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테리
헤일리가 세린과 트레일의 도움을 받으며 점점 제국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시간도 빠르게 흘러갔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남부제국으로 떠난 제이와 리사의 소식은 아주 가끔씩 황제에게로 오는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가 떠나고 단 2개월 만에 반란군 일부를 찾아 그들의 씨를 말렸다는 소식과 6개월 뒤 항복을 자처하며 자백하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스페라도 남매의 소식을 전하는 보고서는 황제에게 들어오는 시기가 정해져있지 않았으나 사건이 생기거나 무언가 변화가 있을 때마다 꾸준히 작성되어 들어왔다.
세린은 그 보고서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듣고 다시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말이다.
“부! 무아!”
작고 앙증맞은 엉덩이를 가진 한 아기가 다이아와 금으로 만들어진 모빌을 향해 두 손과 발을 마구 휘둘렀다.
옅은 분홍빛 머리카락이 너무도 아름다웠고 새빨간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세린은 침대에 누워 모빌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아기를 행복하게 바라보았다.
“부! 부무무!”
“고모! 고모라고 해줘 테리!”
“모무우우 뿌우!”
“꺄악!! 귀여워!!”
세린이 비명을 지르며 붉어진 볼을 감쌌다.
포동한 두 볼이 출렁이며 움직이는 것도 사랑스러웠고 약간 날카로워 보이는 큰 눈동자도 작은 입술마저도 너무 귀여워서 심장이 위태로웠다.
‘귀, 귀여워어어!!’
태어난 지 아직 3개월밖에 안 지난 이 아기의 이름은 테리였고 풀 네임은 테리 에릭스 레바스찬, 바로 테오의 첫째 아들이었다.
테오는 즉위를 하고 정확히 1년 후에 서부의 황녀를 황후로 간택하여 국혼을 올렸다.
둘 사이의 만남,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잘 모르는 세린과 가족들은 어리둥절했지만 테오의 선택에 반대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27살이 되어가는 나이에 하게 된 결혼은 늦은 감이 있었으니 좋은 일이었다.
테오의 국혼 후에도 좋은 일은 연달아 일어났다.
황후가 된 클로비스가 무척이나 유쾌하고 마음이 따스한 여인이라는 것과 얼마 지나지 않아 테리를 임신한 것이 바로 그 좋은 일이었다.
세린은 점점 늘어나는 가족과 활발해지는 황성의 분위기에 하루하루 행복했다.
그리고 동시에 지독히도 외로웠다.
은실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머리카락과 푸른 하늘을 닮은 머리카락.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던 그 다정한 미소.
넓은 가슴과 제게 입을 맞춰주던 부드러운 입술까지.
점점 흐릿해져가는 그의 모습과 기억을 꽉 붙들고 생각하고 기억해나가며 세린의 눈이 슬프게 빛났다.
‘보고 싶어...’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세린의 생각이 깊어질수록 슬픔은 짙어져갔다.
세린은 천천히 올라오는 가슴 속 고통을 무시하며 다이아몬드와 금으로 도배가 된 모빌을 바라보았다.
‘제이...’
그의 이름을 생각하던 세린의 길고 고운 손가락을 테리가 붙잡았다.
“테리?”
세린은 놀란 눈으로 테리를 바라보았다.
앙증맞은 손가락에 힘을 주어 세린의 가는 검지를 꽉 잡은 테리는 세린을 향해 눈을 굴리며 방긋 웃었다.
통통한 볼에 생긴 보조개와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매가 세린의 호흡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런 테리의 사랑스런 미소에 세린의 얼굴에서 슬픔이 사라졌다.
“테리! 우리 멋진 왕자님! 고모 여깄지롱!”
“세린, 테리가 그리도 예쁘세요?”
세린의 귀를 울리는 청아한 목소리에 세린이 밝게 웃으며 그 목소리의 주인을 불렀다.
“클로비스 언니!”
“느허....”
세린의 밝은 부름에 클로비스가 거친 신음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세린이 놀라 허둥지둥 달려가서 부축하자 클로비스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괜찮답니다. 그냥 너무 귀여워서....”
“맞아요! 테리가 너무 귀여워요 언니!”
“세린도...”
“네?”
“아니요, 테리는 잘 웃던가요?”
서둘러 말을 돌린 클로비스가 다정히 세린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물었다.
약간 그을려진 피부에 타오를 듯 한 주황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클로비스는 짙은 초록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세린을 바라보았다.
서부의 제국은 다른 제국에 비해 햇빛이 강하고 주변이 모두 사막이어서 무척 더운 지역이라고 했다. 그래서 제국민들 모두가 태양빛에 그을려진 건강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클로비스는 황녀로 자라는 것과 동시에 전사로도 키워져서 여러 전쟁에 참여했던 기록이 있었지만 세린은 클로비스의 다정하고 유쾌한 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도끼를 들고 싸웠다는 그녀의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테리가 너무 잘 웃는 것 같아요. 이 점은 언니랑 오빠 둘 다 닮았네요!”
“아하하 그 자식... 으흠! 그이는 세린에게만 잘 웃는 것을요? 저를 닮은 거겠지요.”
“네에? 하지만...”
“아니면 고모인 세린을 닮아 잘 웃는 걸까요?”
“그, 그런 걸까나아...”
클로비스의 다정한 말에 세린의 볼에 홍조가 올라왔다.
3년이 지나고 한층 더 성숙해진 세린의 작은 미소는 밝은 방을 더욱 환하게 비춰줄 정도로 아름다웠다.
클로비스는 다시 심장을 부여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느허...!!”
