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잊을 수 없는 약속
세린은 정신이 사나워지도록 방을 돌고 또 돌며 바쁘게 움직였다.
자칫 몸을 멈췄다가는 끔찍한 생각에 잠식될 것만 같았다.
리사는 무사한지, 제이는 어디로 갔는지, 트레일도 이엔도 괜찮을지 너무도 걱정이 되어 저절로 눈물이 났다.
“후....”
두 손으로 작은 얼굴을 덮고 한숨을 쉰 세린은 이윽고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로 눈물을 참았다.
꾹 다물린 입술 사이로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울음이 섞인 그 소음과 하늘에서 내리는 빗소리가 섞였다.
‘리사경...!’
그녀는 무사한가.
‘제이...!’
그는 살아있나.
자신은 위험에 빠진 소중한 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제 자신의 무력감이 너무도 한심해서 스스로도 비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신물이 나올 것 같은 괴로움에 세린의 고개가 점점 더 숙여졌다.
덜컹!
“...?”
고통스러워하는 세린의 귀에 빗소리에 섞인 하나의 소음이 들렸다.
눈물이 가득 고인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린 세린은 먹구름이 핀 하늘 아래에서 유독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발견했다.
비에 젖은 은발이 마치 은으로 짠 비단마냥 눈부셨고 3년 전보다 화려해진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세린의 시선에서 선명하게 빛났다.
그녀의 입술이 점점 벌어졌고 놀란 눈동자가 더욱 커져갔다.
제이의 푸른 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곱게 휘어진 것과 동시에 세린이 다급히 창문을 열었다.
덜컹!!
비에 젖어 단단한 몸에 딱 붙은 제복을 무시하고 세린은 그리웠던 그 품에 달려들어 폭 안겼다.
실내용 드레스가 젖어가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세린은 그 차가운 품에서 울고 또 울었다.
“흐어어어엉!!”
“전하.”
“흐어어어어어엉!!!”
“세린.”
제이는 제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는 세린을 바라보며 슬프게 웃었다.
자신이 생각한 재회는 이런 식으로 그녀를 울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저와 리사의 소식에 가슴을 졸였을 그녀가 안쓰러워서 제이는 한 팔로 세린의 허리를 감쌌고 다른 팔로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잡아 단단하게 안았다.
그 안정적인 품에서 세린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울지 마세요.”
“으으윽! 흑!! 제이...!!”
세린의 양 손이 그의 목을 감쌌다.
제이는 푸른 눈동자를 조심스럽게 내려 서럽게 우는 세린을 눈에 담았다.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이 짙어지면서도 동시에 오랜만에 마주보는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버틸 수 없었다.
“세린.”
“끄윽!! 끅!!”
“미안해요.”
“흑... 리사... 리사경은 흑...!”
“리사도 무사해요, 나도 그렇고.”
“어헝!!! 정말 다행이야...!!!! 허어어어엉!!!”
제이의 대답에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눈물이 터진 세린은 제이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서럽게 울었다.
제이는 따스한 온기를 품은 작은 여인을 안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얼굴을 보여주세요.”
“흐으윽!!”
“3년만인데... 얼굴도 안 보여줄 건가요?”
“... 흑.”
세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제이의 수려한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토록 그리웠던 보석 같은 연두색 눈동자를 마주보며 제이는 천천히 세린의 두 볼을 감쌌다.
세린은 숙여지는 그의 고개를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고 두 사람의 입술이 마주 닿았다.
제이는 그녀의 아랫입술을 한 입 맛을 본 후 이내 그녀의 입술 사이로 들어서며 깊은 입맞춤을 시작했다.
저절로 세린의 두 볼이 달아오를 정도로 짙은 키스였다.
키스는 그동안 그리워했던 온 마음을 담아갔고 점점 더 깊어졌다.
제이의 손이 그녀의 허리에 닿았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볼을 쓸었다.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세린은 가픈 숨을 몰아쉬었다.
“후아...!”
제이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붉게 달아오른 홍조도, 저를 바라보는 동그랗고 아름다운 눈동자도, 오직 자신만이 머금을 수 있는 귀여운 입술도 무척이나 그리웠다.
지난 시간동안의 불안감과 그리움은 그녀와의 재회에 눈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제이는 다시 세린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떼었다.
쪽
세린은 두 볼을 붉히며 제이의 품에 기대어 눈물을 닦아내었다.
제이는 그런 세린을 제 품에서 놓아줄 생각이 없었는지 그녀의 어깨와 허리를 단단하게 감쌌다.
세린은 그 품에서 안정을 되찾아갔고 제이를 향해 눈물을 훌쩍이면서 물었다.
“리사경은... 정말 괜찮은 건가요?”
“멀쩡합니다. 2황자님 덕분에 상처도 바로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대공저에서 쉬고 내일 황성에 방문한다고 했으니 내일이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흑 정말 다행이에요...”
“이런... 울지 마시길.”
제이는 부드럽게 웃으며 세린의 눈가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세린은 그런 제이를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도, 리사도 무사한 것을 보니 밀려오는 안도감에 다시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전하, 전하께서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이리 달려온 것입니다. 울지 마세요.”
“.... 자꾸 눈물이 나요...”
세린의 투정에 제이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그걸 아십니까 전하.”
“...?”
“남부제국이 이제 정리되었습니다. 반란군도 모두 잡았고요.”
세린의 동그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제이가 부드럽게 눈을 휘며 웃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 위로 먹구름이 조금씩 빛을 담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그칠 것 같았다.
