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와인 때문이야
헤일리가 깊은 슬픔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무렵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
헤일리는 천천히 고개를 올려 문을 바라보았고 문 밖에서는 너무도 익숙하고 매일같이 그리웠던 목소리가 울렸다.
“헤일리, 자나요?”
“...!!!”
헤일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와 문을 열었다.
벌컥 문을 열자마자 훤칠한 트레일의 모습이 헤일리의 눈에 담겼다.
“전하...!”
“... 혹시 잠자는데 내가 방해한 것은 아니죠?”
술을 마셨는지 약간 홍조가 오른 두 볼을 하고 난처하게 웃는 트레일의 모습에 헤일리의 볼에도 짙은 홍조가 올라왔다.
트레일과 동북에 도착한지 벌써 한 달이나 흘렀지만 헤일리는 여전히 트레일을 보면 가슴이 떨렸다.
“안 잤어요...! 걱정 마세요.”
“다행이네요. 그럼 저 잠시 쉬었다 가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헤일리는 서둘러 트레일을 안으로 들였다.
트레일은 싱긋 웃으며 방에 있는 쇼파 위로 쓰러지듯이 누웠다.
“흐아... 살겠다아...”
“와인이라도 드셨나요?”
헤일리의 물음에 트레일이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개구지게 웃었다.
“아하하 가족들이랑 오랜만에 마셨어요. 그런데 다들 술이 너무 세서... 자존심 상해가지고 무리를 해버린 것 같아요...”
“그러셨구나... 그렇다면 얼른 방에 가셔서 쉬시는 게 더 좋지 않겠어요?”
헤일리의 걱정스러운 말에 트레일이 멍하니 헤일리를 바라보았다.
“....?”
집중하는 붉은 눈동자에 담긴 제 모습에 헤일리가 볼을 붉히며 당황했다.
트레일은 그런 헤일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아침 먹은 후로는 하루 종일 못 봤잖아요.”
“아....”
“그리고... 헤일리는 내가 곁에 없을 때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불안했어요. 그래서 온 거예요.”
“...!!!”
헤일리의 눈이 커졌다.
트레일은 술기운이 오른 볼을 하고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남부의 일 때문에 헤일리는 아직 상처가 많아 보여서... 내가 헤일리에게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옆에서 불안한 상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 말고는 생각이 안 나서... 그래서 와버렸어요. 오늘도...”
헤일리는 조용히 트레일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참았다.
트레일의 다정함이 헤일리의 가슴에 깊이 담겼다.
저 다정함에 기뻐하는 제 자신이 싫었고 가족의 일을 한순간에 잊어버리는 제 가슴이 미웠다.
헤일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트레일은 붉은 눈동자를 돌려 헤일리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헤일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크고 따뜻한 온기를 가진 손가락으로 헤일리의 입술을 쓸었다.
“내가 매일 동생한테도 이야기하지만... 헤일리한테도 해야겠네요.”
“......”
“입술 깨무는 버릇, 이거 진짜 안 좋은 버릇이에요.”
“.... 전하.”
“고쳐요.”
트레일은 다시 개구진 미소를 담으며 웃었다.
헤일리의 눈에 결국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트레일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우는 것도 나쁜 버릇이에요.”
“......”
“레인형님 말로는 여자의 눈물이 무기라는데... 그거 정말 무기인거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울어요.”
헤일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아내었다.
파도가 밀려오듯 차오르는 안도감이 헤일리의 가슴을 감쌌다.
트레일은 여전히 눈물이 가득한 눈가를 바라보다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헤일리는 아침이랑 밤 같네요!”
“.... 네?”
“눈동자는 밤하늘 같은데 머리카락은 아침하늘 같아요.”
“....!!”
“예뻐요.”
헤일리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타오를 듯이 뜨거워진 얼굴을 웃으며 지켜보던 트레일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 정말 너무 마셨나...”
그래 너무 마신 것이 분명했다.
트레일의 붉은 눈동자가 밤하늘을 담고 아름답게 빛났다.
헤일리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까?
의문이 생기자마자 트레일은 망설임 없이 물었다.
“헤일리, 아직도 날 사랑해요?”
“..!!!”
헤일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것이 마치 그의 질문에 대한 답 같아서 트레일은 큭큭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세린만큼이나 관리가 안 되는 표정들이 귀여웠다.
그의 입가에 피어난 미소가 짙어지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헤일리.”
“.....”
그래, 이것은 와인 때문이었다.
“싫으면 내 얼굴 때려버려요. 괜찮으니까.”
“...!”
그 말을 끝으로 트레일의 고개가 완전하게 헤일리에게로 숙여졌다.
달빛의 그림자 속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마주 닿았고 헤일리와 트레일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싫을 일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마주 닿은 따스한 온기를 품은 입술에서 포도향이 났다.
헤일리는 그 향기에 취해서 생각을 멈췄고 가슴 속의 모든 고민들을 잊어버렸다.
취한 것도 지금 이 순간도 모두 와인 때문이었다.
*
같은 시각, 세린은 로레인의 도움을 받으며 약간 취기가 오른 두 볼을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아빠를 따라 한 잔 마셔본다고 와인 잔을 탈탈 비워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세린은 서둘러 침대에 누워 베개에 얼굴을 묻었고 잠시 후 고개를 번쩍 들며 참았던 호흡을 내뱉었다.
“푸하...!”
