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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105화 (104/218)
  • 105화. 만나서 다행이야

    하늘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바닥을 천천히 적셔갔다.

    이엔의 발걸음은 점차 조급해졌고 지나가는 길 구석들을 살피던 눈은 매서웠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숲을 살피며 달리던 이엔이 서두르는 발걸음을 급히 멈췄다.

    “......”

    자세를 바로 세우고 시선을 한 곳으로 집중한 그는 천천히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더욱 진하게 풍기는 기운은 분명한 어둠술사의 기운이었다.

    ‘가까이에 있다...!’

    근처에 반란군이 매복하고 있거나 그들의 기지가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엔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림자 속에서 밖의 세상을 바라보며 달려간 이엔은 깊은 숲 안쪽에서부터 사람들의 형체를 발견했다.

    ‘50명 조금 안 될 것 같군. 남부에서 잡은 반란군의 수가 많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이엔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보며 그림자를 움직였다.

    제자리를 지키며 서있는 기사들과 짐을 꾸리는 기사들 사이로 거대한 상체에 깊고 커다란 상처를 입은 사내가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있었고 하얀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그를 치료하고 있었다.

    “!!!!”

    이엔은 입술을 꾹 깨물며 비명을 삼켰다.

    아직 존재하는 마탑의 마법사의 모습에 참을 수 없는 과거의 고통과 충격이 그를 강타했다.

    ‘마법사가 살아있다고...? 그때 다 죽인 것이 아니었나...!’

    어쩌면 남부제국에서 황태자와 마법사들 몇 명이 함께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이엔은 심호흡을 하며 가슴을 진정시켰고 떨리던 동공을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검에 베여진 듯이 보이는 상처를 관찰하며 저자가 리사와 전투를 벌인 마스터라는 것을 예상했다.

    이엔은 입술을 꾹 깨물고 생각했다.

    ‘우선은 어둠술사를 먼저 처치해야한다...! 트레일 전하께서 오셨을 때 제일 위험한 존재야. 그 다음은 저 마스터다.’

    그림자 속에서 뒤돌아서는 이엔의 뒤로 사내가 피를 흘리며 물었다.

    “궁수들이 너무 늦는 것이 아니냐...”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 인간이라 기지로 가까이 이동시키는 것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 정도는 예상은 했던 일이니 너무 걱정 마세요.”

    “후.... 새로운 검이 필요하다. 그 무기에도 저주를 담아야겠어.”

    “상처를 치료한 후에 새 검을 찾아드리겠습니다. 저주는 기지를 옮기기 전에 담아드리라 명하겠습니다.”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이엔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며 이내 뒤를 돌아 다시 어둠술사의 기운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이엔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긴장했다.

    물씬 풍기는 짙은 저주의 냄새와 어둠의 기운은 밖에서부터 나는 것이 아니었다.

    어둠술사도 그림자 속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엔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한 인영이 앉아 있었다.

    널브러진 것처럼 앉아있는 인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이엔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 누, 누구야...?”

    “....!!!!!!”

    이엔의 금빛 눈동자가 너무도 애처롭게 흔들렸다.

    어둠술사의 그 인영은 두 동공이 하얀색이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각이 막혀있는 사람이었다.

    더듬거리는 말투도 이엔의 가슴을 찢었다.

    “너, 너도 마, 마탑에 잡힌 ㄱ, 거야?”

    “....”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인영이 부드럽게 말했다.

    “어, 어둠술사는 ㄴ, 내 치, 친구들 말고 오, 오랜만에 봐...!”

    이엔은 한 손으로 제 입가를 가렸다.

    금빛 눈동자에 차오르는 눈물이 그의 눈앞을 가렸다.

    티 없이 맑게 웃는 그 인영은 아주 오래 전...

    이엔을 탈출시키기 위해 그림자 속에서 그를 이끌어주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술사 꼬마였다.

    그 깊은 지하 감옥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버티던 작고 여린 아이가 지금 그의 앞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엔은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땅을 톡톡 적셨지만 이엔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마법사들은 실험에 고문당하던 아이들을 숫자로 불렀었다.

    과한 고문과 잘못된 실험으로 동공이 하얗게 변하고 시각을 잃은 이 아이는 '4번' 이라고 불렸다.

    “.......”

    “너, 어, 어디서 ㅇ, 왔어...?”

    “.... 동북제국에서.”

    “도, 동북...? 이, 이번 반란군 ㅈ, 전쟁 때 휩쓸린 ㄱ, 거야?”

    “.... 응.”

    “그, 그렇구나...”

    이엔은 아이의 앞에 천천히 몸을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4번의 다리를 힐끔 살펴보니 괴상한 형태로 뒤틀려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이엔의 가슴이 소리 없이 무너졌다.

    자신이 도망치고 나서도 아이들에게 했던 실험은 멈추지 않았던 것이었다.

    차오르는 분노에 머리가 차게 식었다.

    4번은 망설이는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더듬거리는 말투가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그, 그러면... 지, 지금 도, 도망쳐...”

    “.....!!!”

    “마, 마스터가 다쳤어. 마, 마법사님도 바, 바빠..! 그림자 속에 숨으면 모, 모를 거야!”

    “......”

    이엔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지고 고통스런 눈물이 뚝 떨어졌다.

    ‘너는 또... 모르는 남을 위해 또 이렇게...’

    이엔은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4번의 손을 잡았다.

    덥썩

    “어??!!”

    “4번...”

    “!!!!!!”

    그의 얼굴에 충격이 맴돌았다.

    “어, 어떻게...”

    “나야... 나 이엔이야..”

    “!!!!”

    4번의 하얀 동공이 커다랗게 변했다.

    “... 이엔...?”

    “늦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정말... 이, 이엔?”

    “... 그래.”

