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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90화 (90/218)

90화. 황제의 행복

천천히 숙여지는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이엔은 제 발을 바라보며 눈을 내렸다.

리사는 그런 이엔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딱히 네가 잘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어.”

“......”

“근데 이거 하나만 물어보자.”

“....?”

리사의 푸른 눈과 이엔의 금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리사는 그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고백하지 않은 거 후회는 안 해?”

“......”

후회를 하냐고?

이엔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그리고 고운 선을 그린 듯 슬프지만 아름답게 미소를 지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리사는 그런 이엔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끼고 툴툴 거리며 대꾸했다.

“그럼 됐네...”

“... 감사합니다. 리사님”

“창피하니까 감사인사 하지 마!”

“... 네.”

이엔의 미소가 다정해졌다.

리사는 어두워진 밤하늘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려 이엔의 눈을 맞추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웃지 마! 정들어!”

“......”

어두운 하늘 위의 달빛을 받은 하얀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가 너무도 아름답게 빛났다.

그 푸른 눈동자가 곱게 휘어지며 미소를 짓는 장면이 느리게 이엔의 가슴을 스쳤다.

‘두근.’

“......?”

알 수 없는 고동과 함께 이엔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왜 그래?”

“.... 아닙니다.”

당황스러운 이엔의 귓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제국에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

테오는 황실의 방에서 황제와 마주 앉아서 와인을 들고 있었다.

국민들의 축제가 한 눈에 보이는 그 방은 수도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는 세린을 위해서 넓은 창문과 망원경까지 동원하여 설치된 세린만을 위한 방이었다.

황제는 듬직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와인을 마시는 제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분이 어떠냐.”

“.... 아직까지는 미묘합니다.”

“내일이면 달라질 것이다. 이제는 앉아야 하는 자리가 달라지니까 말이다.”

“그렇겠지요.”

“많이 힘이 들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 각오는 했습니다.”

테오의 굳건한 눈동자가 황제의 마음에 안심을 가져다주었다.

황제는 피식 웃으며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고 천천히 창문 밖의 축제를 시야에 담았다.

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었던 한 해가 끝나가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걸어가는 길이 꽃밭이 되었을까?

이제는 향기만 남은 그 길에서 아이들이 안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황제는 여전히 불안했다.

혹시라도 또 다시 생긴 사건과 사고에 제 자식들이 위험에 처하기라도 한다면...

저절로 떠오르는 끔찍한 기억에 황제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테오가 그것을 눈치 채고 입을 열던 순간 누군가 문을 벌컥 열었다.

“아버지!”

트레일이었다.

트레일의 상쾌한 미소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게 했다.

트레일은 과묵한 부자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손에 있는 와인을 흔들어 보였다.

“뭐야... 먼저 마시고 있었어요? 괜히 가져왔네!”

툴툴거리는 막내 남동생의 모습이 귀여워 테오가 한 손으로 옆 의자를 가리켰다.

“너도 앉거라. 같이 들자꾸나.”

트레일은 그 말에 후다닥 제 형의 옆에 앉았고 황제가 건네주는 잔을 받으며 개구지게 웃었다.

“이야! 이런 자리는 오랜만인 것 같아요!”

“그렇구나. 함께 술을 들었던 자리는 며칠 없었지.”

황제는 다정히 웃으며 트레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때 허공에서 푸른빛들과 함께 로레인과 그의 품에 꼭 안겨있는 세린이 나타났다.

세린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아빠! 오빠!”

로레인은 부드럽게 세린을 품에서 내려주었다.

황제는 옆 의자를 꺼내어 세린이 앉을 수 있도록 도왔고 트레일도 제 옆 의자를 끌고 와서 로레인의 자리를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가족 모두가 모인 넓은 방은 따뜻한 온기가 가득 찼다.

“아빠! 이번 주방장이 만들어준 레몬 크레이프가 엄청 맛있었어요! 생크림 말고 레몬시럽이랑 꿀을 사용해서 만든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거 엄청 달던데... 넌 그렇게 달달한 걸 먹고도 왜 살이 안찌는 거야?”

“안찌면 좋은 거 아니에요?”

“넌 좀 쪄야한다고...!”

트레일의 툴툴거림에 세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제 배와 손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에 앉은 황제의 팔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며 물었다.

“아빠, 제가 말랐어요? 이정도면 정상 아닌가..?”

황제는 세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며 웃었다.

제 딸의 얇은 손목과 가느다란 신체를 힐끔 바라 본 황제는 나직이 말했다.

“트레일의 말처럼 살을 찌울 필요는 있겠지만... 내 눈에는 지금 모습도 예뻐 보이는구나.”

“정말요?”

세린의 동그란 눈매가 곱게 휘었다.

트레일은 “아버지만 매일 좋은 역할이야...!” 하면서 틀툴 거렸지만 황제는 그 모습마저 귀여워 부드럽게 웃었다.

로레인도 피식 웃음을 지으며 테오의 잔에 와인을 채웠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 걱정이더구나.”

“부족한 것을 제가 채워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언제든 돕겠습니다.”

“형제들을 내 무능으로 인해 힘들게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신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씩 제 유능함이 필요하실 때는 말씀해주시죠.”

“재밌구나. 그럴 때는 꼭 부탁을 하도록 하지.”

