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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108화 (107/218)

108화. 보류하겠어.

두 사람이 언제부터 그러한 관계의 형태가 보였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이엔을 잘 알고 있는 제이이기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곧 있으면 제 어머니로 인해 두 사람의 시간이 금방 끝날 것이 분명했다.

그 잠깐의 시간동안은 이야기를 나누도록 양보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리사의 반응을 살폈다.

약간 당황이 담긴 눈동자 속에서는 고민하는 기색이 언뜻 보였지만 정이 많은 아이라 거절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예상대로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라면 괜찮아.”

이엔의 표정이 밝아졌고 리사는 로레인에게 인사를 한 후 “따라와.” 라는 말을 하며 뒤를 돌았다.

약간의 부끄러움을 담은 걸음이 빨랐지만 이엔은 로레인과 제이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후 긴 다리로 성큼성큼 그녀를 따랐다.

로레인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고 이내 제이를 바라보며 “내일보지.” 라고 말하며 워프했다.

제이는 물끄러미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아직도 비는 거칠게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직도 제 걱정을 하느라 가만히 앉아있는 것조차도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3년... 인가.’

싱그러운 연두 빛 눈동자와 햇살마냥 따뜻했던 그 미소.

저를 안아주던 온기를 한껏 담은 작은 몸.

제이는 언제나 그랬듯 지금마저도 미친 듯이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앞에 로레인이 다시 나타났다.

“... 전하?”

“걱정을 많이 했을 것이다.”

“...?”

“인정하기 싫지만... 네가 필요하겠지.”

“.....”

로레인은 그 말을 끝으로 제이와 함께 세린의 궁 앞으로 워프했다.

제이와 리사의 걱정으로 여전히 불이 켜져 있는 황녀의 궁은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도 밝게 빛났다.

로레인은 사랑하는 여동생의 괴로워하는 모습이 너무도 가슴이 아팠고 그런 그녀를 위한 방법은 이것이었음을 인정했다.

만약 제이와 그녀의 약혼 같은 약속을 알았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까...?

*

제이는 멀리서 보이는 세린의 뒷모습과 그 슬퍼 보이는 그림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가 그녀를 저리도 슬프게 만들었나.

그래, 바로 자신이었다.

제이는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비에 젖어 초라해 보일 제 모습에 그녀가 놀라겠지만 그 작은 품을 꼭 안아주는 것이 먼저였다.

지난 3년 동안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보고 싶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녀는 과거의 자신과 함께 나눈 지난 약속을 기억할까.

그래, 그녀라면 기억할 것이다.

이제 다시는 그녀와 떨어질 날이 없을 것이라고 제이는 감히 장담했다.

그렇게 제이는 세린과 닿았다.

인연을 이었던 긴 끈의 끝에는 단단하게 매듭이 묶여졌다.

*

같은 시각, 리사는 이엔을 대공저로 들이며 말했다.

“일단, 이렇게 젖은 채로 이야기하기에는 내가 찝찝하니까 너도 그리고 나도 씻고 만나자. 옷은 하녀에게 말할 테니까 받아서 욕실로 가.”

“....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엔의 귀가 확 붉어졌다.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수려한 얼굴을 바라보며 리사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두 볼도 옅은 홍조가 올라왔다.

겨우 씻고 오라는 그 말에 저런 반응이라니.

순진하고 순수한 녀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좋아합니다.’

비오는 날의 그 고백은 분명 진심일 것이다.

자신은 그 진심을 앞에 두고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떤 마음으로 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것일까.

리사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 속에서 당황이라는 것을 느꼈다.

몸을 깨끗하게 씻고 실내용 드레스를 입은 리사는 두툼한 숄을 걸치고 이엔이 기다리고 있는 손님방으로 향했다.

철컥

굳건한 문이 열리고 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눈부신 태양을 닮은 금빛의 눈동자와 맞닿았다.

먹구름이 흐트러져가는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선명하게 빛나는 그 눈동자가 몹시도 아름다웠다.

이엔은 하얀 와이셔츠의 소매단추를 잠그고 있었고 그 자세로 리사를 발견했다.

“리사님.”

“..... 뭐하냐?”

“아... 그게 단추가 잘 안 되어서...!”

“이리 와봐.”

리사는 천천히 이엔의 손목을 잡고 그의 소매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단추 구멍이 소매 속으로 감춰져있는 와이셔츠라 아마 이엔의 큰 손으로는 잠그기 어려웠을 것이다.

리사의 손길이 제 손에 닿자 이엔의 얼굴이 점점 붉어져갔다.

리사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무덤덤하게 물었다.

“이런 건 시녀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애초에 도와주려고 했을 텐데?”

“그게...”

이엔이 조금 부끄러운 얼굴로 눈을 굴리다 말했다.

“모르는 여성분들은 조금... 무서워서... 도망쳐버렸습니다.”

“..... 그럼 난 안 무섭고?”

리사의 의문이 섞인 질문에 이엔의 수려한 얼굴에 당황이 담겼다.

그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왜 무서워합니까?”

“!!!!”

리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야!!”

“... 네??”

“너.. 너, 너 말을 갑자기 그렇게..!”

“....?”

리사는 어버버 입을 달싹이며 당황을 가득 담았다.

이엔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그런 리사에게 도르르 굴러갔다가 제 손을 잡은 작은 손으로 갔다가 이내 다시 리사를 담았다.

