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결혼준비
제국에는 단 한 분 뿐밖에 존재하지 않는 황녀의 결혼소식에 떠들썩해졌다.
제국민들도 황제와 황족들의 황녀사랑을 잘 알고 있기에 예상도 하지 못한 이 소식이 바람을 타듯 널리 퍼져갔다.
세린의 결혼날짜를 체크하며 식의 규모를 정하던 에드윅과 테오는 한숨을 내쉬며 열정적으로 의견을 나누는 중이었다.
“겨우 황성의 태양궁 홀에서 식을 올린다는 것은 우리 세린의 인생에 단 한 번 뿐인 날입니다. 그런 날을 고작 그 정도의 수준에 멈추는 것은 반대입니다.”
“동감하는구나. 대신전을 빌리는 것도 너무 규모가 작지.”
“즉위식을 올렸던 제국민들과 황성의 경계 계단은 어떠십니까.”
“흠.... 세린이 좋아할 수 있겠구나.”
두 남자는 지금 황제의 즉위식이 있을 때만 열린다는 제국의 수도와 황성의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 계단을 열겠다는 소리였다.
20년 혹은 30년에 한 번씩 열리는 그 경계의 문을 개방하여 세린의 결혼식을 하겠다는 소리에 뒤에 서 있던 시종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테오는 굳어가는 시종들을 뒤로하고 제 턱을 쓸어보며 말했다.
“그리고 제국민들에게도 축제를 열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
“그게 좋겠구나. 로레인과 트레일은 이 사항을 논의하지 않고 어디에 있는 것이냐.”
“세린의 웨딩드레스를 맡겼습니다. 수도에서부터 남부, 서부의 드레스를 모아 세린에게 보여줄 생각인 듯합니다.”
“흠...”
에드윅은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일을 척척 잘 하는 아들들의 모습이 기특한 한편 여전히 세린의 결혼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에드윅은 잠시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아름다운 꽃을 들고 더 아름답게 웃고 있는 그 사랑스런 표정.
자신을 꼭 닮은 분홍색의 머리카락을 곱게 올려 묶고 아리엘을 꼭 닮은 연두색 눈동자로 자신을 온전히 담는 그 모습.
‘아빠.’
늘 자신을 지칭하던 그 단어가 그 날에는 새삼스럽게 다가올 것이 분명했다.
그 환한 미소와 그 애틋한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일까.
에드윅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같은 시각, 세린은 멜과 이엔과 함께 드레스 룸으로 가고 있었다.
“오빠들이 직접 웨딩드레스를 골라서 추려준 거라고?”
“네. 2황자 전하, 3황자 전하께서 며칠 밤을 지새우시며 추리셨답니다.”
“오빠들이....”
세린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져만 갔다.
자신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가족들의 마음이 너무도 따뜻했다.
부푼 마음을 가지고 도착해가는 드레스 룸의 문 앞에서 세린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그녀의 동그란 눈이 커지자마자 멜은 다정히 웃으며 세린의 뒤로 물러나 이엔의 곁에 섰다.
문 앞에서 짙은 남색의 제복을 입고 있는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세린을 마주보았다.
사내의 하얀 은발이 눈썹 위에서 찰랑거렸고 화사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 속의 입술이 근사한 미소를 담았다.
“제이...?”
“전하.”
어째서 제이가 여기에...?
라는 의문과 동시에 반가운 마음이 가득 차올라 세린은 서둘러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곤 그의 넓은 품에 꼭 안기며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제이!”
“보고 싶었습니다.”
“저도요!”
세린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제이가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세린이 수줍어하는 모습으로 키득키득 웃으며 물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에요? 아직 많이 바쁜 것 아니에요...?”
“남부의 일은 대부분 마무리 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전하의 드레스를 고르는 날이니 바쁘더라도 서둘러 와야지요.”
세린의 얼굴이 환해졌다.
제이는 순수한 그 표정변화가 귀여워 그녀의 손을 다정히 잡았고 그녀를 이끌고 드레스 룸에 들어섰다.
뒤에서 보이는 세린과 제이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행복해 보인다고 멜과 이엔은 생각했다.
다정한 두 사람이 드레스 룸에 들어가는 모습을 따라 안으로 들어선 멜과 이엔은 세린과 제이처럼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다.
드레스 룸을 꽉 채울 정도로 수많은 하얀 드레스들이 그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예전, 세린의 성년식을 위해 드레스 룸을 채운 드레스들은 많은 정도라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세린은 제이의 손을 잡으며 이내 침착하게 멜을 향해 물었다.
“멜...”
“네... 전하.”
“추렸다고 하지 않았어?”
“추려서 내보낸 드레스가 마차 12대를 채울 정도였습니다.”
“.... 저 드레스들은 마차 20대는 넘게 필요할 것 같은데....”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 일단 골라보실까요?”
“.... 응.”
세린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아니, 오빠... 추렸다면서요?
고르고 골라서 열심히 드레스를 선별했다면서요??
세린의 눈가에 서린 원망을 읽은 제이가 이내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전하께 어울리지 않는 드레스가 없어서 쉽게 고르기가 힘이 드셨던 것 같습니다. 저도 저 드레스들 모두가 세린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고민이 드는군요.”
“힉!! 제이까지..! 그런 말 말아요!”
세린은 두 볼을 붉히면서도 순순히 그를 따라 드레스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에 닿은 드레스들은 모두 아름다웠고 너무도 눈이 부셨다.
