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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85화 (85/218)

85화. 살아있어

세린은 멍하니 그 푸른 눈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 눈동자의 주인공이 제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이공자!!!”

그리고는 곧장 제이에게 다가와 그의 등부터 얼굴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날 알아보겠어요? 어디 아픈 곳은 없고요?”

눈물이 살짝 고여 있는 그 아름다운 눈동자를 말없이 바라보며 제이는 수려한 얼굴을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세린의 하얀 손목을 힐끔 바라보며 그녀의 상처도 모두 치료되었음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세린은 그런 제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툴툴 거리듯 작게 미소를 지으며 제이를 향해 말했다.

“정말... 공자가 큰일이라도 날까봐 얼마나 걱정을....”

휘리릭!!

쿠당탕탕!!!

갑자기 공중에서 번개처럼 날아오는 하얀 무언가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하얀 무언가는 제이의 방향으로 재빠르게 달려들었고 제이는 눈을 찌푸리며 더 빠르게 뒤로 피했다.

제이의 방향전환으로 빈 침대에 착지한 무언가는 본인의 힘에 못 이겨 부서지는 침대를 무시하고 제이를 불타는 눈으로 노려봤다.

제이는 입술을 살짝 비틀며 말했다.

“리사. 일어나자마자... 오라버니의 환영식을 제대로 하는구나.”

그 하얀 무언가는 리사였다.

리사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분노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환영식으로 보인다니 다행이군요. 오라버니의 장례식일 수도 있었는데...”

“죽었다가 살아났더니 다시 죽이려고?”

“이왕이면 열 번 더 죽어주시길 바라지요...”

그렇게 리사는 제이에게 달려들었다.

쿠당탕탕!! 콰과광!!

세린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두 남매의 격투극의 시작에 멍하니 방관했다.

어쩐지 한 편의 전쟁을 주제로 한 무대를 보는 듯 한 몸놀림에 감탄하며 왜인지 모르게 박수를 쳐야할 것 같았다.

그런 세린을 향해 이엔이 다가갔다.

“전하, 아무래도 자리를 피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러게.”

맞다. 생사를 알 수 없어서 걱정했을 남매끼리 서로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세린은 두 사람의 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이엔을 따라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무언가를 잊어버렸다는 느낌을 받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뭔가 까먹은 것 같은데...’

뭐였더라?

그건 어쩌면 진료실 안에 서서 스페라도 남매의 전쟁을 지켜보는 황궁의 의원이 아니었을까?

의원은 진료실이 개판이 되어가는 장면을 관찰하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올 해는 반드시 관두리라...’

그런 슬픈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

이엔은 세린을 부드럽게 이끌며 세린의 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휴식이 부족하십니다. 조금 더 쉬십시오.”

“응... 고마워 이엔.”

세린은 이엔을 바라보며 따스하게 웃었다.

이엔은 그립고 그립던 그 미소에 불안함으로 가득 찬 제 속에 안정을 찾으며 함께 미소 지었다.

세린은 그런 이엔의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정말이야. 너와 리사경이 없었다면... 제이공자도 없었다면 난 정말...”

“더 일찍 구해드리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죄송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덕분에 살았다고! 여기서 네가 더 사과하면 나 이제 고맙다는 말 안 할 거야!”

“.... 네.”

이엔은 세린의 툴툴거리는 말투에 미소가 깊어졌다.

다시 돌아온 이 일상의 공기가 너무도 달콤했다.

이엔은 그 평화로움과 따뜻함을 만끽하며 세린을 서둘러 방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지금 휴식이 필요했다.

세린은 이엔의 안내를 따라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워 이불을 코 밑까지 덮고 눈을 감았다.

이엔은 자연스럽게 문 밖으로 이동했고 방은 조용했다.

그 고요함이 마음에 들어서 세린은 작게 미소를 지르며 눈을 감았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

대뜸 생각난 제이의 음성에 세린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초점이 흐려진 푸른 눈동자로 자신을 올곧게 바라보던 그의 그 한 마디에 자신은 얼마나 놀랐던지.

‘사랑에 정의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사랑이 다르듯 내려지는 정의도 달라지지요.’

세린의 머릿속으로 멜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냥 매일 보고 싶고 안고 싶고 그 사람 생각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요?’

세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보고 싶고 안고 싶고...

깊이 생각에 빠져가는 세린의 눈이 무거워졌다.

천천히 잠에 들어가던 세린의 눈이 이내 굳게 닫혔다.

오랜만의 휴식이고 오랜만의 깊은 잠이었다.

*

세린이 잠든 시각, 남부에 도착해서 남부의 상황을 정리 중이던 로레인은 진땀을 흘리는 트레일을 바라보며 한숨같이 물었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이 녀석을 살려달라고?”

“그... 형님 있잖아요, 제가 일단 급해서 포션도 다 부어버리고 형이 준 단추도 사용하기도 했는데 그래도 부족했던지....”

당황을 가득 품은 다급한 말투를 들으며 로레인이 눈을 돌려 바닥에 고이 눕혀 거칠게 숨소리를 내뱉는 헤일리를 바라보았다.

헤일리가 트레일의 품에서 숨이 멎어갈 무렵, 트레일은 제 품에 있던 포션을 들이 부어 헤일리의 상처에 뿌렸었다.