그리곤 붉디붉어진 귀를 하고 굳게 말했다.

“리사님.”

“..??”

“좋아합니다.”

“!!!”

리사의 얼굴도 이엔 만큼 붉어졌다.

그러나 이엔은 멈추지 않았다.

“정말 좋아합니다. 많은 것을 바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유독 밝아 보여서 리사는 입술을 꾹 다물고 그를 관찰했다.

“그 진심을 너무 늦게 깨달아버려서 이제야 3년 전의 문제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좋아합니다. 리사님.”

리사는 그 진심어린 한 마디에 가만히 서서 이엔을 바라보았다.

수줍은 사내의 고백은 그녀의 마음에 작은 물결을 만들었다.

그러던 중 이엔은 푸른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그녀의 목에 남은 긴 흉터를 발견했다.

아마 드레스에 가려진 상처도 이 흉터보다 더 깊은 흉이 존재할 것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괴로워져서 이엔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천천히 뻗은 굳은살이 잡힌 손이 천천히 리사의 목에 닿았다.

“!!!”

리사의 얼굴이 빳빳해졌지만 이엔은 손을 거두지 못했다.

부드럽게 흉터를 쓸어보며 이엔이 나직이 말했다.

“반란군 속에 친구가 있었습니다.”

“.....!”

“마탑의 지하에서부터 함께 의지하고 기대었던 첫 친구였습니다.”

이엔의 눈가가 조금씩 붉어졌다.

괴로운 일생을 살다 환하게 웃으며 떠난 제 친구의 미소가 이윽고 그의 가슴에 차올랐다.

“마탑에서 겪었던 수많은 실험 때문에 시각을 잃어버렸던 친구였는데... 친구라는 이름으로 저 하나를 살리겠다고 노력했던... 그런 미련한 아이였습니다.”

“......”

“그 아이가 저를 탈출시키고 나서도 마탑에 가둬져 여태 괴롭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 야.”

“전 그것도 모르는 채 살아남았고요.”

“.... 너..”

“그 끔찍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기 무섭다고 죽여 달라고 해서... 전 그렇게 해줬습니다. 그렇게밖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그리 해버렸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친구들을 잃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엔은 감히 그 고통의 정도를 헤어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가늠이 잡히지 않는 그 깊이에 신물이 나올 정도로 스스로가 역겨웠다.

이엔의 괴로운 눈을 바라보며 리사가 양 팔을 들고 그의 볼에 대었다.

찰싹!!

아니, 때렸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엔은 아려오는 볼에 놀라 리사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리사는 그런 그의 수려한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만 묻자.”

“.... 네.”

“그 친구, 갈 때도 불행해보였어?”

“!!”

“널 만나고 원망을 쏟거나 화를 내거나 울거나 그랬냐고.”

“......”

아니, 웃고 있었다.

자신을 만나서 다행이라며 그리도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있음에 안도해주며 예전처럼 따뜻한 미소를 품고 그리 떠났다.

그런 이엔의 눈동자에서 답을 찾은 리사는 굳건히 말했다.

“그럼 된 거야 멍청한 녀석아.”

“.....”

“참나... 너나 나나 늘 이런 면에서는 같은 걸 겪는구나.”

“....?”

이엔이 리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끝이 살짝 올라가있는 눈매가 짙은 죄책감을 담고 있어서 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리사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내 기사단의 기사들도 죽었어.”

“..!!!”

“내가 지켜줄 틈도 없이 사지가 베여서 죽었어.”

“리사님...!”

“단장이라는 사람이 죽어가는 제 기사들을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모르고 웃고 있었어.”

리사는 천천히 이엔의 두 볼을 잡던 손을 풀며 말했다.

“그 녀석들의 가족들에게도 그 녀석들에게도 그 어떤 위로도 되지 않겠지만... 일주일동안 두 사람을 위한 장례식을 치루고 2기사단들과 추모를 하며 묘를 만들어줄 생각이야.”

“....”

“그러니 이엔.”

리사의 굳건한 눈동자가 슬프게 빛났다.

이엔의 가슴을 저리게 만드는 가슴 아픈 미소였다.

“그 녀석들의 길에 안식을 주는 그 시간동안은 대답을 보류하겠어.”

“.....”

“우리 그 시간동안은 우리 사람들을 위해 처절하게 울고 미안하다고 소리치면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자. 그리고 그 뒤에 다시 만나자.”

“.....”

“다시 만나서... 그 때 다시 이야기를 해보자.”

이엔은 리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리사는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었고 이엔을 제 시야에 온전히 담고 있었다.

이엔은 거의 본능적인 마음으로 리사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고 그것을 깨달은 뒤에는 이미 그 행동을 실행하고 있었다.

입술 끝에 닿은 따스한 온기에 이엔의 수려한 눈이 스르륵 감겼다.

부디 그녀도, 그리고 자신도 이 슬픔 뒤에 끝없는 행복이 비춰지길 바랄 뿐이었다.

이렇게 정이 많고 강인하고 우직한 그 마음이 그녀의 장점이었고 동시에 이엔이 그녀를 좋아하게 된 이유였다.

세린이 이엔의 길을 비춰주는 태양이라면 리사는 그런 그를 이끌어줄 대지였다.

실컷 울고 아파한 다음... 다시 그녀에게 고백할 것이다.

그때에는 부디 그녀의 진심에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엔은 차오르는 슬픔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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