“어, 언니??”
“흠흠! 우리 테리도 저나 그이에게도 잘 안 웃는데 참 신기하네요.”
“정말요??”
“네, 세린이랑 있을 때만 더 자주 웃는답니다.”
“테리...”
세린이 수줍게 웃으며 테리를 바라보았다.
테리는 세린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다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동통한 볼에 생긴 보조개와 앙증맞은 입술이 여간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세린의 가슴 속 근심이 사라질 만큼 행복한 미소였다.
클로비스는 그런 세린을 애틋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갑자기 생각이 났다며 물었다.
“세린, 그러고 보니 세린에게는 연인이 있다고 들었어요.”
“!!”
“지나가다 우연히 들은 것이랍니다. 남부제국을 정리하기 위해서 몇 년 전에 떠났다고요.”
“.... 맞아요.”
세린의 얼굴에 다시 근심이 차올랐다.
클로비스는 그런 세린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곱게 빗겨주며 물었다.
“어떤 이였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아하하! 글쎄요... 어떤 남자였을까요...”
세린의 연두색 눈동자에 천천히 한 사람의 형태를 담아갔다.
그 머리카락, 그 눈동자, 그 미소...
“어렸을 때... 처음 만났어요. 그때도 무척 아름답고 잘생겼었죠.”
“어머나! 폐하보다 잘생긴 건가요?”
“네?? 아하하하! 둘의 잘생김이 달라서 결정을 못하겠네요. 오빠는 분위기가 날카로운 미남이지만 제이는 화사한 미남이거든요.”
“세린의 연인 이름이 제이군요?”
“네!”
세린이 개구지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다 점점 슬퍼지는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하였다.
“제이는... 하얀색의 머리카락을 가졌어요. 눈은 하늘을 담은 것처럼 푸른색이었고... 저를 많이 생각해주고 항상 다정한 착한 사람이었어요. 꼭 매일매일 저를 사랑한다고 이야기도 해줬다니까요? 부끄럽지만 그때는 그게 정말 좋았어요.”
“멋진 사람이네요.”
“그쵸? 정말 멋진 사람이에요 제이는.”
“흠...”
클로비스가 세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침묵했다.
세린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언니?”
“하얀 은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이면... 스페라도 대공자인가요?”
“네! 맞아요!”
“......”
5년 정도 전에 동북제국의 요청으로 북쪽 중립구역의 전쟁에 참전한 적이 있던 클로비스는 스페라도 대공자를 본 적이 있었다.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3년 만에 졸업한 인재라고 소개받으며 전쟁에 참여한 그 어린 녀석은 푸른 눈동자에 은발을 가지고 있었다.
나이가 16살이라고 하던 제이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도 눈에 띄었고 나이답지 않게 커다란 키와 체격이 그녀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를 더 놀라게 만든 것은 바로 천사 같은 외모와 정반대되는 '성격'이었다.
그때는 전장 근처에 세워진 천막에서 적군을 소탕하기 위해 작전을 하는 중이었다.
“XX!!”
“무례하고 시끄럽군. 귀가 찢어지기는 싫으니 조용히 말하도록.”
밖에서 들리는 거친 욕설과 소음에 서둘러 나가본 클로비스는 대치하고 있는 제이대공자와 한 기사를 발견했다.
기사는 붉어진 제 목을 감싸고 창백한 낯으로 거칠게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깟 검 하나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다니 제정신이에요?!!”
“기사가 되어 하는 말들이 모두 뻔뻔한 말들뿐이군. 이참에 기사를 관두고 다른 일을 알아보지 그러나. 남의 등골을 빼먹는 장사꾼은 어떠하지?”
“뭐, 뭐라고!!!”
“아까도 말했지만 넌 너무 시끄러워. 조용히 해줬으면 하다고 분명히 말했다. 아니면 네 귀는 이미 썩어서 제 기능을 잃은 건가?”
“뭐?! 이 XX놈이!!!”
“상스럽기 짝이 없군. 뚫린 입에서 내뱉는다고 다 말이 아니지.”
점점 거세지는 말투에 클로비스가 두 사람의 중심으로 달려가 막았다.
“무슨 일이냐.”
클로비스의 등장에 제이는 살짝 눈썹을 들어 올리다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를 했고 기사는 놀란 얼굴로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클로비스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제이가 기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남의 무기에 손을 대는 것은 기사의 예의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기사로 불리지는 않으나 이런 제 무기에 허락 없이 손을 대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잘못된 것인가요?”
“이익...!”
“그만!!”
클로비스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공자의 검에 손을 댔다는 것이냐.”
“아, 아니 훔친 것도 아니고 부러트린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냥 어떤 검인지 궁금해서 검집에서 열었다가 바로 닫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기사가 존중해야 할 예의를 어긴 것은 틀림이 없다.”
“..... 죄송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이가 비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습군. 네가 죄송해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니던가? 머리에도 근육이 찼나.”
“너..!!!”
기사가 다시 분노로 눈을 불태웠으나 제이는 멈추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나? 그러나 방법이 없군. 네 기분이나 자존심 따위 내가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으니 말이야.”
“야!!”
“네 무례한 욕설과 반말에 내가 지금도 봐주고 있다는 것을 아직도 인지하지 못했나? 지금 당장 사과하지 않는다면 다시는 검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만들어줄 테니 어디 계속 해보도록.”
“!!!!”
제이의 기세가 단번에 살벌해졌다.
클로비스는 16살의 제이가 내뿜는 거대한 살기에 눈을 크게 떴다.
저 나이에 저만큼의 살기를 눌러 담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