그래도 상처의 깊이가 깊어 다급히 옷의 단추를 뜯어 마력을 불어넣어 치유도 해주었으나 마력이 더는 부족해서 손을 댈 수 없었다.

멎어가는 숨소리가 아주 작은 생기를 담았지만 이 상태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 분명했다.

트레일의 입술이 꾹 깨물어지다 이내 헤일리를 다시 품에 안고 황성의 뒤에 곱게 눕혀주었다.

“조금만 버텨요.”

그리고는 서둘러 세린이 있을 방향으로 달려 올라갔다.

그 후, 황성의 옥상에서 브론을 지옥(?)으로 보내버린 로레인을 이끌고 서둘러 헤일리가 누워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헤일리의 얼굴에서 점차 생기가 사라져갔다.

“형님... 저... 그러니까... 좀 살려주세요...”

“나더러 남부의 황녀를 살려라?”

로레인의 미소가 짙어졌다.

“으헉!!”

트레일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아니.. 그... 저 황녀도 나 구해주기도 했고... 황태자 그 새끼에게 당한 피해자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피해자?”

“그 황태자 놈이 제 동생 등에 마법으로 인장을 새겨서 터트렸더라고요...”

“......”

인장을 제 동생에게?

어이가 없어서 말도 나오지 못한 로레인은 시선을 내려 헤일리를 바라보았다.

피가 가득 묻은 드레스와 생기라고는 없는 피부.

죽어가는 것이 명백했다.

로레인은 그런 헤일리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황성에서 안전하게 있을 세린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세린과 비슷한 나이의 또래인 헤일리는 가족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었다.

‘오빠!’

밝게 웃는 여동생의 미소와 지금 헤일리의 모습이 겹쳐지며 로레인의 가슴을 쓰라리게 만들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로레인은 트레일에게 말했다.

“알겠어. 대신.”

“....?”

“얘는 네 책임이야. 어떻게 어디에서 자리를 잡게 할지는 네가 알아서 책임져.”

“.... 형님!!”

트레일의 얼굴이 밝아지고 로레인은 그런 동생의 표정에 픽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로레인은 크고 고운 손을 헤일리의 배 위로 올려 마력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푸른빛이 황성의 대지를 감쌌고 어둑한 밤의 안개 속에서 화려하게 빛났다.

생기를 품은 바람이 조용히 헤일리에게로 불었다.

하루아침에 남부의 황성은 무너졌다.

남부의 황제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고 남부의 황성 지하에서 2황자와 1황녀로 보이는 시체를 발견하였다.

심지어 황태자의 모든 만행이 밝혀지며 남부제국의 국민들의 충격은 갈수록 커져갔다.

마탑의 후원자, 생체실험에 쏟은 지원금, 같은 황족에게 새긴 마법인장, 그리고 동북제국의 유일한 황녀의 납치, 동북의 3황자 살인미수 등 끝도 없이 죄는 이어졌다.

테오는 불안에 떨고 있는 남부의 국민들을 잠재우기 위해서 동북 제국의 소속으로 남부를 합쳤고 이를 모두에게 알렸다.

황태자를 죄인으로 구속시켰으니 안심하라는 그 말과 마탑의 섬멸을 들은 국민들의 마음은 천천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 누군가가 눈을 떴다.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리자 밤하늘을 닮은 남색의 눈동자가 빛이 났고 생기를 머금은 분홍빛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섬세한 이목구비가 아름다웠고 침대에 단정하게 정리된 푸른 머리카락이 눈부셨다.

천천히 눈을 뜬 헤일리의 시선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보였다.

“......”

천국인가... 난 죽었는데.

헤일리는 그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지옥이 원래 밝다고 했던가....”

“전 지옥은 어둡다고 들었는데요?”

“...!!!!”

말하기 무섭게 바로 옆에서 들리는 굵은 음성에 헤일리가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커다란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본 헤일리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토록 가슴을 아프게 만든 붉은 눈동자와 분홍빛 머리카락을 천천히 응시하며 헤일리는 두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트레일은 그런 헤일리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이고 말했다.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ㅈ....”

“지옥이 맞잖아...!!”

“..... 엥?”

“고문을 하는 거야... 사람 마음을 가지고 고문을 하는 거라고....!”

“.......”

헤일리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삼켰다.

트레일은 침묵했고 말이다.

생각보다 헤일리를 진정시키는 것에는 오래 걸렸다.

트레일은 진땀을 빼며 헤일리에게 말했다.

“황녀.. 아니 헤일리! 절 보세요! 봐요, 저 온기를 가지고 있는 산 사람이고 헤일리를 봐요! 헤일리도 온기를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에요.”

“......”

“아오 정말! 자!! 이것 봐요!”

여전히 불신이 가득한 헤일리의 눈빛에 트레일이 발끈해서 헤일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

헤일리의 눈이 커졌다.

제 손보다 커다란 손은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온기와 같은 온도의 제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살아있었다.

자신은 살아서 숨을 쉬고 사랑하는 이의 앞에 서있었다.

헤일리의 눈이 잔뜩 커지며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눈물이 차올랐다.

트레일은 그런 헤일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으며 웃었다.

“봐요, 살아있죠?”

헤일리의 눈에서 결국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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