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제한시간 10분
동북제국에는 다시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왔다.
로레인은 남부의 일로 마력을 많이 사용해서 조금 긴 휴식기를 가졌지만 건강했고 리사는 다음 날 바로 황궁의 기사단으로 복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멀쩡했다.
이엔도 세린의 뒤를 지키며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였고 트레일도 마찬가지로 기사단의 단장으로 일터에 돌아왔다.
제일 상처가 심각했던 제이도 대공저로 갈 수 있을 만큼 완전히 회복되었다.
세린은 모두가 건강하고 안전해졌다는 것에 안도를 느꼈다.
테오의 능력으로 남부가 동북에 합쳐지며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테오의 황위계승식의 날짜도 점차 다가왔다.
세린은 방에 있는 테라스에 앉아 어둡지만 달빛으로 인해 밝게 빛나고 있는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푸른 장미가 세린의 시야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 예쁘다...”
세린은 장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마치 누군가가 떠오르는 푸른 꽃잎에 세린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제이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눈을 뜬 다음 날부터 대공저로 돌아갔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황궁에 오지 않았다.
그것이 세린을 속상하게 만들었고 말이다.
‘웃겨 진짜... 먼저 그렇게 고백한 사람이 소식도 없고 오지도 않고...’
입술을 삐쭉 내밀며 못내 서운한 마음을 지우려 노력한 세린은 푸른 장미를 보며 기운 없이 웃었다.
상대를 잘못알고 말한 걸까?
초점이 맞지 않았으니 충분히 제 모습이 잘 안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을 착각하고 그런 고백을 했을 수도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세린이 입술을 꾹 다물고 하얀 구두를 신은 제 발을 바라보았다.
“......”
그 생각을 하자마자 갑갑해진 속이 너무도 쓰라렸다.
‘어쩌면... 그냥 매일 보고 싶고, 안고 싶고 그 사람 생각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
세린은 천천히 자신의 사랑의 정의를 알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세린이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성을 사랑하는 마음의 차이를 배워가고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세린의 생각은 깊어졌고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오빠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면 자신은 어떨까?
당연스럽게도 축하해주고 내 일처럼 기뻐할 것이다.
그렇다면 제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면?
드레스를 부드럽게 만지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작은 손이 꼭 쥔 드레스가 점차 세린의 손에 의해 구겨졌고 세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절로 침이 마르고 속상해지는 마음이 심란해져갔다.
그 생각을 이어서 하기가 너무도 힘겨워 세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의 문을 닫으려 손을 뻗었다.
창문을 닫기 위해 뻗은 손이 누군가의 그림자로 인해서 가려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
세린이 그림자에 놀라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달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머리카락 밑으로 정원의 장미를 닮은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굵은 얼굴선에서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눈에 띄었고 하얀 셔츠 밑의 검은 바지가 너무도 잘 어울렸다.
다부진 체격이 옷 밖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세린의 눈이 커졌다.
“... 제이공자...?”
“전하.”
바로 제이였다.
제이는 자연스럽게 테라스 안으로 들어와 긴 다리를 쭉 뻗고 세린의 앞에 섰다.
세린이 여전히 놀란 눈으로 고개를 올려 제이를 바라보자 그가 근사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 공자...”
“황성이 바빠서 그랬는지... 황궁에 접근하기도 어렵더군요.”
제이의 난처한 웃음에 세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 남부의 일을 마무리하는 중이라 황성의 문이 열리지 않았었나 봐요...”
“..... 그렇겠군요.”
“그랬구나... 그래서 공자가...”
“네?”
“헉!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린이 두 볼을 붉히며 방금까지 안도했던 제 자신에게 민망함을 느꼈다.
제이는 그런 세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대공저로 돌아가고 나서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 황족들이 재빠르게 황성의 문을 닫고 대공저에 소식을 보내지 않았다.
황녀의 소식과 황족의 소식이 끊기자 어이가 없던 제이였다.
누가 봐도 '넌 당분간 우리 애랑 떨어져 있어라' 라는 표시였다.
자기가 도대체 뭘 했다고 이리도 경계하는지 제이의 눈썹이 올라갔지만 이내 떠오른 기억에 잠시 침묵했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정신없이 내뱉은 제 고백과 당황하는 그녀의 연두색 눈동자.
“......”
흐릿한 기억이었지만 그건 이미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가 혹시 저를 어색해 하면서 무시하고 시선을 피한다면 그건 정말 상처겠지만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
제이는 마음을 다잡고 황성을 찾았지만 황성은 여전히 굳건하게 잠겨있었다.
그러다 오늘, 매일같이 찾아온 그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2황자가 직접 황궁의 문을 열어주었다.
“10분주겠어.” 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주어진 시간은 황문에서부터 10분, 그러나 세린의 궁까지 빠르게 달려가도 5분, 고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5분이었다.
