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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89화 (89/218)
  • 89화. 나도 똑같아

    이엔은 황성의 나무 밑 그림자에서 세린과 제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복잡한 마음을 느꼈다.

    사랑하는 이의 행복에 자신도 행복했으면서도 사랑하는 이의 그 행복에 슬퍼지기도 했다.

    이 복잡하고 뒤죽박죽인 마음을 누가 알까.

    이엔은 멍하니 세린의 머리에 다정히 입을 맞추는 제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아름다운 두 사람이 서 있는 테라스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엔의 금빛 눈동자가 슬프게 빛났다.

    작은 고통이 담긴 수려한 눈동자 속에서 세린은 행복해 보였다.

    이엔은 이내 고개를 돌리며 자리를 뜨려했다.

    “야.”

    갑자기 나타난 리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리사님.”

    이엔의 눈이 커지자 리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다가왔다.

    황성을 지키는 제 2기사단의 단장 근무자세가 참으로 멋졌다.

    이엔은 자신의 뒤에서 행복해 보이는 연인의 눈치를 보며 슬쩍 리사의 시선에서 그들을 가렸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뭐래, 보면 몰라? 근무 중이잖아.”

    껄렁이며 말하는 톤이 수도에 놀러온 시정잡배 같은 느낌이었다.

    근무 중인 기사단장이라고 누가 알아줄까.

    이엔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리사의 시선을 돌리려 말했다.

    “여기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다른 곳들은 다 배치가 되었는지요.”

    “기사들 배치는 끝났어. 여기가 마지막이고.”

    “아, 그렇다면 이번 연회에는 리사님도 함께 참여하시는 것이...”

    “야.”

    “..... 네?”

    “너 뭐 숨기는 거 있냐? 왜 날 보내려고 해?”

    이엔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전혀 아닙니다! 단지....”

    “됐고 저리 비켜봐! 황녀님 가끔씩 테라스에 나오셔서 수도 구경하신단 말이야.”

    “....!!!”

    서둘러 시야를 가리는 이엔을 밀며 리사가 눈을 부라리자 이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말리기도 전에 리사는 테라스에서 제이의 품에 안긴 작고 사랑스러운 황녀를 눈에 담아버렸다.

    으드득

    이를 다 갈아버린 소리와 함께 리사가 튀어나가려 발을 구부리자 이엔이 재빠르게 그런 리사를 두 팔로 막았다.

    “리사님!!”

    “이 씨ㅂ....!”

    그리고 자유로운 입을 한 손으로 서둘러 봉인했다.

    “브읍븝으으읍읍!!!”

    “리사님! 일단 진정을...!”

    “읍븝쁘븝으으읍!!”

    살벌한 눈빛이 이엔 자신에게로 향하자 막힌 입 속에서 뱉는 말들이 욕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이엔은 이러다 세린이 보기라도 할까봐 서둘러 리사를 데리고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갔다.

    그림자로 끌고 오자마자 리사가 이엔의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야 이 씨XXX 너 죽으래?? 이 개X....!”

    “리, 리사님... 진정하세요...!”

    이엔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다급히 리사의 어깨를 양 손으로 잡았다.

    “심호흡!! 심호흡을 하세요!!”

    “이이...!!”

    분노를 담은 리사의 눈동자가 푸르게 빛났다.

    이엔은 난처함과 미안함에 가만히 리사의 어깨를 잡아주며 그녀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리사는 이엔의 어깨를 잡은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휙 소리를 내며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시작했다.

    “후욱....! 후아......!”

    “리사님...”

    이엔이 천천히 그녀를 부르자 리사는 다시 냉정을 되찾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둠 안에서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며 테라스에 서있는 세린과 제이를 눈에 담았다.

    푸른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이 너무도 슬퍼 보여 이엔은 머뭇거리다 이내 리사를 따라 고개를 올려 그들을 눈에 담았다.

    그녀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야.”

    “.... 네.”

    “너 황녀님 좋아하지?”

    “...!!!!!”

    이엔의 얼굴이 번쩍 뜨이며 창백해졌다.

    리사는 그런 이엔을 바라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눈만 보면 다 안다고... 멍청아.”

    “.......”

    리사의 하얀 머리카락이 어둠속에서도 밝게 빛났다.

    이엔은 그런 리사의 하얀 머리카락을 바라보다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리사님도... 황녀전하를 많이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

    “... 리사님?”

    “처음에는 예뻐서 좋아했었어.”

    “......”

    리사는 여전히 세린과 제이를 바라보며 묵묵히 말을 이었다.

    “사랑스럽고 참 예쁘셔서 호감이 저절로 갔지. 외면만 보고 반했다고 하면 될 거야.”

    “......”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순수함이라던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의 착한 모습이라던가, 다정함이라던가... 왜인지도 모르게 전하의 성격을 알아가면서 불안함을 느꼈어.”

    그래, 세린은 어릴 때부터 사소한 것에서도 감동을 느끼고 고마움과 미안함을 느끼는 여린 사람이었다.

    다양한 감정들이 들어나는 순수한 표정에서 자신을 향한 온전한 애정과 호감을 두 눈으로 마주했을 때 어떠했던가.

    리사는 놀랐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가슴을 거칠게 뛰게 만드는 그 햇살 같은 다정한 미소에 넋을 잃었다.

    불안했다.

    저 상냥한 마음과 다정함 때문에 그녀가 이용이라도 당한다면?

