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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84화 (84/218)

84화. 집으로 돌아가자

포션에 닿은 그의 등에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등의 척추에서 생긴 내상부터 천천히 아물고 있어 포션 한 병으로는 부족했다.

리사는 제 품속에서 또 한 병의 포션의 뚜껑을 열고 그의 등에 들이 부었다.

봐도 또 봐도 욕이 저절로 나오게 하는 미친 새끼였다.

이 상처로 얼마만큼의 시간을 버틴 것인지 몰랐다.

벌어져가는 상처들의 모양을 볼 때 아마도 다친 채로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 것이 분명했다.

리사가 제이의 등에 집중할 때 이엔은 세린의 손에서 족쇄를 빼내었다.

철컹하고 동굴바닥에 떨어진 족쇄를 바라본 이엔은 입술을 꾹 깨물었고 세린과 서둘러 제이의 곁으로 달려갔다.

세린의 손목과 손도 엉망진창이었지만 지금은 제이의 상태가 위급했다.

세린은 리사가 든 포션이 바닥을 보이자 다급히 물었다.

“경... 포션은 더 없는 건가요?”

“..... 네.”

리사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제이의 등을 살폈다.

아직 완전히 치유가 되려면 포션이 한 병은 더 있어야 했다.

리사는 제이의 상처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고 자책했다.

‘아까 내 상처를 포션으로 치료를 했으면 안 되었어...!’

아직도 깊은 그의 상처들을 보았을 때 치료를 위해서 그를 옮기다가 과다출혈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리사의 얼굴이 굳어갔다.

세린은 그런 리사의 손을 다급히 잡아준 후 말했다.

“이제 제가 할 테니 리사경은 잠시 물러나주세요.”

“전하.”

“이 정도는 괜찮아요.”

세린은 조심스럽게 제이의 등에 두 손을 올렸다.

그의 흐릿한 시선 속이서 제 모습이 담겼을 때, 제이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매일 전하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 미소가 매일같이 보고 싶어서... 되지도 않는 고집을 부려가며 황성으로 달려갔습니다....’

세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의 등으로 향한 상처 입은 두 손에서 그녀를 닮은 연두색 빛들이 뿜어져 나왔다.

‘전하께서 시선을 주는 모든 것들에 불쾌해 하고 유치한 질투를 하고... 당신의 모든 것들에 욕심이 납니다... 점점 멍청해지고... 더 닿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애처롭게 매달린 눈물이 한 방울씩 제이에게로 떨어졌다.

‘누가 저한테 그랬죠....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맞아요..’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이의 사랑에 정의는 멜과 같이 욕심이었나.

그는 언제부터 나를 사랑했을까.

도대체 언제부터 나를...

세린은 마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모아 그의 등에 쏟아 부었다.

점점 하얗고 단단한 상체가 온전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고 제이의 호흡이 고르게 변해갔다.

생기를 되찾아가는 제이의 얼굴을 보며 리사가 참았던 숨을 내뱉었고 이엔은 불안한 눈으로 세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린의 코에서 붉은 피가 뚝 떨어졌다.

“... 전하!!”

“괜찮아, 거의 다 됐어.”

이엔과 리사의 외침에 세린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겨우 코피일 뿐이었다.

이 우스울 정도의 코피를 제이와 다른 이들의 상처와 감히 비교나 할 수 있을까.

저들이 자신을 위해 흘린 땀들과 피들을 생각하면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세린은 이를 악물고 손바닥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환한 연두색 빛과 함께 세린이 휘청거릴 무렵 누군가가 세린의 등에서부터 손을 뻗어 세린의 작은 손을 붙잡았다.

“...!!”

세린이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 발견한 것은 로레인의 아름다운 눈이었다.

“오빠...”

“수고했다. 나머지는 오빠가 하마.”

부드럽게 웃은 로레인은 조심스럽게 세린의 손을 내려주고 제 손을 뻗어 환한 푸른빛들로 세린과 제이를 감쌌다.

푸른색의 빛 속에서 제이의 상처는 완전하게 아물었고 생기를 되찾은 아름다운 얼굴은 평온해졌다.

세린의 상처가 난 손가락과 손목도 본래의 하얀 피부로 돌아왔다.

세린은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로레인을 바라보았다.

로레인은 세린의 눈물을 닦아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집으로 돌아가자...”

“......”

세린은 말없이 로레인의 품으로 파고들며 울었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로레인은 세린과 일행을 워프 시켜서 동북의 황성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곧 제이를 황성의 의원에게 맡기며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도왔고 리사와 이엔에게도 진찰을 받아 세부적으로 몸을 검진하라는 의무를 내렸다.

그리고 제 품에 안겨있는 세린을 향해 물었다.

“세린, 넌 조금 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방으로 가자.”

“오빠....”

“....?”

“나 제이공자 옆에 있을게요...”

“......”

로레인의 침묵이 길어졌다.

천천히 생각을 정리한 로레인은 다시 세린을 향해 말했다.

“내가 그의 곁에 있어줄 테니 넌 가서 쉬는 것이 어떻겠니? 깨어났다면 바로 너에게 알려 주마.”

