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이엔의 결심
사내의 대검에서 흘러나오는 검은빛의 마력은 그가 마스터라는 것을 증명시켰다.
리사는 마스터의 기세를 온 몸으로 받으며 검을 뽑았다.
길고 날카로운 장검이 소리도 없이 뽑히며 푸른색의 마력을 담았다.
두구구구구구
마스터와 마스터의 기세에 대지가 흔들렸다.
부단장이 다급히 리사를 향해 말했다.
“단장님! 상대는 마스터입니다. 일단 후퇴를 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야, 너 저 새끼 얼굴 한 번 봐봐.”
“....?”
부단장의 시선에 담긴 사내의 표정은 눈에 보이는 듯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리사는 그 표정을 바라보며 비소를 지었다.
“저게 지금 후퇴를 허락할 얼굴로 보여?”
“.....”
“절대 안 놓치려고 할 걸? 나 같아도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물러나. 넌 남은 애들을 챙겨.”
“단장님!!!”
“물러나고 하면 좀 빨리 빨리 물러나라고!! 이 새끼야!!”
“!!!”
부단장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리사는 그런 부단장을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너희들이 있으면 방해야!! 더 사상자가 생기기 전에 네가 기사단을 데리고 돌아가!”
“..... 단장님.”
“명령이다.”
리사는 죽어있는 기사들을 두 눈에 담았다.
이 일에 휘말려 더 이상 제 기사단들이 죽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는 제 사람들을 지켜야했고 지킬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부단장은 그런 리사의 마음을 알기에 더는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결국 부단장은 뒤에 모여 있는 기사단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후퇴다!!! 여기는 단장님께 맡기고 서둘러 기지로 돌아간다!!”
“하지만 부단장!”
“반박은 듣지 않겠다! 마스터와 마스터의 전투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전투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다.”
“.....”
기사단들은 부단장의 고통스런 말을 듣고 입을 꾹 다물었고 부단장은 이를 갈며 서둘러 기사단을 지나쳐 앞장섰다.
기사들은 머뭇거렸으나 망설임 없는 부단장의 뒷모습에 주먹을 쥐고 그를 따랐다.
사내는 멀어지는 기사단을 힐끔 바라보다가 이내 리사의 장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푸른 마력으로 뒤덮인 장검은 금방이라도 살을 찢을 듯이 날카롭게 빛났다.
“너처럼 어려보이는 마스터는 처음이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재밌는 말투를 사용하는구나. 기회를 주지.”
“?”
사내는 대검을 천천히 들어 올려 리사를 가리켰다.
“지금 동북에 계실 남부제국의 황태자전하와 황녀전하를 다시 본래 우리의 제국으로 보내라.”
“개소리도 그 정도면 병이야. 우리가 순순히 돌려줄 것 같아?”
“완전히 귀가 닫혀 있구나. 네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널 죽이겠다.”
“야.”
“?”
사내를 바라보는 리사의 푸른 눈동자에 웃음기가 담겼다.
명백한 비웃음이 담긴 입가와 거만한 눈동자가 매력적으로 빛났다.
“네가 날 죽일 수는 있어?”
“....”
리사의 이죽거림에 사내의 얼굴에 비소가 올라왔다.
“어디 끝까지 그 주둥이가 살아있는지 보도록 하겠어.”
사내의 말이 끝나자 리사의 검에 둘러진 마력이 점차 방대해졌다.
그녀가 두 눈을 한 번 깜빡인 것과 동시에 사내가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챙!!
콰과과광!!!
두 마스터의 검의 마찰에 대지가 갈라지고 나무들이 제 형태를 잃었다.
빠른 속도로 마주 닿았던 검들이 서로에게서 떨어졌고 다시 부딪치기를 반복했다.
두 눈에 담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검들은 공기마저 베어버릴 기세로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챙!! 콰과광!!
같은 시각, 부단장은 기사단을 이끌며 괴로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먼 거리에서도 눈에 보이는 거대한 먼지들의 폭풍과 마력의 파동 속에서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그녀를 생각하자 걸음을 제대로 옮길 수 없었다.
단단히 깨물어버린 이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 너희는 마저 후퇴하도록...”
“부단장님?”
“난....”
제 검손잡이를 붙잡은 부단장의 손이 애처롭게 떨렸다.
차오르는 죄책감과 불안감이 그를 덮쳤으나 망설이지 않고 뒤를 돌아 걸으며 입을 열었다.
“난, 단장님과 함께 돌아가겠다.”
“부단장님!”
“서둘러라!”
부단장은 그 말을 끝으로 망설이지 않고 달려갔다.
*
리사는 빠른 속도로 저를 향해 내리치는 대검을 막아내고 공격하며 입 안을 깨물었다.
연륜이 느껴지는 검의 동작과 그 힘은 그녀를 조금씩 위협시키고 있었다.
자칫 실수라도 했다가는 목이 날아갈 것이었다.
챙!!
사내는 제 공격을 막아내는 리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성의 몸으로 마스터라는 경지에 오른 것도 역사에 남을 정도로 대단한 일이었으나 이정도의 실력이라는 것은 그보다 더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적이었다.
감탄은 그녀가 죽은 뒤에 해도 늦지 않았고 사내는 망설임 없이 대검을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
그의 대검을 막아내려 리사가 장검을 들어 올렸을 때의 일이었다.
아주 먼 거리에서부터 자신과 같은 기세의 마력파동이 느껴졌고 동시에 리사의 검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오라버니?!’
