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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99화 (99/218)
  • 99화. 새로운 시작

    브론의 눈은 굳게 닫혀있었으나 헤일리는 묵묵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늘 두려워했던 소름 돋는 눈동자는 이제 멀어져있었고 그녀를 덜덜 떨게 만들었던 마법을 난사하던 두 손도 이제는 사용할 수 없었다.

    헤일리는 그런 브론을 두 눈에 담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처참하게 망가져가는 오라버니를 보며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만약 그가 이 제국의 황자들처럼 애정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우리들의 미래가 어떻게 변했을지 몹시도 궁금해졌다.

    평범한 남매, 평범한 일상, 화목한 가족.

    어쩌면 지금 세린의 사랑스러운 일상처럼 자신도 그리고 브론도... 죽어버린 언니와 오빠도 그리 화목해졌을지도 몰랐다.

    늘 웃고 사랑하고 안아주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했던가.

    하지만 우리는 지나간 과거 속에서 서로를 불신하고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지독히도 원망하고 경멸했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었나.

    어디서부터 우리들은 가족이면서도 가족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일까.

    우린 언제부터 잘못된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일까.

    헤일리의 눈에 눈물이 조금씩 고였다.

    브론과 자신으로 인해 죽어간 생명들이 너무도 불쌍해서 눈물이 나왔고 죽어버린 제 형제들 생각에 가슴에 난도질을 당했다.

    그 지옥에서 혼자서만 살아남은 제 자신도 너무나 끔찍했다.

    여전히 헤일리는 죽어가는 이들을 모르는 척하던 방관자였고 동시에 죄인이었다.

    숨이 막히도록 다가온 죄책감으로 인해 절망하는 헤일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로레인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헤일리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브론의 처참한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고 동시에 푸른 하늘 밑의 따뜻한 곳으로 워프되었다.

    창량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 고운 향기를 내뿜는 백화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그 장소는 바로 황성의 정원이었다.

    로레인은 백화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문 헤일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영애가 그 사람으로 인해서 죽어간 인간들이 안타깝게 느껴지듯이 나도 당신이 안타깝습니다.”

    “.....”

    “죄가 없다고 말하지는 못하나 영애의 상황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는 말입니다. 목숨을 위협받는데 입을 열 바보가 어디 있던가요. 영웅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지요.”

    “......”

    로레인의 묵묵한 말에 헤일는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헤일리는 이제 우리 제국의 가족이니까...’

    정말 내가 가족이라고 불려도 되는 것일까.

    속죄하기도 부끄러운... 씻지 못할 죄를 지은 이 내가 가족이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헤일리는 천천히 지독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런 헤일리의 모습에 로레인의 미간이 안타깝게 구겨졌고 동시에 누군가 그와 그녀를 불렀다.

    “오빠! 헤일리!”

    “.....”

    “세린.”

    누군가는 바로 세린과 이엔이었다.

    햇살처럼 눈부시게 웃으며 다가온 세린은 눈물을 흘리는 헤일리를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헤일리!! 왜 울어요? 무슨 일이에요??”

    놀란 목소리로 허겁지겁 헤일리의 앞에 앉은 세린은 부드럽게 헤일리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엔도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헤일리는 고개를 올려 다정한 연두색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고 천천히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따스함을 자신이 온건히 받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차오르는 서글픔에 헤일리가 결국 입을 열고 말했다.

    “전하.”

    “네 헤일리...!”

    “저도 죄인입니다... 저도 죄를 지었으니 그 무게에 맞는 벌을 내려주세요....!”

    “!!!!”

    세린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로레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헤일리는 망설이는 손으로 세린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방관이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헤일리...!”

    벌을 받지 않으면, 자신의 죄를 사죄할 방법을 찾지 않으면 이 지독한 죄책감에 묶여 질식해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헤일리는 자신의 침묵으로 인해 죽어버린 생명들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에 온 몸을 떨었다.

    세린은 울먹이는 헤일리를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헤일리에게 어떻게 벌을 내릴 수 있겠어요!”

    “전하... 하지만..!”

    “헤일리는 날 살렸잖아요. 은인에게 벌이라니...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네요...!”

    “...!!!”

    헤일리의 밤하늘 눈동자가 커졌다.

    은인....?

    세린은 엄해 보이는 얼굴을 흉내 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엔도 그렇고 헤일리까지! 왜 다들 자기 자신을 아끼지도 않고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표현하는 건지... 그거 정말 나쁜 버릇인거 알아요?”

    “.... 전하.”

    “헤일리는 남부에서 나와 제이공자를 살렸어요. 우리 오빠도 헤일리가 구해줬다면서요?”

    “.....”

    “헤일리는 내게 죄인이 아니라 은인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날 살려주려고 노력해줘서...”

    “...... 전하.”

    헤일리의 눈에 다시 눈물이 가득 고였다.

    세린은 그런 헤일리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며 나직이 말했다.

    “헤일리. 나는 헤일리가 이제 과거를 잊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했으면 해요.”

    “.....”

    “지나간 과거의 모든 사람들을 잊고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마음속에서 남겨둬야 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분류해서 잊고 또 기억하고 살아가자는 이야기에요.”

    세린의 따스한 온기를 받으며 헤일리는 고개를 숙였다.

    세린은 헤일리를 조심스럽게 제 품에 안아주며 말했다.

