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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88화 (88/218)

88화. 제국민의 아버지

테오는 세린의 그 수줍은 표정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굳었다.

언제나 자신을 향해 두 팔을 뻗어 안기던 그 작은 아이가 이제는 저리도 성숙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늘 제 품속에만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리도 빨리 그 날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마음을 로레인도 마찬가지였다.

이르다고 하면 이른 것은 아니다.

세린은 이제 곧 있으면 18살이 된다.

짧지도 않은 긴 시간동안 누군가를 연모하는 소녀의 마음을 가진 적이 없던 세린이었기에 아직은 그 때가 거리가 먼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세린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 마음은 진심이라는 것.

‘결사반대’라고 외치려던 테오와 로레인의 마음은 세린의 수줍은 표정 하나로 무너졌다.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단순한 트레일 마저도 세린의 그 말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너 진짜 정말정말 진짜로 그... 그 새.. 아니 그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했잖아요... 그 마음이 사랑이 맞는지 잘 모른다고...”

세린이 난처하게 웃으며 볼을 붉히자 트레일이 버럭 소리쳤다.

“아니, 그게 사랑이잖아!!”

“.....”

결국 세린의 혼란스러운 마음이 트레일로 인해 확정이 되었다.

'난 지금 제이공자를 사랑을 하고 있는 게 맞구나.'

저절로 세린의 얼굴이 환해지며 크게 미소를 지었다.

트레일은 자기가 말해놓고 분했던지 부들부들 떨다가 외쳤다.

“너 정말 연애할거야??”

“.... 오빠?”

“연애가 뭔지 알아? 응?? 어떤 건지 알아??”

세린은 열불내는 트레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가 느끼는 감정이 질투라는 것을 깨닫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트레일의 옆 의자에 털썩 앉아서 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오빠, 왜 화가 났어요?”

“.... 화가 아니야... 그냥 네가... 나쁜 새끼한테 휘둘리기라도 할까봐...”

세린의 팔짱은 풀지 않고 툴툴 말을 내뱉는 트레일이 귀여웠다.

세린은 그런 트레일과 속상해 보이는 가족들을 향해 말했다.

“난 그래도 우리 가족을 더 사랑해요.”

“.... 그렇게 넘어갈 생각은 하지말지? 그 거짓말에 누가 속아?”

“난 정말인데요?”

“......”

끄응 하면서 입술을 쭉 내민 트레일의 모습에 세린이 맑게 웃음을 터트렸다.

세린의 그 웃음에 황제는 한숨을 깊이 내쉬며 할 수 없다는 듯이 웃었고 로레인과 테오도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제이는 근 일주일간 황궁출입이 깔끔하게 금지 당했다.

세린도 모르게 말이다.

그 통보를 받으며 제이는 인상을 일그러트렸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세린에게 받은 편지 속에서 제이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천천히 음미했다.

편지지 속에서 보이는 귀여운 글씨는 제이와 세린의 관계를 사랑스럽게 정리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서로를 신뢰하는 것. 힘든 일이 있을 때 서로 고통을 나누고 의지하는 것. 손을 잡거나 안아주며 온기를 나누는 것.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사랑하는 것... 이라....’

그 야무진 내용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제이는 눈을 휘며 웃었다.

금지당한 일주일은 이 편지 한 장으로 버티기에 충분했다.

제이는 편지를 곱게 접어 기밀서랍 안으로 소중히 넣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다시 일주일이 지났고 모든 국민들이 고대하던 테오의 황위 계승 날짜가 다가왔다.

테오는 금색의 자수가 달린 하얀색의 제복을 입고 붉은 망토를 걸친 황제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창문 밖의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깊이 잠겨 있었다.

오늘은 동북... 아니 이제는 동남북을 통일시킨 이 제국의 특별한 날이었고 자신에게도 특별한 날이었다.

제국의 황제인 아버지의 품에서 나와 이 제국을 다스리고 소통하며 국민들을 사랑해야 한다.

제국의 아버지라는 그 자리의 무거움을 알기에 테오는 굳은 결심을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이런 날, 만약 어머니가 계셨다면 그 분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

그런 생각을 할 무렵 그의 등에서부터 작고 따뜻한 손이 테오를 감쌌다.

“.....”

테오는 그 손길의 주인을 이미 알고 있어서 부드럽게 웃으며 뒤를 돌았다.

“세린.”

“오빠...”

세린은 대기실에 들어오자마자 그 굳건한 뒷모습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듬직한 등에 매달린 마음의 짐과 다짐들이 세린에게까지 느껴졌다.

세린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가가 마음이 가는 대로 그의 등을 꼭 감싸 안았다.

“가서 기다리지 않고.”

“아빠는 자신이 훌륭한 황제가 아니라고 했어요.”

“.......”

“무능하고 약했던 어리석은 황제였다고 그러더라고요.”

“.... 우습구나.”

동쪽과 북쪽의 나라를 통일해서 제국을 세운 남자가 무능?

그 제국의 국민들을 위해서 황제가 피와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정찰을 나갈 때마다 왁자지껄하고 즐거워 보이는 국민들의 모습은 알고 있었다.

그런 황제가 무능이라고... 웃기는 소리였다.

