
“정말 오해가 있었나 봐요. 리사경은 함부로 검을 꺼내는 기사가 아니에요.”
“...!!!”
“그렇기에 제국의 황제폐하께서 작위를 하사해주신 것이고요.”
세린의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어투에 클로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런 식으로 넘기기 위하서 제 팔에 상처를 낸 것이 아니었다.
이대로 물러나기엔 자존심마저 상했다.
하지만 주변에 보는 이들이 많음에 작게 심호흡을 한 뒤 나직이 입을 열었다.
“대공부인 말처럼 일단 상처부터 치료받겠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추후에 다시 이야기를 하죠. 오해가 아니었다면 황족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은 중죄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클로라는 냉정히 뒤를 돌아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앞만 보며 걸어가는 클로라의 눈이 분노로 뒤덮여있었다.
세린은 클로라가 멀어지자마자 리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해를 빨리 푸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왜 그런 오해가 생겼을까요?”
리사에 대한 의심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세린의 고민에 리사의 입가가 허물어졌다.
맹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보여 지는 신뢰와 믿음이 리사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이엔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세린보다 한 발 늦었다는 것을 알았고 말이다.
리사를 의심한 적은 절대 없었으나 그걸 표현하기도 전에 영웅처럼 등장한 세린에 의해 먼저 선수를 빼앗겼다.
그 점이 아쉽지만 동시에 그녀의 등장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세린은 리사의 손을 꼭 잡고 열심히 고민했다.
“근처에 다칠만한 풀이 있던가? 예전에 저도 정원에서 놀다가 풀에 베였던 적이 있었거든요.”
“세린, 폐하께서 그 일 이후로 그 풀을 다 베어버렸답니다. 아마도 다른 것에 다친 것일 테지요.”
“언... 아니 황후마마.”
세린이 반갑게 그녀를 부르다가 이내 보는 이들이 많음에 황급히 말을 바꿨다.
클로비스는 세린에게 다가가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 일은 제가 알아볼 테니 세린은 이만 가서 쉬어요. 경들도 오늘은 들어가서 쉬도록. 추후에 내가 부르지.”
“하지만...”
“세린, 큰일이었다면 쉴 수 없었겠지요. 걱정 말고 쉬어요.”
클로비스가 부드럽게 세린의 어깨를 잡아주며 웃었다.
세린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안도한 얼굴로 웃었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는 그런 클로비스에게 인사를 한 후 부드럽게 세린을 이끌고 자리를 이동했다.
몰론 이엔과 리사도 함께 이끌었고 말이다.
클로비스는 멀어지는 네 사람을 바라보다가 그들이 멀어지자마자 웃음기를 지웠다.
‘경고를 했는데 듣지를 않으니..’
클로비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담겼다.
만족이 가득한 미소였다.
‘뭐... 그래서 더 다행이지만.’
클로비스는 냉정히 뒤를 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철없는 제 동생을 혼내줄 시간이었다.
*
클로라는 의원의 진찰을 받으며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리사라고 했던가?
그 여자로 인해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고 풀리는 일도 하나도 없었다.
괜한 짓으로 제 팔만 다치게 한 꼴이라 자존심마저 뭉그러졌다.
클로라는 양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짧게 심호흡을 했다.
“후...”
‘일단 지금은 물러나자. 이 일을 황성에서 이대로 무마시키기 전에 다시 그 기사에게 다른 일을 터트린다면...’ 그럼 그 기사를 제 발 아래에 내리누를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그 생각까지 미치자 클로라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담겼다.
술술 일이 풀리는 느낌이었으나 이윽고 문 밖에서 들리는 시종의 목소리에 클로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후마마께옵서 황녀전하를 뵙고자 방문하셨습니다.”
“......”
의원은 클로라의 치료된 팔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흉터는 남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물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
얼른 황후에게 가보라는 의미 같은 정갈한 소견과 치료에 클로라는 눈을 날카롭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이 놈이고 저 놈이고...!! 건방지기 짝이 없어!!’
비록 사생아였으나 황제의 은혜를 받고 황족이 된 자신을 동남북 제국의 모두가 이리도 무시할 줄은 몰랐다.
