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아빠의 사랑
그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세린이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우와...! 오빠가 언니에게 첫 눈에 반했나 봐요!”
“음...”
서부제국의 기사를 반 죽여 패놓은 그 자태에 반한 것일 수도 있었다.
클로비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쩌다 미래를 약속하고 청혼까지 받은 것이지요. 그래도 어떻게 보면 그때 그 이를 만나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렇게 테리도 만날 수 있었고 세린과 헤일리, 그리고 새로운 인연들과 닿을 수 있었던 것을요.”
“언니...”
“황후마마...”
헤일리와 세린이 찡해진 표정으로 클로비스를 바라보았다.
테오와 사랑 없이 그저 제의와 약속으로 한 결혼이었으나 뒤늦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찾아왔다.
날카로운 면모 속에서 숨겨진 자상함과 그 사랑이 클로비스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클로비스는 다정하게 웃으며 세린에게 말했다.
“저는 세린의 결혼에는 찬성해요. 결혼하고 나서도 자주 황성에 올 것을 아니까요.”
“언니이이...”
“저도 찬성해요. 전하께서 행복하시다면 늘 찬성하고 있어요.”
“헤일리이..”
세린의 눈가가 붉어졌다.
같은 시각, 황족들은 여전히 심각한 회의 중이었다.
세린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허락해줘야 마땅하지만 아직 자신들의 품에서 다른 이에게 그녀를 넘겨줘야 한다는 것이 싫어도 너무 싫었다.
어리다는 핑계도 이제는 적용되지 않으니 더욱 속이 탔다.
트레일은 타오르는 눈으로 “안 돼!!
“를 외쳤고 로레인은 좁아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테오는 이를 갈며 구혼서를 찢어 버릴 듯이 바라보고 있음에 에드윅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
아직 제 눈에는 여전히 작고 여린 그 예쁜 아이가 사랑하는 이의 품으로 가려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 애틋한 미소가 에드윅의 가슴에 천천히 담겼다.
테오는 짙은 한숨을 쉬며 에드윅을 향해 말했다.
“후... 아버지께서 결정해주세요.”
“.....?”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그 결정에 맞춰 따라가겠습니다. 따지고 본다면 세린의 보호자는 아직 아버지 이시니까요.”
“......”
그리고 세린을 향한 애정이 형제들 보다 더 강한 에드윅을 알기에 건넨 제안이었다.
어쩌면 형제들도 그리고 에드윅도 이미 세린의 행복을 위해 결정을 내려놓은 것일 수도 있었다.
에드윅은 아들들의 속상해 보이는 눈을 바라보며 이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입 안이 쓰면서도 달게 느껴졌다.
우리 딸은 이리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에 달콤했고 이제 그런 그녀를 떠나보내야 함에 입 안이 썼다.
늦은 저녁이 되어서 에드윅은 세린의 방 앞으로 찾아갔다.
“아빠?”
방문을 열어주는 애틋한 그 목소리에 저절로 입이 부드럽게 풀렸다.
저 ‘아빠.’ 라는 단어를 듣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에드윅은 열리는 문 사이로 토끼마냥 놀란 얼굴을 한 제 딸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아빠!!”
“잠시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느냐.”
“당연하죠! 어서 들어오세요.”
세린이 서둘러 에드윅의 큰 손을 잡고 부드럽게 방 안으로 이끌었다.
하얀 티 테이블에 마주 앉아 차를 따라주는 세린을 바라본 에드윅은 언제 그녀가 이리도 컸는지 생각에 잠겨갔다.
하얀 눈이 내리던 날의 그 만남에서 세린은 너무도 작았고 너무도 말랐었다.
작은 얼굴 위에 떠오른 그 슬픔밖에 없던 표정도 그녀를 더욱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점점 형제들과 자신에게 사랑을 받아가며 생기를 되찾아가는 세린은 놀라울 만큼 크고 아름다워져만 갔다.
지금 이 날마저 늘 그러하듯 아름다웠고 말이다.
에드윅은 세린이 건네준 차를 한 입 마시며 그녀의 다정한 연두색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아리엘을 닮은 눈매와 눈동자가 여전히 온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에드윅은 부드럽게 말했다.
“결혼이 하고 싶다고...”
“... 네... 하지만 그 소식으로 아빠랑 오빠들을 슬프게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어요.”
“네 마음을 알고 있단다. 진정하거라.”
에드윅은 테이블에 올라온 딸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리곤 나직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 결혼을 반대할 생각은 없단다. 단지 내가 네 아버지로서 아직 해주고 싶은 것도... 해주지 못한 것도 너무 많아서... 아직 놓아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란다.”
“아빠...!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빠가 저한테 얼마나 많은 것을 해줬는데요!”
“너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것 같았단다.”
에드윅이 부드럽게 웃으며 세린을 향해 이어 말했다.
“아빠는 네가 행복하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긍정하고 허락할 생각이란다.”
“아빠...”
“하지만 그 선택아래에서 조금이라도 네 눈에 눈물이 흐른다거나 상처라도 난다면... 생각보다 더욱 화가 날 것 같아. 몰론 상대에게보다도 내 자신에게 말이다.”
“.....”
세린은 가만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에드윅의 손을 붙잡았다.
“아빠는... 너무 한심한 사람이라서 정말 사랑했던 여인을 지키지도 못했지.”
“아빠!!”
