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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125화 (124/218)
  • 125화. 후회는 언제 해도 늦어.

    웅성거리는 귀족들의 분위기는 황궁악사의 연주가 시작된 후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클로라는 그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향해 다정히 미소 짓는 두 기사들을 관찰했다.

    자세히 보면 미묘한 둘의 관계를 눈치가 빠른 이들이라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클로라는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클로비스를 향해 미미한 비웃음을 지었다.

    “황후마마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제게로 오시는지요.”

    “당연히 사랑스런 여동생을 보러 이리 내려온 것이지.”

    “.... 우습네요. 언제부터 사랑스런 여동생으로 저를 바라보셨는지?”

    “하하 언제부터라니.”

    클로비스의 눈이 곱게 휘었다.

    그러나 눈동자 속의 감정은 무척이나 날카롭게 빛났다.

    “사랑스럽다고 해줄 때 적당히 기어 올라오렴.”

    “......”

    클로라의 입가가 미미하게 비틀어졌다.

    클로비스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어 말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알고 싶지도 않고... 내가 굳이 알 필요도 없겠지만... 얌전히 있다가 가렴. 여기서 사고를 친다면 나도 감싸줄 수 없단다.”

    “사고를 친다는 표현은 좀 웃기네요. 그리고 누가 언니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던가요?”

    “클로라, 잘 들어보렴.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클로비스가 클로라에게 다가가 그녀에게 속삭였다.

    “여기는 네가 뛰어 놀만한 정원이 아니란다.”

    “...!!”

    “여기서 수습하지 못 할 일이 생긴다면 후회하게 될 거야.”

    수치심에 클로라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분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작게 외쳤다.

    “협박도 정도가 있지. 네가 뭘 그리 다 안다고 떠들어?”

    “다시 말하지만.”

    “......”

    “네가 뭘 하든, 어떤 일을 저지르든... 후회하지 말거라.”

    그녀의 말에 클로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클로비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뒤를 돌았다.

    여유 있는 그녀의 뒷모습에 클로라의 분노가 차올랐다.

    감당하지 못 할 화로 인해서 그녀의 양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황후가 되었다고 기고만장해선...!!!’

    클로라의 넘실거리는 살기가 클로비스를 향했다.

    지금 당장에라도 독을 뿌려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

    욱하는 마음에 그 생각을 실행하려 손을 움직이려던 그 때, 살벌한 기세로 그녀를 바라보던 클로라의 시선에서 클로비스의 뒤로 누군가 바로 섰다.

    저절로 시선이 차단되자 클로라의 눈이 일그러졌다.

    고의가 다분한 그 누군가를 천천히 바라본 클로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높이 올려 묶은 하얀 은발을 흐트러트리며 클로라를 무감정하니 바라보는 사람은 리사 스페라도... 아니, 이제는 리사 도베로만 백작이었다.

    리사는 클로라를 바라보며 황후의 뒤를 견고하게 지키면서 천천히 이동했고 이윽고 아무 미련 없이 완전하게 뒤를 돌았다.

    명백한 무시였다.

    ‘하...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정말 다 죽여 버리고 싶게...!’

    클로라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내렸다.

    여기에서 받은 분노를 어딘가로 전이시켜야만 지금 당장에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녀의 노란 눈동자가 사냥감을 찾듯이 유유히 걸어 다니는 리사를 훑었다.

    노란 색의 눈동자에 이채가 띄었다.

    *

    세린은 자신을 보호하듯 제 주변을 둘러 서 있는 가족들을 난처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왜 여기에만 있으세요... 가서 리사경이랑 이엔을 축하해주시고 다른 분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셔야죠.”

    그런 그녀를 향해 로레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이라 네 옆에 더 있고 싶어서 그래. 이해해주겠니?”

    “하지만... 모처럼 연회인데...!”

    “연회보다 너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단다. 신경 쓰지 말거라.”