    그래서 받은 상처가 너무 커 다시는 저렇게 웃지 못하게 된다면?

    그 상상을 하자마자 리사는 생각했다.

    그 미소를 지켜주고 싶었다.

    언제나 진심으로 행복하게 웃을 수 있도록 지켜주고 싶었고 항상 그 웃음을 바라보며 살고 싶었다.

    리사의 사랑에 정의는 이엔과 같았다.

    “저렇게 행복하게 웃는 사람이 상처라도 받으면 다시는 웃지 못 할 것이라고 어린 마음에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아... 내가 저 사람을 지켜줘야겠구나...'하고 결심도 했었지.”

    이엔은 그런 리사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정도로 세린을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인지라 리사가 얼굴에 비웃음을 가득 지었다.

    “왜, 여태 내가 한 말들이 다 농담인줄 알았어?”

    “농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엔의 입술이 머뭇거렸다.

    “단지....”

    “똑바로 말해.”

    리사의 단호한 말에 이엔이 올곧은 눈으로 리사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저랑 마음이 똑같아서.... 놀랐습니다.”

    “....”

    리사의 입 꼬리가 올라가며 조금 씁쓸한 기색을 담아 웃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수려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늘 전하께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는데, 넌 아니잖아?”

    “.... 저는 마음을 전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또 웃기는 소리한다. 어디 들어나 보자! 왜 네 마음을 전할 수 없는데?”

    “.......”

    이엔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그러나 정말 궁금하다는 기색이 가득 찬 리사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달빛에 취한 것인지 제 속마음을 들어 낼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누구보다 입이 무거운 리사를 알기에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내뱉을 수 있었다.

    “죄 없는 민간인들... 그리고 제국민들을... 제 저주로 많이 죽였습니다... 아직도 손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처럼 틈만 나면 생각이 나고 불안해요. 제가 이 저주로 황녀전하마저 위험하게 만들까봐...”

    리사는 조용히 이엔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엔은 그 조용한 침묵에 감사해 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마탑의 노예였다는 그 신분도... 어둠술사라는 그 능력도 전하께 피해를 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위험한 능력을 가진 것만으로도 전하께 다가가기 힘든데 더럽고 끔찍한 과거도 있다는데 저를 누가 반가워할까요. 따지고 본다면 저는 죄인이자 살인자니까요.”

    이엔의 눈이 끝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가슴 속을 괴롭히는 깊은 과거의 흔적과 죄책감이 늘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리사는 점점 고통으로 얼룩져가는 이엔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힘을 실어 이엔의 머리를 강하게 내려쳤다.

    퍽!!!!

    “... 큭!!”

    이엔은 갑작스럽게 날아온 주먹에 맞은 부위를 움켜쥐며 리사를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리사는 냉정한 눈으로 그런 이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 리사님...?”

    “사람을 죽인 건 나도 똑같아.”

    “..... 리사님..!”

    “나도 여러 전투나 전쟁에서 수많은 기사들을 죽였다.”

    이엔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예시가 다릅니다. 저는 죄가 없는 민간인들이었어요.”

    “다르기는 뭐가 다르다는 거야? 내가 베어낸 다른 나라의 기사들은 그 민간인들과 비교해서 뭐가 다르지?”

    “정말 모르셔서 묻는 것입니까...?”

    “내가 말하려는 요지를 파악하지 못했어, 너 이 새끼야.”

    “.....?”

    “마법사들이나 암살자같이 쓰레기들은 제국민들의 목숨과 비교불가인 것을 나도 알아. 그런데 내가 베어낸 기사들은?”

    “.......”

    “그 사람들도 누군가의 아버지였으며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었을 거야. 또는 하나뿐인 남편일 수도 있겠지. 누군가는 집에서 사랑스런 토끼 같은 자식들이 제 아비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들을 위해 전쟁터로 나온 녀석이었을 수도 있지.”

    “...!!!!”

    이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리사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며 쓰게 웃었다.

    “그런 자들의 목을 내가 베어냈다. 집에서 하염없이 그 사람들을 기다릴 가족들의 희망과 기도를 내가 무너트렸어.”

    “........”

    “이런 내가... 도대체 너의 그 끔찍한 과거랑 뭐가 다르지?”

    이엔은 뒤늦게 깨달았다.

    제국의 기사로써 적들을 베어내고 영광을 받아가기에는 리사는 매우 어렸다.

    출중하다 못해 매우 뛰어난 그 능력으로 인해서 그녀는 너무도 빨리 잔인해진 제 그림자와 손에 묻은 피를 발견해 버렸다.

    죄책감에 얼룩진 것은 이엔 뿐만이 아니었다.

    이엔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입을 열고 사과했다.

    “제가 이야기를 잘못 꺼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상황에서 사과하는 것도 웃긴 것은 아냐?”

    “........”

    “그리고....”

    리사는 그림자 속에서도 맑게 빛나는 눈동자로 묵묵히 말했다.

    “그 신분이고 뭐고 그 틀에서 강박되어 있는 건 너 아니야?”

    “!!!”

    “전하께서는 신분이고 위치고 높이고 그 어떤 것도 신경도 쓰지 않으시고 올곧게 사람을 바라보는 분이시라는 것은 네가 더 잘 알겠지. 오히려 네가 혼자 겁먹고 도망친 거 아니야?”

    이엔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게 맞았으니까.

    리사의 말이 정확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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