마치 금지 된 단어를 들은 기분에 세린이 창백해진 얼굴로 에드윅을 향해 소리쳤다.
에드윅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계속 들어주기를 바란다... 세린.”
“아빠아....”
“너도 알다시피 아리엘은 너희들의 엄마이기 이전에 내 하나뿐인 여인이었단다. 온 마음을 다 해서 사랑을 했고 온 마음을 내뱉으며 수도 없이 고백했었지.”
“....”
“아리엘은 계속 거절했지만 포기를 할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었단다.”
세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에드윅은 멈추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너의 엄마가 수락을 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지. 만천하에 이 소식을 알리고 자랑하면서 그녀를 민망하게 만들기도 했었단다.”
“.....”
“그런데 아빠는... 그녀의 삶이 나로 인해 불행해졌다는 생각을 한단다.”
“!!!!”
“내가 지켜주지 못해 너를 다치게 했고 내가 지켜주지 못해 그녀를 죽게 만들었어. 심지어 죽은 뒤에도 그녀는 푹 쉬지도 못하도록 이리 저리 끌려 다녔지.”
“..... 아빠.”
“제이 공자가 널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 아니란다. 내가 이런 못난 남편이라서... 혹시라도 이런 상황에 네가 괴로워질 일이 생길까봐 그저 그런 불안을 가져서 그랬다.”
세린의 볼을 타고 한 줄기의 눈물이 흘렀다.
에드윅은 “이런.” 라고 말하며 천천히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었단다.”
“.....”
“너희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아빠아.”
세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에드윅의 품에 안겼다.
에드윅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딸을 안아주며 나직이 웃었다.
“내가 할 말은 이것이란다.”
“.....”
“행복하거라.”
“.... 흑”
“힘든 일이 있거든 언제든 날 찾아와야 한다.”
“아빠...!”
“기쁜 일이 있어도 날 찾아 오거라.”
에드윅의 눈가도 살짝 붉어졌다.
“언제나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밤이 깊어지고 에드윅은 태양궁의 테라스 방에서 와인을 들고 있었다.
테오는 그런 그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이야기는 잘 하셨습니까.”
“그래...”
“그래서 지금 이리 술을 드시는 거고요.”
“그래. 저절로 술이 고파지더구나.”
“저도 한 잔 달라고 하고 싶지만...”
“네 방에 테리가 있지 않느냐. 넣어두고 내가 마시는 것만 구경이나 하거라.”
테오는 피식 웃으며 에드윅을 바라보았다.
조금씩 자리를 찾아가는 주름이 근사해 보이는 옆모습이 지독한 그리움을 안고 있었다.
“외로운 것이십니까.”
“외롭다라....”
에드윅이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작게 물결쳤다.
그의 미소가 조금씩 희미해졌다가 이내 다시 깊은 미소를 담았다.
“너희들이 있기에 외로운 줄도 모르고 있었지.”
에드윅의 나직한 그 말에 테오의 미소가 조금씩 슬퍼졌다.
“마냥 어리다고 생각했던 그 아이가 간다고 하니까 별의 별 생각을 다 하게 되더군요.”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구나. 네가 그 정도면 트레일은 오죽 좋은 생각을 했을까.”
“그 녀석의 머릿속은 저도 알지 못하기도 하고 파악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 녀석은 너무 정신없어서....
라는 말은 삼켰지만 이내 그 말이 들리는 듯해서 에드윅이 웃었다.
“세린만 행복해진다면 허락을 해 줄 생각이다.”
“이미 그런 결정을 하실 것이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새삼스럽게 왜 그러십니까.”
“너도 마찬가지가 아니더냐.”
“... 부정할 수는 없군요.”
테오는 물끄러미 밝게 떠오른 달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황제에게 말했다.
“안되겠습니다. 저도 한 잔 마셔야 속이 풀릴 것 같습니다.”
“안 마신다더니?”
“속이 갑갑해지네요. 저도 세린의 오빠라는 사람이라서 이 상황이 속상하거든요.”
“우습구나. 여봐라, 잔을 하나 더 가져 오거라.”
“와인도 한 병 더 가져 오도록.”
결국 두 사람은 하늘의 달이 저물어가기 전까지 와인을 따기 시작했다.
첫째 아들과 아버지는 타들어가는 속을 와인으로 적셨다.
‘사랑하고 있다. 결혼을 해다오.’
나부끼는 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이 얼굴을 찌푸렸다.
‘또 그 소리에요? 난 황후 같은 거 하기 싫어요!’
‘황후의 일은 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내 옆에만 있어주면 족해.’
‘내가 싫다니까요?’
‘어떻게 하면 내 진심을 받아줄 건가?’
‘당신이 황제가 아니면 받아줄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내려오겠다.’
‘미, 미쳤어요?? 진심이에요??’
당황하는 연두색 눈동자가 참 귀여운 여인이었다.
에드윅은 그 동그란 눈매가 너무도 아름다워 밝게 미소를 지었다.
‘진심이라니까 정말 믿지를 않는군.’
‘또라이 같이 정말....’
중얼거리며 내뱉는 욕설마저 귀엽게 느껴지니 참 큰일이 났다고 에드윅은 그리 생각했다.
그래, 자신은 이미 큰일이 났다.
너무도 크게 사랑에 빠져버렸다.
에드윅은 그렇게 깨어나기 싫었던 꿈을 꾸며 잠이 들었고 이윽고 찡한 머리의 두통을 호소하며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