    4번은 조심스럽게 이엔의 얼굴이 있는 방향을 살펴보며 천천히 입매를 굳혔다.

    얼굴을 모르는... 아니, 얼굴을 볼 수 없는 친구였지만 그 냄새나고 지독한 공간 속에서 많이 의지했던 친구이기도 했다.

    마를린의 명령에도 불복하는 모습이 강해보였고 제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도 가슴에 많이 남았던 기억이 있다.

    4번의 손이 천천히 이엔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아, 안 잡히고... 무, 무사히 도망쳤구나.”

    “너희 덕분이야. 너희 덕분에 난 살아있어.”

    “다, 다행이야.”

    이엔은 4번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너도 함께 가자. 여기서 벗어나서 나랑 동북으로 가자.”

    “이엔??”

    “이딴 개 같은 곳에서 더 있지 말고 나랑 가자.”

    숨을 토해내듯이 뱉은 말들을 곱씹어보며 4번은 다정하게 웃었다.

    “ㄴ, 난 못가...”

    “4번!!”

    “알잖아. ㄴ, 날 잘 봐.”

    “.....”

    망가진 이 몸 덩어리를 누가 받아줄까.

    그 누가 온전한 사람으로 바라봐줄까.

    함께 고통을 겪어본 이엔이라면 자신을 이리 친구로 바라봐준다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는다는 것을 앞이 보이지 않아도 직시하고 있다.

    4번은 하얗게 변한 세상 속에서 이엔을 찾아내며 물었다.

    “그럼 네, 네가 여기 오, 온 이유가 혹시 바, 반란군 때문이니?”

    “..... 응.”

    “호, 혹시 내 저, 저주 때문에 다, 다친 사람도 있어?”

    이엔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응.”

    “그렇구나....”

    “.... 날 도망치게 하고 나서는... 모두 어떻게 된 거야? 어디 있어?”

    “.....”

    4번의 눈동자가 슬프게 휘었다.

    다정히 이엔의 손을 잡은 그가 나직이 말했다.

    “나, 나뿐이야. 모두 주, 죽었어.”

    “!!!!”

    “앞이 보이지 아, 않아도 알게 되더라.”

    그래, 그를 도망시키는데 성공하고 친구들은 마를린의 분노에 모두 죽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저 하나를 내버려둔 채 열려있는 제 귀 앞에서 친구들을 모두 죽였다.

    함께 의지할 친구도 고통을 나눌 친구도 모두 잃고 버틴 세월이 몇 년이었을까.

    하루가 지나가는 것을 파악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체념한 시간이 몇 년이었을까.

    그래도.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저를 위해 고통스러워하는 친구가 있음에 안도했다.

    자기는 아직 외톨이가 아니었다.

    “이, 이엔. 잘 들어.”

    “.....”

    “무기에 저주를 담는 것은.. 어, 엄청 많이 실험으로 해보고 ㄸ, 또 해보고 우, 우연히 넣어진 것이지만...”

    “!!!!”

    “그 저주를 받은 사, 사람에게는 고, 고통밖에 주지 못해. 심장에 붙지 않아서.”

    4번의 눈이 굳은 다짐을 담았다.

    “내, 내가 죽으면 저주가 소멸될 거야.”

    “!!!!”

    “심장에 부, 붙지 않은 저주는 내, 내 일부라서 내가 없으면 사, 사라져.”

    “4번!!”

    “그러니까.”

    이엔의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4번의 얼굴에는 가득한 안도가 떠올랐다.

    결국 바람처럼 부드러운 말투로 4번이 입을 열었다.

    “날 죽여줘.”

    마탑의 지하에 가둬진 그 어렸던 시절, 모든 것을 버리고 멍하니 하루를 살아가던 이엔에게 어둠술사 친구들이 손을 뻗었다.

    하나씩 망가진 불편한 몸을 떠안고 신체가 모두 온전한 이엔을 이끌어 마탑 밖으로 던져주던 그 작은 손길을 이엔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멀리 도망가라고.

    도망가서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달라고.

    우리가 이리 살아있노라고 알아달라고.

    그리 외치던 괴로운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는 어떠했던가.

    괴로워하였나? 슬퍼하였나?

    살기 위해서 버틴 것은 저뿐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한데 왜 저 하나를 살리겠다고 그리 희생을 자처했는가.

    이엔의 고통스런 물음에 4번은 웃으며 말했다.

    “친구잖아.”

    그래. 내게도 너희는 소중한 친구였다.

    인생에서 처음 사귄 첫 친구였고 괴로운 시간을 함께 버틴 친구였다.

    앞으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 내가 너를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는가.

    “이엔, 주, 죽이는 게 아니야. 그건 ㄴ, 날 자유롭게 해주는 거야.”

    “.....”

    “그동안 너, 너무 힘들었어. 이제 그만 하고 싶어.”

    소리도 없이 흐르는 눈물이 땅을 적셨다.

    끔찍한 기억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 제게는 고통이라며 이제 편하게 해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어찌해야 하는가.

    제 손을 마주 잡으며 두 눈을 감은 친구의 말에 이엔은 결국 또 한 줄기의 눈물을 흘렸다.

    “너, 널 만나서 다행이야.”

    “....”

    “정말 다행이야.”

    평온해진 얼굴로 행복한 미소를 지은 친구의 손을 놓고 이엔은 조심스럽게 친구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림자 밖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과 천막이 무너지는 소리를 무시하며 이엔은 온전히 친구에게 집중했다.

    마지막으로 마주친 익숙한 그 미소를 바라본 후 눈물에 젖은 얼굴로 손에 어둠을 집중시켰고 강하게 폭발하듯 한순간에 친구는 재로 변했다.

    재로 변하기 직전까지 행복해하는 그 미소에 이엔의 넓은 등은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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