제이는 그런 구름을 배경으로 서서 비에 젖은 모습으로 근사하게 웃었다.
빗물에 푹 젖은 제복에 부각된 단단하고 큰 어깨와 가슴도, 물기가 가득한 하얀 은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와 붉게 물들어진 입술도 세린의 시야에 한 번에 들어왔다.
제이는 근사한 미소로 말했다.
“이제 제 인생을 전하께 드리겠습니다.”
“...!!!”
세린의 연두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제이는 그 귀여운 눈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전하의 인생도 부디 제게 주시겠습니까.”
“.... 제이..”
“이 날만을 기다리며 3년을 버텼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하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마음으로 당신과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세린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온 마음을 다해서... 모든 진심을 담아가면서 매일 당신께 사랑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 제이.”
“당신 하나만이 제가 갖고 싶은 모든 것입니다.”
“.....”
“부디... 이런 저를 구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세린이 천천히 두 손으로 제 입을 감쌌다.
제이는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선명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가진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있을 만큼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이.”
“예전에도... 지금까지도... 전 언제나 전하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제이!”
세린은 결국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고 제이의 넓은 가슴에 안겼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추운 날이었으나 세린과 제이는 서로의 온기에 따스함을 느꼈다.
세린은 제이의 든든한 품에서 말했다.
“저도요.”
“.... 전하.”
“저도 정말 제이를 사랑하고 있어요.”
제이의 큰 손이 부드럽게 세린의 등을 감쌌다.
세린은 눈물로 인해 흐릿해진 시야로 점점 맑아져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랑해요.”
그녀의 말을 끝으로 제이는 다시 세린의 턱을 부드럽게 잡고 입을 맞췄다.
아까보다 더 진하고 너무도 달콤한 키스였다.
깊은 입맞춤 뒤에 제이는 세린의 어깨 위로 이불을 둘러 그녀를 감싸 안았다.
비에 젖어서 혹시라도 자신이 감기라도 걸릴까봐 전전긍긍하는 그의 행동이 귀여워서 세린은 키득키득 웃으며 제이의 가슴에 기대었다.
당장에라도 시녀를 불러 옷을 갈아입으라고 할 기세였지만 세린은 고개를 저었다.
멜을 불러 지금 이 달콤한 시간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
제이의 무릎에 앉아 행복을 느끼던 세린은 문득 생각이 난 듯이 커다란 눈동자를 하고 물었다.
“리사경은 정말 괜찮은 건가요?”
“괜찮습니다. 그 아이가 괜찮지 않았다면 제가 전하께 이리 돌아가지 못했을 겁니다. 제 동생도 지키지 못한 한심한 사람이 어찌 감히 전하께 모습을 비출까요.”
“제이! 그런 말 하지 마요!”
세린이 혼을 내듯 인상을 찌푸리자 제이가 고개를 숙이고 웃으며 이내 그녀의 볼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세린의 볼에 다시 홍조가 올라왔다.
“그래도 리사경과 오늘 같이 있어야 하는 게 좋지 않나요?”
“저도 그리 생각했으나...”
“?”
제이는 이불을 다시 그녀의 어깨까지 올려 입혀주며 말했다.
“이번만 그 시간을 다른 이에게 맡기기로 했습니다.”
“...?”
궁금해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뜬 세린이 귀여워 제이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곧 세린의 허리를 감싸며 말했다.
“곧 알게 되실 수 도 있겠지요. 그러니 전하.”
“네?”
“이제 저에게 집중해주셔야 합니다.”
“!!!!”
제이는 놀란 세린의 입술을 다시 한 번 머금었다.
그리워했던 만큼 수 도 없이 맞추는 입맞춤이 달았다.
*
몇 시간 전, 제이는 2황자의 손길에 리사의 상처가 치료되는 것을 확인하며 수려한 얼굴을 괴롭게 일그러트렸었다.
황자의 손가락도 그리고 리사의 목과 상체에 남은 상처도 흉터가 남아버려 제이는 가슴이 쓰라렸다.
2황자는 약간 지친 얼굴로 제 눈가를 쓸며 말했다.
“오늘은 대공저에서 쉰 후 내일 다시 내 궁으로 오도록. 저주로 인해서 남은 흉터는 내 마법으로 여기까지가 한계다. 내일 한 번 시간을 돌려보도록 하지.”
“그 후의 여파가 황자님께도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평생 흉을 안고 사는 것보다야 나을 것 같군. 더 말을 붙이지 말고 궁으로 와.”
그 말을 끝으로 로레인은 이엔과 리사, 제이를 데리고 대공저 앞으로 워프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집 앞에서 리사는 가만히 문을 바라보았다.
“......”
“들어가 보도록. 이엔 넌 나와 같이 돌아가지.”
“아니요...!”
“?”
로레인이 다시 워프하려고 하자 이엔이 다급해진 얼굴로 서둘러 그림자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가 자신을 데리고 워프하지 못하게 하려는 나름 머리를 쓴 행동이었겠지만 세 사람의 사이에서 쑥 그림자로 숨어버린 그 모습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로레인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엔이 사라진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뭐하는 짓이지...?”
“전하...! 저, 저는 그러니까...”
그림자로 얼굴을 쓱 내밀며 횡설수설 말문을 이은 이엔이 이내 두 눈을 꼭 감고 말했다.
“리사님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리사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고 제이의 눈도 살짝 일그러졌다.
제이는 조금 의문이 섞인 얼굴로 제 여동생을 바라보다가 이내 바람이 빠지는 웃음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