완전한 억지였지만 제이는 수긍하며 감사히 그 시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달려온 후 마주친 그 하얀 얼굴은 그 동안의 마음고생을 달래주듯 그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제이는 달빛을 받아 아름다운 세린의 얼굴을 마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여전히 그녀는 아름다웠고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세린은 제이의 웃음에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눈을 또르르 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세린의 그 어색한 공기를 보며 제이는 그녀가 제 고백을 아직 기억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착잡한 마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하.”
“ㄴ... 네??”
“부담스러우시고 불편하시다면 내치시면 됩니다.”
“.... 네?”
세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제이는 묵묵히 말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하께 말씀드린 그 고백. 제 진심이기도 했지만 전하를 힘들게 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불편하시거든 잠시 전하와 거리를 두겠...”
“아니!!!”
“습니.... 예?”
“아, 아니!! 거리를 둘 필요는 없어요!!”
“전하?”
세린은 제이의 말을 들으며 점점 안도하는 제 심정이 우스웠다.
그 고백은 제 자신을 향한 말이 맞았고 그는 그 고백을 내뱉은 기억도 온전히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이 그리도 설레서 거리를 두겠다는 제이의 말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너무도 부끄러웠지만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드물게 놀란 얼굴을 한 제이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평소보다 깊어진 눈매가 올곧게 세린을 담았다.
나부끼는 부드러운 저녁 바람이 세린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고 정원에서 날아오는 푸른 장미의 꽃잎이 그녀와 제이의 주변을 맴돌았다.
세린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제이의 두 손을 꼭 잡고 외쳤다.
횡설수설한 말투에서 다급한 티가 느껴지더니 아니나 다를까 대뜸 세린이 소리쳤다.
“안고 싶어요!!!!!”
“........ 예?”
제이의 얼굴이 굳었다.
“힉!!! 아니 그게 아니라!!”
세린이 식겁하며 고개를 저었고 다시 말했다.
“누, 누가 그랬어요! 다른 사람이 시선을 주는 모든 것에 질투를 하고 욕심을 내고... 매일 보고 싶고 아.. 안고 싶고 생각이 나면... 그게 사랑이라고...!”
“......”
제이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세린은 부끄러움이 떨리는 동공으로 시선을 회피하며 서둘러 더듬더듬 말했다.
“내, 내가 지금 그래요!”
“!!!!”
“내가 지금 공자가 보고 싶고 안고 싶고 생각이나요!!”
말하면서도 세린은 창피함과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그.. 그러니까... 공자가 다른 사람이랑 사랑에 빠진다고 한다면... 엄청 속상하고 화가 날 것 같고 힘들 것 같고... 막 그래요...”
“.....”
침묵을 지키는 제이가 답답해서 세린은 결국 정원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말했다.
“제가 공자를 사랑하나 봐요!!!!”
“.......”
동시에 제이의 멍한 얼굴이 확 붉어지며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세린의 곧은 눈동자가 붉어진 그의 얼굴을 여실 없이 바라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의 제이가 큰 손으로 코와 입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잔뜩 붉어진 그의 귀와 피부를 보며 세린이 오히려 놀라버렸다.
부끄러움을 타는 제이는 처음이었다.
“공자...?”
세린의 연두 빛 눈동자를 떨리는 동공으로 바라보던 제이는 이내 “푸핫!
“ 하고 웃음을 내뱉으며 천천히 세린에게 다가갔다.
홍조가 가득한 그의 얼굴에 신기해하는 것도 잠시였다. 세린은 다가오는 제이의 넓고 단단한 가슴에 폭 안겼고 얼굴을 확 붉혔다.
제이는 작디작은 세린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며 나직이 말했다.
“서로 같군요.”
“.... ㄴ, 네에...”
그의 시원한 향기와 따뜻한 온기가 온 몸에 가득 느껴지자 세린의 눈이 정처 없이 떨려왔다.
제이는 그런 세린을 향해 물었다.
“그럼 이제 저희는 무슨 사이인가요.”
“!!!”
세린이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한 듯 눈을 크게 뜨며 식겁해 하였다.
‘그.. 그럼 무슨 사이지? 서로 사랑하면 무슨 관계야??’
그 답을 아직 잘 모르는 순진한 세린이 귀여워 제이는 웃었다.
“특별한 사이, 그리고 새로운 관계가 되겠지요.”
“어... 무슨....?”
“연애, 그리고 애인.”
“...!!!”
“아직 전하는 그 단어를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우리는 이제 그런 관계이니 책을 통해 알아보고 편지를 주세요.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가, 가려는 건가요...?”
마치 바로 돌아가려는 듯한 제이의 기색에 세린이 서둘러 제이의 셔츠를 붙잡았다.
제이는 잠시 멈칫하며 입술을 꾹 깨물다가 “후....” 심호흡을 하며 세린을 향해 말했다.
“저희의 사이에 대해 알아내셔서 편지를 주시면 다시 달려오겠습니다.”
“제이공...”
“이제는.”
“.....?”
“제이라고 부르시면 되시고요.”
“....!”
세린의 얼굴이 붉어진 것과 동시에 제이가 푸른빛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 응?”
10분의 제한시간이 끝난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