세린은 슬픈 눈으로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말했다.

“제가 옆에 있을게요... 있어주고 싶어요...”

“.......”

로레인의 미소에 금이 갔고 동시에 리사의 얼굴에도 금이 갔다.

눈을 감고 평온해 보이는 제이를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째려보던 리사는 고개를 휙 돌리고 이를 뿌득뿌득 갈았다.

환자만 아니었다면 죽였을 기세였다.

이엔은 그런 세린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사랑하는 여동생의 부탁에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로레인에게 없었다.

천천히 눈을 굴린 로레인이 이내 한숨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세린이 그의 품에 다시 한 번 꼭 안겼다.

그리고 로레인은 제이가 누워있는 옆 침대에 조심스럽게 세린을 내려주었다.

로레인은 지금 남부로 가서 트레일과 테오를 도와 남부를 정리하고 다시 돌아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저 짐승 옆에 사랑스런 아가를 내려놓고 가라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아니, 당연하게도 세린을 살리려 노력해준 제이가 고맙기는 했다.

하지만... 오빠 된 사람으로서 질투심이 불타오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계속 뒤를 돌아본 로레인은 세린이 제이를 바라보며 침대에 자리를 잡고 앉자 한숨을 쉬며 쓰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만 봐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깊이 잠든 제이를 바라본 로레인은 망설임 없이 서둘러 남부로 향했다.

암살자에게 쫓겼을 무렵, 제이는 절벽에서 떨어지며 정신을 잃은 세린을 안고 물 안으로 잠수했다.

물에 닿은 등의 상처가 고통스러웠으나 머뭇거릴 틈은 없었다.

물속에서부터 재빠르게 남은 마력을 쥐어 짜내어 도망친 제이는 세린을 안고 있는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놓으면 사라질까 무서워 꽉 잡은 세린의 작은 몸을 들고 제이는 암살자들의 살기를 피해 가까운 동굴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흔적을 지워가며 걸어가기에는 너무도 지쳤고 정신을 올바르게 차릴 수도 없었다.

무거운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며 제이는 입술에 피가 나도록 꽉 깨물었고 동굴 안으로 조심스럽게 세린을 눕혔다.

그리고 그 옆으로 이미 한계를 넘어버린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듯이 누웠다.

털썩!

이미 뿌옇게 변해버린 시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세린을 담은 제이는 부들거리는 손을 뻗어 세린의 손목에 있는 족쇄를 꾹 쥐었다.

‘풀어야...’

하지만 손에서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족쇄를 붙잡은 손가락이 점점 동굴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

‘세린...’

곱게 눈을 감고 있는 아름다운 그 이목구비를 천천히 뜯어보며 제이는 정신을 잃었다.

‘젠장....’

그녀를 완벽하게 지키지 못한 제 자신을 욕하며 제이의 눈이 굳게 닫혔다.

그리고 취한 듯 어지러운 시야와 정신을 오고가며 여러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과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리사와 이엔.

그리고 다시 기억이 없었다가 천천히 떠진 눈은 하얀색의 아름다운 무늬를 가진 천장을 담았다.

“......”

어색한 조용함 속에서 제이의 푸른 눈이 천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동굴이었던 것 같은데... 동북으로 돌아온 건가...’

그리고 천천히 밝은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과 싱그러운 나무들 사이로 동북제국의 특유의 미를 자랑하는 황성이 보였다.

제이는 말없이 그 웅장한 성을 관찰하다가 귀를 자극하는 고운 숨소리에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구불거리는 분홍빛 머리카락이 하얀 침대 시트 위에 흐트러져 있었고 늘 그의 가슴을 거칠게 두드리던 사랑스러운 눈동자가 깊이 감겨 있었다.

꼬물거리며 옹알거리는 작고 귀여운 입술 사이로 옅은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두 손을 모으고 몸을 웅크린 채 잠든 여인의 모습에 제이는 말을 잃었다.

“......”

꿈인가...

제이의 손이 천천히 세린을 향해 뻗었다.

말캉한 볼에 손가락이 닿자마자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제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가슴을 터트릴 듯이 다가온 안도감에 제이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자신이 살았다는 것보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이 제이를 무너트렸다.

무사했어... 살아있었어...

제이는 두 손에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부진 상체가 여실 없이 들어났으나 제이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천천히 얼굴을 쓸어 올리고 호흡을 가다듬은 제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세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똥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연두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 보석 같은 눈동자에 잠시 말이 없던 제이는 딱 한마디를 내뱉고 굳어버렸다.

“.... 아.”

“......”

그리고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세린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단단하고 섬세한 근육이 붙은 몸에 시선과 생각을 동시에 멈췄다.

‘엥...?’

아름다운 몸의 선에 맞춰 근육들이 굴곡을 지고 있었고 단단한 팔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하얀 머리카락이 보였다.

햇빛에 반짝이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생각을 멈춘 세린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돌린 그 사람은 너무도 수려한 얼굴로 세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 아.”

“......”

세린도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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