황제의 눈이 애틋해져갔다.

자신보다 훨씬 작았던 아이들은 이제 저를 뛰어넘을 만큼 자라났다.

황제는 제 자식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테오는 지나간 과거 속에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홀로 자라고 홀로 섰던 아이였다.

제 어린 동생이 눈앞에서 저주로 죽어가는 모습이 그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동생의 저주 때문에 사라진 엄마의 심정을 알기에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자신이 너무 작고 약하기 때문에 엄마와 동생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었다며 스스로를 원망했던 테오였다.

‘제가 강해져야 가족들이 안전하겠지요.’

‘테오.’

‘동생들을 지키려면 여기서 훈련을 멈출 수 없습니다.’

황제는 동생들이 혹시라도 위험에 빠질까봐 전전긍긍하며 이를 악 물었던 첫째아들의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

로레인은 페르돈 후작의 반란이 모두 제 탓이라며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어린아이시절이 있었다.

아니라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수백 번을 외쳐도 둘째 아들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누구보다 아리엘과 세린을 사랑했던 로레인이었기에 황제는 그녀가 사라진 시점에서 더 이상 그를 위로할 수 없음을 실감했었다.

과거를 생각하는 황제의 입매가 점차 굳어갔다.

황제의 시선에 쾌활하게 웃는 트레일로 향했다.

아리엘이 사라진 후부터 웃음을 잃었던 막내아들이었다.

세린의 몸이 썩어가면서 나는 죽음의 냄새가 트레일을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엄마는 죽어가는 동생과 함께 사라졌었다.

트레일은 아직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나이에 엄마와 동생을 잃었고 미소도 잃었다.

황제는 상처로 얼룩진 아들들에게 무엇을 해줬던가.

과연 자신이 아들들에게 최대한으로 노력했던 것일까.

황제의 눈에 슬픔이 담겨지며 천천히 막내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랑스러운 딸은 5살의 나이에 온 몸이 썩어가며 죽을 뻔했다.

그리고 백성들의 분노를 받아가며 내쫓기듯이 아리엘과 함께 황성에서 도망을 쳤다.

그렇게 잃어버린 딸과 아내를 찾기 위해서 황제는 하루아침이 지나가는 줄 모르고 달리고 또 달렸다.

7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힘들게 다시 만난 작고 마른 딸을 마주했을 때의 그 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황제는 소리 없이 울었다.

딸을 만난 것에 너무도 감격하여, 그리고 딸을 이제야 찾은 제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여.

그렇게 겨우 겨우 찾은 하나뿐인 딸과 함께 성으로 돌아가자 모든 것들이 바뀌었다.

형제들은 웃음을 되찾았고 온 마음을 쏟아 세린을 사랑했다.

어린 동생의 잃어버린 시간과 잊어버린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고 사랑하며 매일같이 울고 웃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서로를 아끼고 의지하며 자랐고 황제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눈부시게 성장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 커버린 제 자식들이 눈앞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이것만큼 자랑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이 순간만큼 행복한 시간이 또 언제 있을까.

“아빠! 이제 저랑 둘이서 테오 오빠 옆에서 먹고 자고 먹고 자고만 하면 되겠어요! 어때요??”

“아버지와 세린까지는 내가 평생을 놀 수 있도록 허락해주마.”

“아니 형님! 그럼 나는요!!”

“이런, 트레일. 넌 나이도 그렇고 기사단 단장이라서 아직까지는 놀 생각을 해서는 안 되지 않겠니? 20년 뒤에 다시 생각해보자꾸나.”

“2... 20년이요?!.... 레인형님!!”

“아하하하!!!”

황제의 미소가 짙어졌다.

너희들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다.

그런 너희들의 행복을 위해서 무엇인들 하지 못할까.

아름다운 밤하늘 밑에서 황성은 밝게 빛났고 황제의 마음도 밝게 빛났다.

*

헤일리는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며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병들어 죽어가는 아버지와 끔찍한 죄를 지은 오라버니.

그것을 알아버린 형제들의 잇따른 실종.

그리고 알게 된 형제들의 죽음에 오라버니의 죄를 보았음에도 보지 못한 척, 들었음에도 듣지 못한 척을 하는 제 자신.

살고 싶어서 형제의 죄를 묵과했고 그 조용함의 대가로 등에 새겨진 마법인장은 족쇄가 되어 헤일리를 구속했다.

헤일리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에서 질기게 버텼었다.

트레일이나 세린 없이 혼자 남겨질 때마다 그 지나간 인생과 시간들이 떠올라 괴로워진 헤일리는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제 안전해.

이제 난 자유로운 사람이야.

마법인장도 없고 오라버니도 없어.

그렇지만... 가족들도 없어...

‘헤일리.’

크고 굳은살이 단단하게 잡힌 따뜻한 손을 뻗어 어린 헤일리를 안아 올리던 푸른 머리카락의 사내.

남부의 황제이자 헤일리의 아버지였던 사람.

황제는 모든 자식들에게 과묵했지만 자식을 안아주는 손길에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성격에 오해를 많이 받은 황제였지만 헤일리는 그런 아버지의 숨어있는 애정이 너무도 좋았었다.

이제는 그 온기를 다시는 만질 수 없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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