    테오의 부드러운 대답에 세린은 큰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할 수 없다는 웃었다.

    “정말...”

    그 때, 리사가 세린의 곁으로 다가왔다.

    리사를 발견한 세린의 두 눈이 커지며 밝게 미소를 지었다.

    “리사경!”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

    “인사는 거기까지만 해도 족하다.”

    테오는 리사의 인사를 막으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멀리서 수많은 귀족의 무리에 치이고 있는 멀대같은 이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금빛 눈동자 속에서 '누가 저 좀 도와주세요!' 라고 외치는 듯해서 테오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제국의 검에 위험이 생겼으니 주군인 자신이 도와야 하겠지.

    테오는 부드럽게 세린의 머리카락을 쓸어준 후 유유히 이엔에게로 다가갔다.

    이엔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세린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키득키득 웃었고 동시에 아인과 메리가 다가왔다.

    “그간 별고는 없었는지요.”

    “나야 늘 그랬지. 우리 세린은 대공저에서 잘 지내던가.”

    “즐겁게 웃어주시며 잘 계십니다.”

    자연스럽게 에드윅이 두 사람을 맞이하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로레인도 세린의 생활을 들으려 대공부부에게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제이와 리사, 그리고 헤일리와 트레일이 남았는데 헤일리는 눈치를 한 번 쓱 보더니 재빨리 트레일의 손을 잡고 댄스홀로 올랐다.

    “헤일리??”

    트레일의 표정에 당황이 섞이자 헤일리가 나직이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함께 춤이라도 춰요!”

    “나야 좋지만... 갑자기요??”

    “빨리요!”

    세린과 제이에게 둘 만의 시간을 주기 위한 이유였기에 헤일리는 망설임 없이 댄스홀로 이동했다.

    하지만 리사는 그런 눈치가 없었고 그런 눈치가 필요하지 않았다.

    굳건하게 세린의 옆에 붙어있는 리사를 바라보며 제이는 미간을 미세하게 좁혔다.

    네가 최고라는 기색으로 그녀를 관찰하던 제이는 세린의 표정이 조금 시무룩해지자 다급히 물었다.

    “세린, 왜 그러십니까.”

    “..... 제이.”

    제이의 물음에 세린이 조금 기운 없는 모습으로 입술을 열었다.

    “나... 갑갑해서 밖에 나가고 싶어요...”

    제 옷을 잡고 말하는 톤이 너무도 안쓰러워 제이는 다급히 세린의 손을 잡고 이동했다.

    “정원으로 나가죠, 바람을 좀 쐬면 나아질 것입니다.”

    부드럽게 그녀를 이끌고 나가는 제이의 뒤를 다급히 리사가 따랐다.

    마치 그녀에게 길들여진 강아지의 모습이었다.

    연회장 밖의 야외로 나가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세린은 탁 트인 그 공간에서 밝게 웃으며 제이와 리사의 손을 잡았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려 했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저기...!”

    “??”

    세린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뒤를 돌자 보이는 것은 클로비스를 닮은 약간 그을린 건강한 피부와 주황색의 머리카락이었고 여인의 볼륨을 그대로 보여주는 화려한 드레스였다.

    순진하게 빛나는 노란 눈동자를 관찰하자 알게 된 것은 이 여인이 클로비스의 여동생이라는 것이었다.

    세린의 눈이 커지는 것과 동시에 클로라는 입을 열었다.

    “서부제국에서 온 2황녀 로이드 세리 클로라 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요.”

    클로라의 인사에 제이와 세린이 부드럽게 움직여 인사했다.

    리사는 묵묵히 서 있었고 말이다.

    “스페라도 대공작 제이 스페라도 입니다.”

    “스페라도 대공부인 세린 스페라도 입니다. 이야기라니 어떤...”

    “두 분이 아니라... 여기 계시는 경에게요.”

    클로라가 약간 얼굴을 붉히며 리사를 가리켰고 리사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세린은 클로라와 리사의 접점을 모르는지라 당황하며 리사를 바라보았다.