리사의 커진 동공이 짧은 순간 흔들렸고 사내의 대검은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휘리릭!
제 목으로 빠르게 달려드는 대검에 리사는 본능적인 반응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서걱!!
“헉!!!”
검 날이 리사의 목을 스치자마자 상처에 비한 거대한 고통이 그녀를 덮쳤다.
서둘러 뒤로 물러난 리사가 베여진 목을 붙잡고 막혀오는 숨을 억지로 토해냈다.
“헉... 후욱...!!!”
날카로운 검의 날이 그녀의 목을 완벽하게 베어내지 못했음에 사내가 혀를 찼다.
리사는 목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출혈을 막고 있던 손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제 목이 뜯겨져 나가는 듯 한 고통이 그녀를 잠식해나갔다.
그녀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고 이내 시선을 사내에게로 돌렸다.
괴로운 눈동자 속에서 분노가 담겼다.
“... 검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독이냐...!!”
사내의 입가에 비소가 올라왔다.
“그런 유치한 것들은 쓰지 않아.”
“.... 큭....”
“저쪽도 막 시작했나보구나.”
“....?”
사내는 리사의 고통을 즐겁게 바라보다 멀리서 요동치는 제이의 마력을 관찰했다.
리사의 두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사내는 그런 리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걱정 말도록. 네 오라비라는 녀석도 곧 너와 같은 신의 품으로 갈 것이다.”
“...!!!”
“이건 내 제의에 협조하지 않은 너의 탓이니 원망은 하지 말도록.”
사내의 대검이 높이 올려졌고 리사의 푸른 눈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진 것과 동시에 사내의 검이 빠른 속도로 그녀를 베어냈다.
후두둑!!
붉은 핏물이 땅을 가득 적셨고, 리사는 온 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이 저를 덮치기 전에 빠르게 장검을 휘둘렀다.
사내의 눈에 경악이 떠올랐다.
서걱!!!
리사의 검 날이 사내의 목에서부터 옆구리까지 깊게 베어냈고 동시에 그녀의 몸이 힘없이 대지와 맞닿았다.
털썩!
땅 위로 흐트러지는 하얀 은발이 붉은 핏물로 인해 붉게 물들어갔다.
사내는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제 목을 붙잡았다.
붉은 피가 사내의 팔을 타고 내려와 땅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검 날이 너무 깊게 들어왔다.
그녀가 제 검을 일부러 피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설마 그 고통을 무시하고 상처입자마자 제게 검을 휘두를 줄은 더욱이 몰랐었다.
사내는 다급히 제 목걸이를 쥐며 마력을 불어넣었고 동시에 목걸이에서부터 누군가가 나타났다.
쓰러진 리사의 흐릿한 동공이 정확히 그 누군가를 눈에 담았다.
“!!!”
그 사람은 녹 빛의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으며 한 때 마탑의 상징이었던 하얀 로브를 입고 있었다.
리사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마탑의 마법사...!!!’
마법사가 사내의 상처를 살펴보는 것과 동시에 부단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단장님!!!!”
멀리서 부단장이 리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치명상을 입은 사내는 달려오는 부단장과 눈이 마주쳤고 사내의 뒤로 몸을 감춘 마법사는 죽어가는 리사를 힐끔 바라 본 후 제 그림자를 향해 발을 굴렸다.
그러자 사내와 마법사는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자취를 감췄다.
멀리서 느껴지던 제이의 마력도 뚝 끊겼음을 느낀 리사는 천천히 감기는 두 눈으로 제이의 흔적이 사라진 방향을 시야에 담았다.
‘X발.....’
거친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하고 그녀는 정신을 잃었고 다시 눈을 뜨자마자 그 거친 말을 겨우 겨우 내뱉을 수 있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피었고 곧 비가 내릴 듯이 어두워져만 갔다.
리사는 흉터가 생긴 상처 속에서 피어오르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림자로 빨려들어 갔다고?’
사내와 마법사가 그림자로 빨려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 명백했다.
어둠술사마저 아직 존재한다는 것.
리사의 굳게 다물린 이가 맞물리며 으드득 소리를 내었다.
*
같은 시각, 이엔은 트레일과 함께 남부로 이동하고 있었다.
하늘의 먹구름을 볼 때 곧 비가 내릴 것이 분명했고 그렇게 된다면 행군은 늦어진다.
트레일은 서둘러 자신을 따라오는 기사단들과 이엔을 바라보다가 이내 이엔을 향해 말했다.
“너, 먼저 남부로 앞서 출발해서 주변의 위험요소를 제거할래, 아니면 기사단들을 이끌고 올래?”
“... 네?”
“곧 비가 내리면 기사단들이 아무리 서둘러도 가는 길이 늦어져. 그렇다면 앞서 기습할 수도 있을 반란군들을 대처하기도 어려워지겠지. 그리고 그 녀석 흔적도 찾기 힘들어질 거고. 네가 비오기 전에 앞서 갈래, 아니면 내가 갈까?”
“.....”
이엔의 금빛 눈동자가 하늘에 피어오르는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궁에서 걱정하고 있을 여린 제 주군과 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다친 몸으로 떠난 굳건한 기사를 위해서는 자신의 역할은 정해져있었다.
그의 눈매가 굳은 결심을 담았고 트레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가겠습니다.”
마탑도, 어둠술사와의 그 지긋지긋한 악연을 스스로 청산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