연회를 정리하기 위해서 마지막 인사를 한다고 연회장으로 간 황제와 테오가 생각이 났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창문 밖을 살펴본 세린은 아직 연회장의 불이 밝은 것을 보며 파티에 마무리가 안 되었음을 알았다.
‘피곤하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톡톡
“?”
창문으로 시선을 준 세린의 동공이 커졌다.
취기로 인해서 약간 붉었던 볼이 더 붉어지며 환한 미소를 담았다.
“제이!”
창문을 서둘러 열어주자 부드럽게 안으로 들어선 제이는 밤하늘 아래에서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웠다.
제이는 세린에게서 옅에 나는 와인의 향기에 눈을 크게 떴다.
“와인이라도 드셨습니까?”
“아...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마셨어요...! 냄새가 나나요?”
제 옷소매를 올리며 킁킁 냄새를 맡는 세린의 모습에 제이가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포도향이 납니다. 많이 드셨나요?”
“음... 한 잔밖에 안 마셨어요! 더 마시려고 했는데 아빠가 안 된다고 해서...”
“그렇군요. 역시 폐하께서는 훌륭하신 아버지십니다.”
“... 제이! 나 놀리는 거지요?”
“그럴리가요.”
제이의 다정한 미소를 흘기며 세린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제이는 작게 웃으며 세린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곧 연회가 끝납니다. 폐하의 인사가 끝나면 저도 이제 마차를 타고 대공저로 가야해요.”
“벌써요?”
세린의 얼굴에 아쉬움이 담기며 제이를 바라보았다.
저 커다란 눈동자 속에서 나오는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제이는 입술을 꾹 다물다가 이내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저도 아쉽지만... 내일도 있으니까요.”
“!!”
세린의 얼굴이 바로 환하게 변했다.
술로 인해서 붉은 홍조가 오른 두 볼이 사랑스러웠다.
세린은 부드럽게 제이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런데 내일은 메리 부인과 예법수업이 있어서요. 평소보다 조금 시간이 미뤄질 것 같은데...”
“... 어머니와요?”
제이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갔다.
세린은 그런 변화를 모르고 상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메리 부인덕분에 이제는 자수로 장미도 그릴 수 있어요! 정말 멋지신 분이세요.”
“네...”
난처해 보이는 그 미소를 바라보며 세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이??”
“.... 어머니께서는 뭐든 잘 하시기는 하죠...”
“맞아요! 뭐든 잘 하시고 예법도 완벽하시고 애교도 너무 귀여우신걸요!”
“!!!!!!”
세린의 마지막 한 문장에 제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애교를 봤다고...?
내가 아는 그 애교를 설마 세린에게까지 했다는 거야..?
제이의 창백해진 표정에 세린이 당황했다.
“어머니께서... 전하께 애교를 부리셨다고요...”
“아아...! 그거요?”
세린의 표정이 난처하지만 사랑스러운 미소를 담았다.
“네! 정말 귀여우셨어요!”
“..... 제가 아는 그 애교가 맞는지요.”
“어... 음... 제이가 아는 그 애교와 같지 않을까요?”
“........”
세린이 불안에 떨고 있는 제이의 푸른 눈을 마주보다가 이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밝게 웃으며 작은 손으로 주먹을 꾹 쥐었고 제이의 단단한 가슴에 투닥이며 외쳤다.
“쩨이 쩨이~~~! 떼리니는 툑탕해~~!!”
“....!!!!”
“떼리니는 쩨이랑 또 놀구티포!!”
제이의 눈이 커졌고 세린의 얼굴은 뻔뻔했다.
그 뻔뻔스러운 표정을 보며 제이는 생각했다.
‘취하셨구나... 티가 나지 않으셔서 몰랐군.’
저 애교는 세린이 와인 한 잔으로 얼큰하게 취한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제이는 빳빳해진 얼굴로 그런 세린을 바라보았고 세린은 스스로도 웃겼는지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품에 기대었다.
그 모습에 제이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고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제이는 천천히 손을 내려 세린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나직이 말했다.
“전하.”
“네에?”
“그 애교는... 이제부터 저에게서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바라는 것이 있을 때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
“아주 효과가 좋을 것입니다.”
세린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바라보며 제이가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무척 부드러운 손길로 세린을 안아들며 침대에 곱게 눕혀주었다.
제이는 세린의 분홍빛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말했다.
“이제 자야할 시간이십니다.”
“난 제이랑 더 있고 싶어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주무셔야 합니다.”
“칫... 재우는 게 뭐가 사랑하는 거야...”
“풋...!”
투덜거리는 말투가 영락없는 애기였다.
제이는 황급히 웃음을 참으며 어깨를 떨었고 이내 세린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재워주지 않았을 겁니다.”
“거짓말... 나 안 사랑하죠?”
“아닙니다.”
“안 믿을 거야...”
“.... 곤란하네요.”
“흥.”
제이가 난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위험하게 번뜩이는 눈동자를 하며 물었다.
“믿음을 주면 됩니까?”
“어디 줘 봐요!”
“..... 전하께서 도망치신다면 일주일동안 스스로 근신하겠습니다.”
“네?”
제이는 그 말을 끝으로 세린의 부드러운 볼에 천천히 제 입술을 맞대었다.
쪽
“..!!!!!”
세린의 얼굴은 잔뜩 붉어졌고 그녀에게서 옅은 포도향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