세린도 테오의 반응에 수긍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아빠가 하는 말씀이 맞는 것도 있었어요.”

“뭐냐.”

“오빠는 아빠보다 더 훌륭하게 제국을 이끌 수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

테오가 침묵했다.

“제국민들의 아버지로써 잘해낼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했어요...”

세린은 천천히 테오의 품에서 떨어지며 그의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 속에서는 수십 개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세린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얼마나 오빠 자랑을 늘어놓던지... 제가 다 질투를 할 정도였다고요!”

“.......”

세린의 투정에 테오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세린은 그의 그 미소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오빠...”

“..... 그래.”

“우린 가족이니까... 만약 오빠가 황제가 되어서 힘들고 막 큰일이 생긴다면... 난 그때처럼 망설이지 않고 달려갈 거예요.”

“...... 미련한 소리 하지 말거라.”

“에이 정말...! 그 정도로 사랑한다는 거죠!”

세린이 입술을 쭉 내밀며 외치자 테오가 부드럽게 웃으며 세린을 감싸 안았다.

사랑스러운 막내에게서 받은 위로는 그 어떤 것보다 값졌다.

가치를 정할 수 없는 그 위로가 테오의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어쩌면 어머니도 살아계셨다면 이런 위로를 제게 건네지 않았을까.

그 따뜻한 온기로 저를 품에 안아주며 응원해주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당신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했다.

지금쯤이면 내 모습이 당신이 자랑스러워 할 수 있을 정도로 커 보이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당신에게 나는 언제나 작은 아들로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의 첫째 아들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이 제국의 황제가 된다.

이런 나를 당신이 부디 자랑스럽다고 여기길 바랄 뿐이다.

*

황위 계승식을 위한 무대는 매우 화려했다.

제국의 수도와 황성의 경계선에 있는 넓은 무대에서 식은 시작되었고 높은 계단 위에서 황제는 화려한 금으로 만든 왕관을 착용하며 귀족들과 제국민들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이 자리에 제 아들이 앉을 것이며 이제는 이 자리 밑에 있는 모든 제국민들을 제 아들이 보듬어야한다.

이 자리의 무거움을 알기에 테오가 걸어올 수많은 계단들이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의 마음은 항상 그랬다.

“제국의 작은 태양, 황태자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찬란한 소리를 내뿜는 나팔과 휘날리는 꽃잎들을 배경으로 테오가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계단을 올랐다.

황제와 황태자의 눈이 마주쳤고 테오는 망설임 없는 발걸음으로 황제를 향해 걸어갔다.

그 거침없는 발걸음과 여유가 넘치는 표정에 황제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 황제가 될 저 사내가 제 아들이다.

그는 이 제국의 황제의... 아니 황제였던 남자의 자랑이었으며 믿음직한 자식이었다.

황제는 다가온 테오에게 제 왕관을 옮겨 씌어주며 부드럽게 웃었다.

“기억하거라. 나는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저도 아버지의 선택을 수락한 것에 후회는 없습니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저도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봄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로레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영상구를 통해 이 아름다운 장면을 담았고 트레일은 무척 즐거운 모습으로 박수를 쳤다.

세린은 테오와 황제의 모습을 밑에서부터 올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사랑하는 가족의 특별한 날은 세린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테오는 그 날, 누구보다 눈부신 모습으로 황제의 자리로 올랐다.

*

황성과 제국민들의 마을은 새로운 황제를 축하하며 깊은 밤까지 연회와 축제를 즐겼다.

아름다운 불빛과 샹들리에 속에서 사람들은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며 즐겁게 웃었다.

테라스에서 보이는 제국민들의 축제와 테라스 안에서 들리는 귀족들의 즐거움에 세린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런 세린이 들고 있던 샴페인을 뒤에서 다가온 손이 부드럽게 빼내었다.

“어...?”

세린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고개를 올리자 자신을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다정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제이를 발견했다.

세린의 볼에 홍조가 오르면서 환하게 웃음이 나왔다.

“제이공....! 아니지...”

세린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이!”

제이의 미소가 깊어졌다.

“전하,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아... 하하하하 조금 부끄럽네요... 제이공자와 의미가 달랐으면 어떡하죠?”

세린의 민망한 웃음을 바라보며 제이가 세린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길이 너무도 조심스럽고 부드러워서 세린의 홍조가 짙어졌다.

“다를 리가 없지요. 전하가 정의를 내린 것이 정답이면서 동시에 명답입니다.”

“정말요?”

“네, 그러니 이제 실천을 해야겠지요.”

“.....?”

세린의 눈이 올곧게 제이를 담았다.

달빛을 받은 연두 빛 눈동자가 제이의 마음을 거칠게 두드릴 정도로 선명했다.

제이는 천천히 세린의 손을 잡고 그녀를 제 품에 가두었다.

온 몸을 감싸는 따뜻한 온기와 안정감에 자연스럽게 그의 허리에 팔을 감은 세린은 단단한 가슴에 기대어 작게 웃었다.

제이는 키득키득 웃는 세린의 머리카락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녀가 놀라지 않게 천천히 다가갈 생각이었다.

제이에게도 세린에게도 첫 연애였고 첫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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