‘나를 무시한다는 건 곧 서부제국을 무시한 것과 같다. 이 일을 모두 아버지께 고하고 말 것이야!’
그리곤 주황색의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문을 열었다.
철컥!
화려한 문 사이로 두 여인의 눈이 마주 닿았다.
같은 색으로 빛나는 주황색의 머리카락과 건강한 피부.
그리고 맑게 빛나는 초록색의 눈동자가 노란 눈동자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클로비스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 웃음을 지었다.
“다친 곳은 어떠니?”
“.... 흉은 남지 않는다니 다행이지요.”
“그건 정말 다행이구나. 네가 걱정이 되어서 이리 왔는데 잠시 시간을 좀 빌려주겠니.”
“.......”
클로라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그녀의 말에 숨어있는 씨와 날카로운 감정에 저절로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그러나 이내 가슴을 진정시킨 클로라는 조금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요.”
*
태양궁 황후 집무실.
클로비스는 부드러운 모습으로 꽃차를 클로라와 자신의 앞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다정히 웃었다.
“지금과 비슷한 시간에 네가 황녀로 입궐했었지.”
“.....”
“그때가 몇 년 전이었더라....”
“할 말이 고작 그딴 거라면 난 나가겠어.”
클로라의 날카로운 말에 클로비스는 시선을 천천히 돌려 제 동생을 눈에 담았다.
달빛을 담은 눈이 소름끼치게 빛났다.
클로라의 등에 조금씩 땀이 차기 시작했고 이내 입술을 꾹 다물고 다가오는 살벌한 기세를 버텨냈다.
클로비스는 서부제국의 전사였던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입술을 꾹 깨물며 제 기세에 버티는 클로라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본 클로비스는 이내 그녀의 상처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너의 그 허영심이 스스로한테 상처를 입힐 정도로 발전했나보구나. 참... 대단해서 뭐라고 말을 잇지 못하겠군.”
“너...!!”
“조용히.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부른 것은 아니니까.”
“!!!”
클로비스는 창백해져가는 클로라를 바라보다가 나직이 입술을 열었다.
“네게 경고를 그리도 해줬는데도 못 알아들었으니 스스로 그에 맞게 책임져야 할 거야.”
“.... 내가 뭘 했다고?”
“일단 동남북 제국의 황제를 모독했지.”
“뭐....?”
클로라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분노에 찬 얼굴로 외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말도 안 된다니... 너야 말로 몇 년간 썩혀둔 그 장식품 같은 머리 좀 사용해보렴.”
“뭐야?!”
“오늘 몇 년 동안 제국을 위해 헌신하고 황족들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기사에게 작위가 주어지는 날이었지. 그런 날, 작위를 받은 기사가 서부제국의 황녀를 검으로 베었다?”
“...!!”
“술도 먹지 않았던 멀쩡한 기사가? 그것도 제국 유일한 대공작의 딸이자 제국의 최연소 마스터가? 심지어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 황성 연회장의 바로 옆에서.... 라고.”
“.......”
“어떠니? 말도 안 되는 것은 어디라고 생각하니?”
“.....”
“이게 거짓인 것을 밝혀지면 너도 중죄란다.”
클로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클로비스는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꽃차가 담긴 찻잔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네가 여태 오해를 한 것을 내버려 두었는데... 이제는 이야기를 해줘야겠구나.”
“..... 뭐..?”
“왜 아버지께서 사생아인 널 황족으로 받아들인 것인지 아직 모르지?”
“..!!!”
“클로라. 불쌍하기도 하지.”
클로비스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서부제국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사를 가진 귀족의 지지가 필요하지.”
“.....”
“그 귀족에게 제 딸을 시집보내 결혼을 성사시킨다면 사돈이 되어 연결이 될 것이고... 그 군사와 권력도 손에 쥘 수 있으며, 심지어는 황권도 안정적으로 갖춰질 수 있을 것이란다.”
“!!!!!”
“그런데 서부제국의 전사로 이름을 다져가는 딸을 그런 이들에게 보내자니 아깝고... 아들은 이미 정혼자가 있고... 그러던 중에 딱 네가 나타났지.”
“...!!!”
“그러니 클로라.”
클로비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잔인한 한마디로 클로라의 가슴을 무너트렸다.
“넌 여전히 버려진 아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