제이는 힐끔 주변을 둘러보며 깊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최대한 그녀의 피부가 다른 이들의 눈에 닿지 않았으면 하는 욕심적인 마음에 재빠르게 목표물을 살폈다.
그런 그의 목적이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세린이 천천히 꺼낸 드레스를 살펴본 후 와장창 무너졌다.
“제이! 이 드레스 너무 예뻐요!”
“.......”
쇄골 밑 가슴을 가릴 정도의 오프숄더로 만들어진 드레스는 상체에서부터 골반까지 원단이 신체에 딱 붙는 식이었고 골반 밑으로는 풍성하게 드레스의 밑단이 펼쳐진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작은 보석들이 가루처럼 뿌려진 웨딩드레스는 너무도 눈이 부실만큼 빛났다.
제이는 입술을 꾹 다물고 해맑게 웃는 세린을 바라보았다.
그래, 세린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큰 문제였다.
그녀의 쇄골도, 하얗고 동그란 어깨와 가느다란 팔도 여실 없이 보일 것이 분명했고... 드레스로 인해 하얀 목의 선과 아름다운 굴곡의 몸이 선명하게 보일 것이었다.
제이는 차마 입어보라는 말도 할 수 없을 만큼 당황했다.
세린은 그런 제이의 고민을 모르고 맑게 웃으며 드레스를 제 몸 위에 대보았다.
“멜! 이건 어때?”
“입어보시겠습니까?”
“응!”
세린이 즐거운 모습으로 멜과 함께 탈의실로 들어갔다.
제이는 그 귀여운 뒷모습을 지켜보다 이내 푹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이엔은 그런 제이의 고민을 알기에 연민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촤라락
그 때, 탈의실의 문이 열리고 작은 의상 무대 위로 세린이 걸어 나왔다.
마치 세린을 위해 만들어진 옷인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눈부시게 빛났다.
제이는 충격에 빠진 사람처럼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고 이내 체념을 담은 미소를 지으며 세린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세린의 손을 잡고 그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매일 반하고 있지만... 오늘 마저도 전하께 또 다시 반해버렸습니다.”
“아하하하 부끄러워요! 그렇지만 정말 고마워요.”
“굳이 다른 드레스를 고를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요.”
“네??”
세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고 제이의 눈은 곱게 휘어졌다.
“지금 마저도 예쁘셔서 눈이 멀 것 같은데... 여기서 더 갈아 입으셨다가는 제가 시각을 잃을 것입니다.”
“힉!!! 제이 정말!!”
제이의 웃음기 가득한 눈동자에 세린이 얼굴을 붉히며 제이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내려쳤다.
제이는 그저 근사하게 웃으며 세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바라보던 제이는 곧 그녀가 제 세상에 함께 서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제 사람이 될 것이었고 제 하나뿐인 여인이 될 것이었다.
소중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절차는 모두 만들어놓았다.
이제 그녀는 늘 그러하듯 태양처럼 웃어주며 즐겁고 행복한 일들만 겪으면 되었다.
그것을 위해 버틴 시간들이었으니 당연했다.
제이는 조심스럽게 세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반드시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노라고... 그리 다짐하며 말이다.
(이 후 제이의 턱시도를 함께 고르려 하였으나 황족들이 준비한 턱시도는 총 10벌밖에 없어서 생각보다 쉽게 고를 수 있었다는 여담이 있다.)
*
시간은 여전히 빠르게 흘러가 곧 세린의 결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제국민들은 큰 축제를 준비하며 즐겁게 웃고 있었고 황성과 대공저의 시종, 시녀들은 황성과 제국수도의 경계 계단에 꽃잎을 뿌리고 보석으로 치장하며 식을 준비했다.
다음 날에 열리는 제국의 유일한 황녀님의 결혼식은 아주 수월하게 준비되어갔다.
세린은 방 침대에서 로레인의 무릎을 베고 누우며 그의 제비꽃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로레인은 세린의 머리카락을 익숙하다는 듯 땋아 내리고 있었다.
“오빠.”
“응?”
“저 내일이면 결혼해요.”
“그렇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요. 내일이면 내 이름도 더 이상 레바스찬이 아닌 거잖아요.”
“속상한 거니?”
“속상하다기보다는... 기쁘면서도 슬퍼요...”
세린의 칭얼거리는 말투에 로레인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곧 그녀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말했다.
“세린. 잘 들으렴.”
“...?”
“성이 비록 바뀌고 네가 이제 황녀가 아닌 대공부인으로 불린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가족이야.”
“.....”
“넌 언제나 아버지의 딸이라는 것과 형님과 나, 그리고 트레일의 하나뿐인 막내라는 것도 변하지 않아.”
“오빠...”
“오빠도, 그리고 아버지와 형님과 트레일도 언제나 널 사랑하고 있어.”
로레인의 화사한 이목구비가 조금 슬픈 감정을 담고 부드럽게 웃었다.
세린의 눈에 천천히 올라오는 눈물을 닦아주며 그는 말을 이었다.
“언제나 황성의 문은 열려 있단다. 우리는 언제고 네가 보고 싶을 테니.... 너도 우리가 보고 싶을 때 망설이지 말고 들어오렴.”
“오빠...”
“오빠의 행복은 항상 네 행복이었어.”
“....”
로레인이 말했다.
“사랑한단다... 부디 행복하게 살아야 해.”
세린은 로레인의 마지막 한 마디에 눈물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