    제이는 그런 두 여인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세린의 손을 잡고 말했다.

    클로라의 말이 마치 리사에게만 이야기하고 싶으니 자리를 비켜달라는 뜻 같았고 리사가 어디서 실수를 할 아이는 아니기에 수긍한 것이었다.

    “그럼, 말씀 나누십시오.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클로라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참 근사한 사람이다 싶은 마음에 멀어지는 그를 관찰하다가 이내 그와 세린의 모습이 사라지자 냉정하게 리사를 바라보았다.

    “또 만나는구나.”

    “무슨 일이십니까.”

    리사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클로라는 팔짱을 끼고 비웃음을 지었다.

    “너 말이야. 어제부터 계속 서부제국의 황녀인 나한테 건방진 것은 아니?”

    “그렇게 느껴지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참나...”

    클로라는 코웃음을 치다가 이내 면면에 가득히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 그 검은 머리의 그 기사랑 서로 그렇고 그런 관계 맞지? 눈만 보면 다 안다고.”

    리사의 눈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게 황녀전하와 무슨 관계이십니까.”

    “관계있지. 내가 지금 네가 마음에 안 드니까.”

    “.....?”

    “괜히 심술을 부리고 싶잖아?”

    “심술이요.”

    “그래, 이렇게.”

    클로라는 머리에 꽂힌 금색의 깃털 핀을 뽑아 날카로운 핀의 꼭지로 제 팔을 그었다.

    팔에 긴 상흔이 생기고 붉은 피가 흐르자 클로라는 부드럽게 핀을 닦은 후 다시 제 머리에 꽂고 약간 웃음기가 담긴 얼굴로 외쳤다.

    “꺄아아악!!!”

    “......”

    멀리서 다급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고 정원에서부터 제이가 다급한 얼굴로 다가왔다.

    달려온 사람들의 무리에는 이엔도 황후도 있었다.

    리사는 가만히 클로라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클로라는 부들부들 떨리는 눈으로 재빨리 이엔의 뒤로 숨으며 외쳤다.

    “미, 미안해요! 그렇다고 검을 휘두를 것 까진...!!”

    “무슨 일이십니까?”

    당황한 이엔이 제 옷 속의 손수건을 꺼내 클로라의 팔에 상처를 감쌌고 리사에게 물었다.

    리사는 여전히 침묵하며 클로라를 바라보았고 클로라는 리사에게만 보이는 비웃음을 지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난 단지... 어제 일을 사과하고 싶어서... 차도 내주지 않고 궁으로 돌아가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려고...”

    애처롭게 떨리는 눈이 너무도 안쓰러웠다.

    클로라는 마지막 쐐기를 박듯이 이엔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아무리 속상했어도... 어떻게 황녀인 저에게 거.. 검을 휘두를 수 있죠?”

    리사의 두 눈에 클로라가 잡은 이엔의 팔에 머물렀고 이내 살벌한 기세를 흩뿌리며 말했다.

    “XX...”

    “?!”

    “재밌게 노네.”

    리사가 나직이 내뱉은 욕설에 클로라의 눈에 당황이 담겼다.

    클로라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리사의 반응에 점차 뭔가 잘 못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클로라의 눈에 비친 리사의 푸른 눈이 이성을 잃었고 사냥감을 찾은 맹견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클로라의 등에 땀이 차기 시작했고 리사는 아주 천천히 클로라에게 다가갔다.

    아주 살벌한 기세를 흩뿌리며 말이다.

    ‘뭐, 뭐야? 왜 다가와...!’

    클로라의 얼굴에 당황이 담겼다.

    그런 그녀를 향해 리사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죽여 버릴까.”

    “!!!”

    ‘이런 미친...!’ 금방이라도 진짜 검을 베어낼 기세로 다가온 리사의 모습에 클로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후회는 언제 해도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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