    “헤일리는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어요. 우리 여기서부터 모두 다시 시작해요. 처음부터 다시 살아가요.”

    “..... 전하.”

    “그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했었나 봐요. 미안해요, 그 마음 알아주지 못해서... 하지만, 헤일리가 벌을 내려달라고 몇 번을 말해도 난 절대 내 은인에게 벌은 안 줄 거니까 그렇게 알라고요!”

    “전하...”

    “만약 헤일리가 이번처럼 또 그런 생각이 든다면 나한테 와요! 혹시 알아요? 나랑 이야기도 나누고 산책도 하고 이것저것 하다보면 그런 기억들 모두 잊어버릴지!”

    세린의 그 따뜻한 말에 결국 헤일리는 무너졌다.

    세린의 달콤한 향기가 나는 품에서 헤일리는 울고 또 울었다.

    세린은 그저 다정하게 웃으며 헤일리를 안아줄 뿐이었다.

    그녀의 죄책감에 조금이라도 덜어졌기를 바라며...

    헤일리는 그 날 이후로 세린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다녔다.

    산책을 갈 때도, 식사를 할 때도, 세린이 어딘가로 이동할 때마다 그녀의 옆에 찹쌀떡 마냥 달라붙어 함께 돌아다니기를 반복했다.

    마치 어미 새를 따라다니는 아기 새 같은 모습이었다.

    세린의 옆에 바짝 붙어 걸어가는 헤일리의 모습에 트레일과 황족들의 입이 벌어졌다.

    지금 세린의 옆에서 수줍게 웃는 헤일리의 얼굴은 죄인의 탑에 갔다 온 모습처럼 보이지 않았다.

    세린이 다정히 헤일리를 향해 백화등을 건네주며 말했다.

    “백화등의 꽃말은 '매혹' 이라고 해요. 하얀 꽃잎이 너무 예쁘죠?”

    “전하께서 더 예쁘신 걸요...”

    “아하하! 헤일리도 예뻐요! 자 헤일리! 어때요? 내가 헤일리한테 백화등을 건네주었으니 헤일리가 저한테 매혹이 되었을까요?”

    “...!!!”

    세린이 개구진 얼굴로 장난스럽게 내뱉은 말에 헤일리의 볼에 붉은 홍조가 올라왔다.

    말하지 않아도 단단하게 홀린 얼굴이었다.

    황족들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 인간이 세린에게 반한 사람처럼 구는 거지?

    테오와 에드윅의 미간이 좁아지고 로레인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트레일은 그저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멍 때리며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여인의 다정한 모습은 그 날 하루도 햇살 아래에서 밝게 비춰졌다.

    그날 저녁, 헤일리는 침대에 앉아 멍하니 커다란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부신 달빛이 궁 아래의 꽃들을 비췄고 헤일리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바라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럽게 착지한 한 사람이 방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달빛을 받은 분홍빛의 머리카락이 산들거렸다.

    헤일리는 눈부신 머리카락과 루비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전하...?”

    “헤일리.”

    갑자기 나타난 사람은 바로 트레일이었다.

    트레일은 창문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 헤일리의 앞에 서며 입술을 열었다.

    “헤일리,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네? 어떤...”

    “... 아직도 날 사랑하나요?”

    “!!!!”

    트레일의 뜬끔 없는 물음에 헤일리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 황급히 제 코와 입을 두 손으로 막은 헤일리는 흔들리는 눈으로 트레일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트레일은 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헤일리 요즘... 세린에게 사랑에 빠진 듯이 굴고 있잖아요!”

    “.... 그건.”

    “세린을 사랑하는 건지 날 사랑하는 건지 모르겠다고요!”

    “....”

    헤일리는 멍하니 영락없는 아이 같은 트레일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지금 질투를 하는 것일까?

    나에게? 세린에게?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몰랐다.

    헤일리는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트레일의 모습에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그... 세린전하는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고 다정하시고 저절로 마음이 가는 분이세요.”

    “그쵸?! 우리 애가 매력이 철철 넘치기는 해요!”

    동생 칭찬에 헤벌쭉 웃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리고 저를 굉장히 많이 챙겨주시고 아껴주시고 생각해주시고 저를 위해 노력하세요... 마치 엄마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면... 실례일까요?”

    “????”

    “그리고 세린전하는 안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트레일 전하는 아, 안아주고 싶어요..!”

    빨갛게 익은 얼굴로 내뱉은 말의 파격력이 트레일의 심장을 강타했다.

    점차 거세지는 심장소리와 붉어진 얼굴로 트레일의 입술을 꾹 닫았다.

    괜히 세린과 헤일리 사이를 질투한 제가 한심해졌다.

    트레일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헤일리를 향해 양 팔을 벌렸다.

    “그렇다면 어디 보여줘 봐요. 안아주고 싶다면서요?”

    “.....!”

    “빨리요! 팔 아프니까!”

    헤일리가 망설이는 얼굴을 하다 트레일의 수줍은 미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긋한 걸음을 재촉해 서둘러 달려가 그를 안아주었다.

    넓은 품에 안기자마자 제 등을 감싸주는 든든한 팔도 코끝을 자극하는 시원한 향기도 그리고 따스한 이품도 모두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헤일리는 다른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인생의 첫 발을 세린이 붙잡아주었고 두 번째 발을 내디딜 때는 트레일이 지탱해주었다.

    이만큼 행복한 시작이 또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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